E. F. 슈마허의 <작은 것이 아름답다>

인간 중심의 경제를 위하여

‘모든 형태의 사회적 불행 뒤에는 오직 거대함이라는 한 가지 원인이 있다.’

오스트리아 출신의 경제학자이자 정치철학자인 레오폴트 코어 교수의 이 말에서 우리는 그 안에 응축된 작은 것의 가치를 읽을 수 있다. 마을 재생과 친환경적 교통수단에 대한 개념을 발전시킨 인물이기도 한 코어는 인간적 규모의 소도시 사회를 추구했다. 그는 작은 나라에 사는 사람들이 더 행복하고, 더 평화롭고, 더 창조적이며, 더 번영했음을 역사가 보여줬다고 말한다. 코어의 이러한 거대주의에 제동을 걸었던 사상이 독일 태생의 영국 경제학자 에른스트 슈마허에게 깊은 영감을 주었고, 그 결과로 <작은 것이 아름답다>라는 이 고전이 탄생하게 되었다.

1973년에 출간된 <작은 것이 아름답다– 인간 중심의 경제를 위하여>는 20세기 산업자본주의와 그것이 만들어낸 물질주의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 담긴 책이다. 경제 성장이 인류의 영속적 평화와 행복을 보장할 것이라는 굳은 믿음에 반기를 든 것이라 하겠다. 슈마허는 인류의 모든 가치가 경제적 가치에 종속되면서 인간은 경제의 노예가 되었다고 주장한다. 인간의 행복을 위한 수단에 불과했던 경제가 도리어 인간의 주인으로 군림하고 있다는 뜻일 게다. 그 과정에서 절대적 역할을 한 것이 바로 경제학이요, 그것이 근대인의 모든 사고와 행위를 규정했다고 보았다.

사실 이러한 비판은 이제 더 이상 새로울 것이 없는 너무도 익숙한 얘기다. ‘가치 판단의 기준’이 ‘돈이 되느냐의 여부’에 있는 시대에서 거대주의와 물질주의는 이미 우리 삶에 너무 깊이 개입하고 있는 내면화된 가치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성장 지상주의에 사로잡힌 채 살아가는 우리 현대인의 숙명일지도 모르겠다. 이것이 <작은 것이 아름답다>가 시대를 뛰어넘어 지금까지도 계속해서 읽히는 이유일 테다.

에른스트 슈마허가 성장이 최고의 가치였던 시대에 작은 것이 아름답다고 선언한 것은 성장의 결실인 ‘큰 것’만이 위대하다는 전제에 대한 도전이었다. 인간은 자신들이 이뤄낸 기술력에 도취되어 무한 성장이 가능하다고 자신했지만, 그 믿음은 결국 인류가 공멸로 향하고 있음을 확인시켜주었을 뿐이다. 그는 말한다. 이제 우리는 거대해지는 것에 대한 환상을 거두고 적정한 것을 추구해야 한다고. 이미 ‘큰 것’의 신화에 매몰돼버린 현대인의 눈에 적정한 것이란 그저 작고 하찮아 보이는 그 무엇에 불과할지도 모르지만, 그 너무 작아 보이는 것을 적정한 것으로 판단할 수 있는 새로운 경제학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성장 일변도의 경제학이 초래한 생태계의 파괴와 문명의 종말을 피할 수 있는 영속성의 경제학이라는 것이다.

나는 그의 아주 많은 얘기에 공감했지만, 유독 이 ‘거대해지는 것을 버리고 작은 것을 선택하는 경제학’에 매료되었다. 특히 중간기술이라는 개념이 나의 시선을 끈끈하게 붙들었다. 적정기술이라고도 부르는 그것은 낙후된 지역이나 소외된 계층을 배려한 기술을 가리킨다. 즉 해당 지역의 환경이나 경제, 사회적 여건에 맞도록 만들어낸 기술을 말한다. 최고의 원조는 지식 원조라 하지 않던가. 빈국에 대한 일회성의 도움이 아닌 궁극적으로 그들이 일상에서 자립하는 데 유용한 지식의 증여가 구현된 것이 바로 중간기술이 아닐까 싶다.

슈마허는 ‘대량 생산 기술’과 ‘대중의 생산 기술’을 구분하였다. 전자는 본질적으로 폭력적이고 생태계를 파괴할 뿐만 아니라 재생 불가능한 자원을 낭비한다. 반면에 후자는 근현대의 지식과 경험을 가장 잘 활용하고 분산화를 유도하며 생태계의 법칙과 공존하고 희소한 자원을 낭비하지 않는단다. 또한 인간을 기계의 노예로 만드는 대신 인간에게 유용하도록 고안되었다나. 슈마허는 후자인 이 대중의 생산 기술을 ‘과거의 원시적인 기술보다 훨씬 우수하지만, 부자들의 거대한 기술에 비하면 훨씬 소박하고 값싸며 제약이 적다’는 의미에서 ‘중간기술’이라고 명명하였다.

이 중간기술의 핵심은 흔히 말하는 첨단 기술이나 최신 기술이라는 데에 있지 않고, 바로 많은 비용이 들지 않고 누구나 쉽게 배워서 쓸 수 있다는 데에 있다. 그러니까 그것을 쓰게 될 사람들의 사정에 맞는 기술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이것을 자조의 기술, 민주적 혹은 민중의 기술‘이라고도 불렀단다. 슈마허는 가난한 나라에 진정 필요한 것이 바로 인간의 얼굴을 한 이 중간기술이라고 말한다. 이 기술은 인간의 손과 머리를 쓸모없는 것으로 만들지 않고 이전에 존재한 그 어떤 것보다도 인간이 생산적으로 일하도록 도와준다는 것이다. 이는 지역사회에 기반한 노동과 자원을 염두에 두고 소규모 작업장이나 중소기업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으로서 환경운동가들에게 많은 영감을 주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더 성장하고 더 거대해지려는 욕망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시도를 할 수는 있을까? 이 시도는 우리의 탐욕과 시기심을 훨씬 약화하는 데서, 사치품을 필수품으로 전환하려는 유혹에 저항하는 데서, 심지어 우리의 욕구를 단순화하거나 줄일 수 없는지 꼼꼼히 점검하는 데서 시작해야 할지도 모른단다. 사실 이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이 중 어느 한 가지도 잘 해내지 못할 수도 있다. 슈마허는 이렇게 묻는다. ‘영속성을 보증할 수 없을 것 같은 경제적 ‘진보’ 유형에 박수갈채를 보내는 일을 멈추는 것은 가능하지 않을까?‘라고. 어디 그뿐인가? 그는 또 자연 보호론자, 생태학자, 야생동식물 보호론자, 유기농 업자, 분배제도 개혁자, 촌락 생산자 등에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선에서 조그마한 지지를 보내는 것은 가능하지 않겠느냐고 반문한다. 수많은 이론보다 하나의 행동이 귀중하다면서 말이다.

그렇다. 우리가 공존할 수 있는 평화로운 경제적 토대를 건설하려면 수많은 행동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이윤만을 좇는 화폐적 가치 따위의 폭력을 극복하고 보다 지혜로운 삶을 위해 사람이 자연과 조화롭게 어우러지는 이상적인 경제는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열역학적 한계 속에서도 인류가 지속 가능한 삶을 영위하기 위한 방법은 무엇일까?

기존의 경제시스템 하에서는 인간의 모든 경제적 노력이 행복을 위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는 타인을 착취하고 생태계를 파괴하는 행위로 전락하고 만다. 슈마허는 이와 같은 악마적 순환의 고리를 끊어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근대인의 삶에서 과대평가된 경제학이 제자리를 찾아야 한다는 거다. 전도된 인간과 경제의 관계가 인간을 위한, 인간 중심의 경제로 다시 복원되어야 한다는 거다. 슈마허의 논리대로라면, 모든 가치를 화폐로 환산하려는 악마의 유혹으로부터 벗어날 때라야 비로소 경제는 인간의 얼굴을 회복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만 된다면 경제의 존재이유가 인간의 행복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또 하나 우리가 직시해야할 것은 이제 과거와 같은 고도성장은 불가능해졌다는 것이다. 그에 따라 사람들의 소득은 정체되거나 하락될 것이며, 이에 따른 안전망이 필요하게 되리라는 거다. 이러한 상황에서 ‘공동의 것’을 만들며 공동의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지역 기반의 공동체를 만들고 그 안에서 자율적으로 운영하는 자치를 통해 사람들 간의 연결이라는 관계적 부(富)를 창출하고 있다. 이 공동체들이 자체적인 규칙과 규범에 따라 공동으로 다스리는 공유된 자원에는 자연적 산물인 물이나 땅뿐만이 아니라 문화나 지식과 같은 자산들까지도 포함된다. 이와 같이 변화된 환경 하에서 사람들은 이제 더 이상 자연의 훼손이라는 대가를 치루고 얻어내는 가치를 추구하지 않으려 한다. 대신 자연과의 공존 속에서 만들어내는 생성적 가치를 더 존중하는 쪽으로 체제가 전환되고 있다.

나는 이와 같은 공동체 기반의 경제활동이 슈마허가 주장한 불교경제학과도 일맥상통한다고 본다. 왜냐하면 불교경제학은 지역의 자원을 이용해서 그 지역에 필요한 물건을 생산하는 게 가장 합리적인 경제생활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현대경제학이 최적의 생산 패턴으로 소비를 극대화하려고 한 반면, 불교경제학은 적절한 소비 패턴으로 인간의 만족을 극대화하려고 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좋은 삶이란 인간의 탐욕과 이윤으로 돌아가는 돈의 경제가 아니라 필요한 것들을 함께 조달하며 사람과 자연이 평화롭게 공존하는 대안경제를 지향하는 것일 게다. 그것이 슈마허가 제안한 ‘인간 중심의 경제’를 위한 변(辯)에 더하여 ‘생태 중심의 경제’로 한 단계 더 도약하는 길일 것이다. 또한, 불교경제학에서 말하는 ‘근현대의 성장(물질주의자의 부주의)’과 ‘전통의 정체(전통주의자의 부동성)’ 사이에서 올바른 발전 경로인 중도, 즉 ‘올바른 생활(正命)’을 발견하는 길이 될 것이다.

탐욕과 이기심의 지배에서 자신을 해방한 후라야 경험할 수 있는 평정 상태가 다른 방법으로는 결코 얻을 수 없는 지혜의 통찰력을 제공한단다. 문득… 이 글을 마치며 새삼 인간다운 규모의 삶일 수도 있을 ‘작은 삶’을 귀하게 대접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행복을 누리고 진정으로 가치 있게 살아갈 수만 있다면 작은 것도 충분히 아름다울 수 있다는 이 당연한 진리가 어느새 내 안에 용기를 장착한 지혜로 스며든 이유이리라.

2 thoughts on “E. F. 슈마허의 <작은 것이 아름답다>”

  1. 슈마허의 주장으로 작은 가내 초코렡 농장주, 작지만 자기것의 철학을 가지고 작품을 만들어내는 예술가들.. 지금 우리가 어쩌면 지향해야가는 곳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너무 좋은 책을 알게 되어 다시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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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책을 읽다보면 샘이 늘 말씀하시던 작은 공동체의 미래가 그려지는 것 같았어요.
      언제가는 샘이 이루실 그 목표~ 기대됩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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