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르마’에 관한 단상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모든 일은 마음이 짓는 거다!!

이 짧지만 강렬한 문구를 보면 자연스레 떠오르는 이름이 있다. 바로 원효대사. 그가 밤에 잠을 자다 목이 말라 마실 때는 그렇게 달고 시원했던 물이 아침에 일어나 해골에 담겨 있는 걸 보자마자 토악질을 했다는… 그때 깨달으셨다지. 이 세상 모든 일이 마음에서 생기는 것임을~ 결국 마음(의식)만이 있다?

오늘은 ‘까르마(karma)’ 얘기를 해보려고 한다. 사실, 난 까르마에 대해 아는 바가 없다. 그저 ‘업(業)’, ‘업보(業報)’, ‘식(識)’ 이런 말의 다른 이름이라는 것밖에. 그리고 입과 몸과ᅠ마음으로ᅠ짓는ᅠ선악의ᅠ소행을 의미한다는 정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뭔가를 써보겠다고 이렇게 모니터 앞에 앉은 내가 대견하다. 난 대체 뭘 쓰고자 함인가. 그저 의식의 흐름대로?? ㅎㅎ

불교에서는 인간의 마음은 본래 청정하다고 보는 것 같다. 모든 중생은 깨끗한 마음을 가지고 있지만 살아가면서 업을 짓게 된다고. 업(業), 즉 까르마는 인간의 말, 생각, 몸으로 하는 그 모든 행위를 통하여 드러난단다. 이 까르마는… 개인의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역사와 문화를 통하여 전달되는 공동체의 업도 있단다. 공적이든 사적이든 인간이 업을 짓게 되면 그 의식 가장 밑바닥에 쌓이는가 보다. 원래는 청정했던 중생의 마음 속 가장 깊은 곳엔 선업과 함께 오염된 악업도 차곡차곡… 인간의 모든 업은 사라지지 않고 그렇게 축적된단다. 이것이 무의식이다.

정신분석학자 프로이트가 무의식을 성충동이니 트라우마의 장소니 하는 부정적인 측면에서 바라봤다면 분석심리학자 칼 융은 그 안에 잠재된 긍정적 생활에너지를 보았다. 칼 융이 무의식을 프로이트와 다른 관점에서 접근하게 된 건 동양철학의 영향을 받은 것이리라. 사실 이 무의식의 대가들보다 훨씬 이전에 동양에서는 이미 무의식을 수행의 대상으로 보았으니까. 자기도 모르게 쌓여가는 까르마의 축적물 위에서 특정 대상인 자아에 집착하면서 고통이 생겨난다고 보았던 것이다.

난 지금 ‘까르마’, ‘업’, ‘식’… 이런 단어들을 보며 문득 무의식에 대한 얘기가 하고 싶어졌나 보다. 이렇게 흘러온 걸 보면 말이다. 그럼 무의식에 앞서 우리의 의식에 대한 얘기부터 시작해보자. 의식은 투명하다. 이게 무슨 의미냐고? 내가 나의 의식을 모를 수는 없다는 얘기다. 나는 지금 이 순간 ‘까르마’에 대해 뭘 써야 하나 생각하고 있는 나를 의식하고 있다.의식은 흘러간다. 어느 한 순간의 의식, 그런 건 없단다. 갑자기 ‘의식의 흐름대로 글쓰기’로 유명한 작가 버지니아 울프가 생각나는 건 뭐지? ㅎㅎ

그리고 가장 중요한 명제, 의식은 지향적이다. 즉 의식이라 함은 항상 ‘무엇에 대한’ 의식이라는 것이다. 아무런 대상이 없는 의식, 그런 건 없다는 거다. 이 말인즉슨 대상이 있어야 의식이 있을 수 있고, 의식이 있어야 대상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더 쉽게 말하자면 의식은 대상과 관계를 맺을 때만 의식이고 대상은 의식과 관계를 맺을 때만 대상이 된다. 결국 의식과 대상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이처럼 의식과 대상은 서로 관계를 맺어야 존재할 수 있단다. 그렇다면 진짜로 존재하는 건 의식인가, 대상인가. 실재론자들은 존재하는 것은 의식 밖에 있는 대상이라고 대답할 것이고, 관념론자들은 존재하는 것은 의식일 뿐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진짜로 존재하는 건 ‘의식 속의 대상’ 아닌가? 현상학의 창시자 후설(Edmund Husserl )이라면 분명 이리 답하겠지?

의식과 대상이 따로 존재한다고 보면 이 둘의 일치 여부가 진리의 기준이 될 게다. 의식과 대상이 일치하면 그것이 진리고, 일치하지 않으면 진리가 아니라고 말하지 않을까? 그래서 그 오랜 세월 철학자들은 진리를 찾기 위해서 대상을 그토록 꼼꼼하게 살핀 거다. 하지만 후설의 입장을 받아들이면 의식과 대상은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의식이 곧 대상인 거다. 그러니 이제는 진리를 찾기 위해 대상을 꼼꼼히 살필 것이 아니라 나의 의식을 꼼꼼히 살펴야 한다나.

이 세계 내에서 벌어지는 어떤 현상을 바라보는 태도는 사람들마다 각기 다르다. 모든 사람은 자신만의 방식으로 세상을 본다. 그렇게 세상으로 향한 시선을 나에게로 돌려 나의 의식을 살피고자 할 때 필요한 게 뭘까? 후설은 현상학적 태도를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즉 우리의 일상적 사유로는 포착하지 못했던 대상의 본질을 자신의 순수한 의식으로 직관해야 한다는 것이다. 현상학적 태도로 본다는 것은 멀리 떨어져서 본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한 걸음 물러나서 관찰자의 태도를 가진다는 것, 그것은 초월적 자아를 발견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게다.

나의 의식은 단순히 내 몸에 국한되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란다. 나의 의식은 과거로 돌아갈 수도 있고 미래의 어느 순간을 상상할 수도 있다. 나의 의식은 지금 워싱턴주에 계신 케이트님에게도 갔다가 사천의 현주쌤에게도 가고 안양의 예슬샘에게도 갈 수 있다. 나의 육체는 지금 여기에 매어있지만 나의 의식은 시간과 공간에 걸쳐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초월적 자아는 이렇게 시공간에 매어있지 않다는 거다.

그러면 이제 얘기를 동양의 연기설(緣起說)로 옮겨보자. 여기서 연기(緣起)란 여러 가지 원인에 의하여 생기는 상관관계의 원리이다. 인연의 이치를 의미하는 불교 교리라고나 할까. 연기설(緣起說)은 모든 것은 인연이라는 원인에 따라 관계에 의해 존재할 뿐 나라고 말할 만한 개별적 실체가 없다는 의미이다. 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 그것이 생겨날 원인과 조건이 맞춰져야 한다는 거다. 나라는 존재는 어떤 실체나 나를 있게 하는 어떤 본질이 따로 있어서가 아니라 그저 원인과 조건에 의한 결과로써만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원인과 조건이 맞춰지지 않으면 존재할 수 없고 또 나를 존재하게 한 원인이 사라지면 나라는 존재도 사라지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말을 자주 들어봤을 게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저것이 있으므로 이것이 있다.’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도 관계를 벗어나 존재할 순 없다는 뜻이다. 이 세상 모든 것이 관계로 인해 존재한다는 것. 이 말 뒤에 따라올 얘기가 연상되지 않는가? 맞다. 관계망이 존재할 뿐 나라는 실체는 존재하지 않으니, 나라는 존재에 대한 집착과 욕망을 버리라! 거기서 벗어나 모든 것이 텅 비어 있음(공:空)을 깨닫게 될 때 진정한 행복에 이르게 되나니. 아… 정말 그렇게만 하면 나도 진정한 해방을 맛볼 수 있을까?

이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망상에서 벗어나 깨달음을 얻는 상태라고 할 수 있을 게다. 이 우주의 모든 존재현상은 변화한다. 고정된 실체가 될 수 없으니 그래서 공(空)이다. 그저 비어있다는 것이다. 바깥에 있는 모든 대상은 서로 ‘인(因)’과 ‘연(緣)’에 의해 관계 지어지며 형성된다. 모든 것이 연기되어 있고 실체로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이 공(空) 개념은 부처의 깨달음을 연기론으로 해석한 것이다. 실체가 없는 것을 ‘존재’라고 말할 수 없으니 ‘공’이라고 말한다. 그렇다고 완전히 없다고도 할 수 없다. 그러니 또 ‘절대 무(無)’도 아닌 거다. 공 개념은 그러니까 ‘절대 무’도, 그렇다고 ‘존재’도 아니다.

이 관점에서 본다면 모든 존재는 그저 은폐되어 있다가 탈은폐 되는 것일 뿐이라고 한 말이 이해가 될 것도 같다. 존재자는 다른 존재자와의 관계를 통해 생성된다. ‘있음’도 아니요 ‘없음’도 아니다. 양극을 넘어선 그 관점에서 공이라고 했단다. 앞에서도 몇 번 강조했지만 공으로서 나타나는 이 세계의 모든 존재 현상들은 우리 인식이 없이는 드러나지 않는다. 인간의 인식이 없이는 존재도 없는 것이다. 그렇지. 우리 인간의 바깥에 존재하는 현상들은 우리 마음속으로 들어오고서야 존재한다고 할 수 있지. 아.. 난 지금 뭐라는 것이냐? 선문답에 빠져버린 나? 그래도 내가 하고픈 말은 이거다.

우리는 일상을 살아가면서 욕망하고 특정한 대상에 집착하고 또 아집에 빠지기도 한다. 그렇게 된 인간은 결국 망상 속에서 악업을 짓게 된다. 하지만 인간에게는 청정한 마음 또한 그 저변에 깔려 있단다. 바로 인간의 무의식은 악업을 선업으로 바꿀 수 있는 엄청난 힘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불교는 이미 프로이트와 융보다 훨씬 이전에 수행을 통하여 들여다봐야 하는 대상의 저장소로서 무의식을 얘기했다는 거다. 거기서 그치는 게 아니라 수행을 통해 악업을 선업으로 바꿔서 청정한 마음을 가진 자는 비로소 타자에게 나아가야 한다고 가르쳤다는 거다. 깨끗한 마음을 얻고 나 혼자만 행복한 게 아니라 이웃의 고통에 눈감지 않는 자비심을 갖고 타자로 향한다는 것이다. 이 부분이 나에겐 감동인 거다.

‘인간은 본래 악해!’ 라고 치부하며 포기할 수도 있었으련만. 인간 내면의 저 깊은 곳에 숨겨진 선한 씨앗의 발현가능성을 믿어주는 것만 같아서 고마웠다. 우리는 업을 안 짓고 살아갈 수는 없다. 다만 내 까르마의 경향성을 살피고 심층적 내면을 들여다보며 수행을 통해 나를 변화시킬 수 있다면 까르마가 꼭 나쁜 것만은 아닐 수 있다. 칼 융이 우리 무의식에서긍정적인 에너지를 발견한 것처럼 나 또한 이제는 까르마를 조금은 다른 시각으로 대할 수 있을 것 같다. 무엇보다 불교에서 가르쳐준 ‘까르마와 슬기롭게 동행하는 법’은 앞으로 어떻게 살것인가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하게 만들었다. 수행을 통해 집착에서 해방된 자의 그 청정한 마음이 타자를 향하게 된다는 것. 그리고 그 전제 조건은 마음이 비워져야 한다는 것!! 이것을 가슴에 새기고 나 역시 그리 살도록 늘 노력해야겠다고 다짐하는 순간이다. 순전한 마음으로 타자에게 나아갈 수 있기를~

글을 마무리 하려고 보니 얘기가 어쩌다 흐르고 흘러 결국 나라는 실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불교의 무아(無我)사상에까지 오고야 말았다. 암튼… 여기서 또 고개를 드는 엉뚱한 생각 하나…^^ 연기론에 따르면 우주의 삼라만상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의존적으로 존재한다. 우주의 모든 물질은 그물처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작금의 네트워크의 무한 확장으로 인한 초연결시대는 필연적 결과인 건가?? 그건 모르겠고. 확실한 건 우리 모두는 연결되어 있다는 것, 그러니 더불어 다 함께 잘 살 수 있는 그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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