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일차_자승자박自繩自縛

거의 밤을 꼬박 새우고 새벽에서야 잠들었다. 요즘 내 생활이 너무 불규칙하다고 느끼며 이부자리를 빠져나오다 반성했다. 커피 물을 올리고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다. 이렇게 멍해질 때면 내 머릿속엔 분명 이런 생각이 머무는 순간이다.

‘나 이렇게 살아도 되나? 오늘도 이렇게 또 하루가 시작되는구나. 시간 참…’

문득문득 나 혼잣말을 하게 만드는 이런 생각들… 하루하루 그런 생각들이 쌓이고 쌓여 지금, 이 한 해의 끝까지 온 거다. 오늘도 그런 날의 연장일 뿐인가? 그러니 별 신경 쓰지 말고 또 그렇게 오늘을 살면 되는 것일까. 커피를 내려서 책상 앞으로 돌아와 앉았다. 맥(Mac)을 켜고 이제 조금씩 나의 루틴으로 자리 잡고 있는 이곳, 지오블루를 먼저 찾았다. 오늘은 뭘 쓴다?

요즘은 내 주변의 지인들이 미리 관심 있는 사자성어를 넌지시 던지며 물어온다. 이 성어도 썼느냐고. 어떤 땐 자신이 궁금한 성어도 넣어달라고 요청하기도 하고. 어제 친구랑 밥 먹다가 요즘 바빠 죽겠다는 내 말 끝에 친구가 ‘자업자득!’ 이런다(오호, 사자성어의 생활화?) 그리곤 질문이 이어졌다. 이 성어랑 비슷한 표현 또 뭐가 있냐고. 음… 자승자박(自繩自縛)? 어제 친구에게 말로 해준 설명을 오늘은 글로 해봐야겠다. 그래 이 표현을 오늘의 성어로!!

이 성어도 나름 우리가 자주 접하는 성어임에 틀림없다. 무슨 의미냐고? 스스로 제 몸을 묶는다는 뜻이다. 즉 자기가 한 말과 행동으로 인해 자신이 어려움을 겪게 된다는 얘기다. 그럼 이 표현의 정확한 의미 속으로 한 번 들어가보자. 한자구성은 요렇다.

스스로 자(自), 줄 승(繩), 스스로 자(自), 묶을 박(縛)

‘자승(自繩)’에서 ‘승(繩)’은 ‘새끼줄, 혹은 노끈’이다. 그러니 ‘자승(自繩)’이라는 말엔 ‘자신이 새끼를 꼬아 만든’의 의미가 함축되어 있는 거다. ‘자박(自縛)’은 ‘스스로 묶는다’는 뜻이겠고. 그러니 전체적으로는 ‘자신이 만든 줄로 제 몸을 묶는다’는 의미가 되겠다. 자신의 언행 또는 자신의 생각 속에 자기 스스로를 옭아매는 상황을 비유하는 말이다. 불교에서는 제 마음으로 번뇌를 일으켜 괴로워함을 이른다. 

이 성어와 관련된 고사를 찾아 중국어 원전을 찾아봤으나 ‘자승자박(自繩自縛)’ 이 전체 표현으로는 없더라(계속 찾아보는 걸로!). ‘자박(自縛)’이라는 형태로는 몰라도. 중국 후한(後漢)의 역사가이자 문학가였던 반고(班固)가 쓴 <한서(漢書)>의 ‘유협전(遊俠傳)’에 ‘자박(自縛)’은 있었나니. 

‘유협전(遊俠傳)’에서는 ‘육단(肉袒)’이라는 단어와 ‘자박(自縛)’이 나란히 나오면서 ‘사죄하다’의 의미로 쓰였더라. ‘육단(肉袒)’이라 함은 ‘웃통을 벗어 속살을 드러낸다’는 뜻으로, 상대방에게 사죄나 복종의 의미를 담은 행위를 이른다. 원전의 고사를 살펴보니, 어떤 노비가 잘못을 저지르자, 그의 주인된 자로 하여금 부덕함을 반성하고 사죄하게 한다는 의미로 ‘육단자박’이 쓰인 거다. 여기서 유래된 ‘자박(自縛)’에 ‘자승(自繩)’이라는 말이 덧붙어서 자신의 말과 행동에 구속되어 외려 어려움을 겪는다는 의미로 확장된 것이리라. 

자승자박(自繩自縛)은 그러니까 저기 인트로에서 나왔듯이 자기가 저지른 업이 자기 자신에게 돌아감을 뜻하는 자업자득(自業自得)과 같은 의미라 하겠다. 그 범위를 좀 더 확장해보면 ‘인과응보(因果應報)’와도 연결될 수 있지 않을까? 전생에 지은 선악의 인연에 따라 훗날 길흉화복의 되갚음이 있다는 관점에서는 말이다. 이렇게 해석하고 보니 좀 무섭긴 하다. 평소 죄 짓지 말고 잘 살아야 한다는 새삼스런 다짐을 부르는 사자성어가 아닌가.

문득 새벽까지 봤던 영화 <디 아워스(The Hours)> 생각이 났다. 영국 작가 버지니아 울프의 비극적 인생을 축으로 해서 자신의 삶을 살고 싶었던 세 여인의 하루를 시대 교차적으로 그린 수작이었다. 왜 그렇게 멋지게 살다 간 주체적인 여성들의 삶은 그토록 고단했을까. 호사가들은 또 스스로 번뇌를 일으켜 괴로워한다며 이들의 삶에도 자업자득이란 말로 뭐라 할 수도 있겠지만… 

난 진심으로 궁금해지곤 한다. 버지니아 울프, 프랑수아즈 사강, 조르주 상드… 왜 그녀들에겐 평범하고 행복한 삶이 허락되지 않았을까. 그들이 갈구했던 인간의 정신적 깊이는 고통과 슬픔 속이 아니면 정말 구현될 수 없었던 걸까? 절대적 슬픔 안에서만 자신의 가치를 드러내는 것이 삶이라면… 정말로 행복을 외치는 와중에서도 슬픔이라는 감정은 피해 갈 수 없는 것이, 그게 인생이라면… 참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