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일차_구밀복검口蜜腹劍 

침대 위에 세상 편하게 자리 잡고 권여선 작가의 소설집 <각각의 계절>을 읽는다. 짧은 단편들을 모아놓은 거라 가볍게 읽기 좋더라. 첫 단편부터 작가의 필력에 빨려든다. 일상에서 우리가 늘 느끼는 건데 언어로는 형상화되기 어려울 것만 같던 그 미묘한 영역들이 너무 세심하고 핍진하게 묘사되고 있지 않은가. 와… 시간과 기억이 뒤엉키면서 차곡차곡 쌓여가는 작가의 내러티브, 잔잔함 이면의 깊숙한 곳으로부터 차오르는 격렬함이 묘한 카타르시스를 안기는 그런…

그렇게 편안하게 잘 읽히는 각각의 서사에 나름의 이유로 빠져들고 있을 즈음, 내 눈에 훅 들어온 ‘구밀복검’. 한자 병기도 없이 툭 튀어나온 얘는 뭐지? 그냥 무심코 지나치던 내 시선이 갑자기 방금 읽은 문장 앞머리로 다시 백(back)한다. 그리고 그 사자성어에 한참을 머무른다. 이게 이 정도로 익숙한 성어였다고? 마음속으로 ‘오호 이것 봐라’하며 가던 길 다시 가는데, 이거 웬걸~ 백할 필요가 사실은 없었다. 그 뒤로도 이 성어는 몇 번이나 더 내 앞에 버젓이 등장했으니. 어디 그뿐이랴 아주 대놓고 사자성어 풍년이었고 축제였다. 이 알 수 없는 쾌감이라니… 햐~ 이 느낌 뭐지? 하하. 

소설 속에서 엄마와 아들이 전화통화 하는 장면에서 둘이 마치 성어 배틀 하듯이 무더기로 쏟아지던 사자성어에 혼자 미소 짓던 이 뿌듯함! 이 단순한 이유로 또 오늘의 성어는 구밀복검(口蜜腹劍)이다. 이 사자성어는 ‘입에는 꿀을 바르고 뱃속에는 칼을 품고 있다’는 말이다. 한자의 뜻을 보며 이 성어로 무얼 전달하고 싶은지를 상상해보라.

입 구(口), 꿀 밀(蜜), 배 복(腹), 칼 검(劍)

한자도 꽤 어렵네? 찬찬히 한 번 볼까? ‘구밀(口蜜)’은 ‘입에는 꿀’이란 뜻이네. ‘복검(腹劍)’은 ‘뱃속엔 칼’이고. 그러니 해석하자면 ‘겉으로는 꿀처럼 달콤한 말을 하지만, 내심으로는 음해할 무서운 생각을 품고 있음’이라. 겉과 속이 완전히 다른 경우를 가리켜 이르는 말인 거다.

이 성어는 <십팔사략(十八史略 )>에 나오는 고사에서 유래했단다. 바로 중국의 남송(南宋) 말에서 원(元)나라 초에 걸쳐 활약했던 증선지(曾先之)가 편찬한 중국의 역사서 말이다. 

중국 당(唐)나라 제9대 황제였던 현종(玄宗)은 안으로는 민생안정을 꾀하고 밖으로는 국경의 방비를 튼튼히 함으로써 수십 년 간 태평천하를 구가하였다. 노년에 양귀비에게 빠지는 일만 없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아, 빠진 게 도교(道敎)도 있구나. 아무튼 집권 말기에 가서는 거의 정사를 포기하다시피 하지 않던가. 바로 이 당 현종에게는 이임보(李林甫)라는 재상이 있었단다. 아첨을 일삼고 유능한 관리들을 배척하여 당(唐)을 쇠퇴의 길로 이끈 바로 그 인물. 

이임보의 사람됨을 기록해 놓은 글을 보면 대충 이렇다. ‘임보는 현명한 사람을 미워하고 능력 있는 사람을 질투하여 자기보다 나은 사람을 배척하는, 성격이 음험한 사람’이었다. 바로 저 문장 끝에 이런 말이 이어진다. ‘사람들이 그를 보고 입에는 꿀이 있고 배에는 칼이 있다고 말했다’라고. 바로 ‘구밀복검(口蜜腹劍)’이라는 성어가 여기서 나온 거다. 

그는 그러니까 환관(宦官)에게 뇌물을 바친 인연으로 왕비에 들러붙어 현종의 환심을 샀던 간신의 전형적인 인물이었던 거네. 그런 졸렬한 방법으로 출세하여 재상까지 오른 사람이니. ‘구밀복검(口蜜腹劍)’이라는 말을 낳은 불명예를 안아도 싸겠다. 19년 동안이나 그런 사람을 곁에 둔 현종도 참… 이임보가 죽고 나서야 그의 악행을 알게 된 현종, 분기탱천하여 생전 관직을 모두 박탈하고 부관참시(剖棺斬屍)의 극형에 처했다 하니 뒷북이 아니고 뭐란 말이냐.

이렇게 또 재미난 소설 속에 깜짝 등장해준 인연 덕분에 ‘구밀복검(口蜜腹劍)’이라는 표현을 새롭게 배웠으니 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어떤 경우라도 겉과 속이 다른 그런 구밀복검의 음흉한 사람이 되어선 안 되겠다고 다짐하는 자성의 시간이기도 하고. 한 해가 며칠 남지 않은 햇빛 따스했던 오후에 내게로 와준 구밀복검이 남다르게 느껴지는 이유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