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_귀족 도덕과 노예 도덕

니체와의 토리노 데이트 9

노예들의 창조적 행동? 지배자들의 문화에 대항하여 ‘No’를 말하는 것으로써 자신들의 가치 창조?

“여러 가지 언어로 표현된 ‘좋음’이라는 명칭이 어원학적인 관점에서 본래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는 물음이 나에게 올바른 길을 제시해 주었다. …… 즉 어느 언어에서나 신분을 나타내는 의미에서의 ‘고귀한’, ‘귀족적인’이 기본 개념이며, 여기서 필연적으로 ‘정신적으로 고귀한’, ‘정신적으로 고귀한 기질의’, ‘정신적으로 특권을 지닌’이라는 의미를 지닌 ‘좋음’이 발전해 나오는 것이다: 언제나 저 다른 또 하나의 발전이 있는데, 이는 ‘비속한’, ‘천민의’, ‘저급한’이라는 개념을 결국 ‘나쁨’이라는 개념으로 이행하도록 만든다.” (도덕의 계보학 제1 논문 4)


니오: 바로 이 단순한 ‘좋음과 나쁨’에서 나온 ‘선과 악’이라는 언어 안에는 ‘영적인 의미’가 담겨 있소. 원래는 없던 ‘형이상학적 의미’가 생겼다는 거요. 귀족들로부터 ‘나쁘다’는 소리를 듣던 노예들이 ‘악’이라는 단어를 만들었다고 보면 쉬워요. 그들의 입장에서 귀족들은 ‘악’ 한 겁니다. 귀족들, 즉 자신의 주인을 ‘악’으로 규정한 것이죠. 언어적 전도가 일어난 겁니다. 

지오: 니오는 문헌학 전공자답게 족보를 따지듯 도덕적 관념의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는 부분이 참 인상적입니다. 근데 니오의 글쓰기가 문헌학자들이 쓰는 글의 형식과 달랐으니 그들은 니오를 인정하려 하지 않았던 거죠. 니오의 초기 작품 <비극의 탄생>에 대한 세상의 냉소적 시선과 쏟아지던 비난은 니오에겐 큰 상처로 남았을 것 같아요. 그럼에도 철학함에 있어서 모든 것을 근본부터 그 기원을 바라보게 된 데는 니오의 전공이 한몫한 것은 분명하죠. 

루터교 목사의 아들로 태어난 니체는 어려서부터 ‘꼬마 목사’라고 불렸다. 그랬던 그가 종교에 대한 신념을 상실하고, 대학사회에서도 서서히 염증을 느끼던 시절에 그 시대 유명한 작곡가 리하르트 바그너와의 만남은 너무도 유명하다. 쇼펜하우어 철학이라는 공통 관심사로 인해 바그너에게 매료된 니체는 바그너와의 첫 만남을 이렇게 묘사한 바 있다. 

“바그너가 쇼펜하우어를 ‘음악의 정수를 이해한 유일한 철학자’라고 말하는 것을 듣고 형언할 수 없는 따뜻함과 기쁨을 느꼈다.” 

의지의 철학자라고 불리는 쇼펜하우어가 기독교의 내세 사상을 넘어선 ‘우주적 생존 의지’의 표현이 바로 음악이라고 한 말에 바그너는 깊은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바그너는 쇼펜하우어의 대표적 철학서인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노상 곁에 두었다고 하니 쇼펜하우어를 무척 좋아했던 젊은 니체에게 그런 바그너는 너무도 매력적이었을 게다. 이 세 사람의 연결고리는 결국 ‘음악’으로 귀결된다. 음악을 철학적 체계의 최상에 올려놓았던 쇼펜하우어를 바그너가 좋아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그리고 니체는 기악곡, 성악곡, 교향곡에 이르기까지 70여 곡을 작곡할 정도로 음악을 사랑했던 ‘피아노를 치는 남자’가 아니었던가. 생각이 여기까지 흘러왔을 때 지오는 자신의 피아노 치는 남자에 대한 로망을 들킨 것 같아 홀로 움찔했다.

그렇다고 <비극의 탄생>이 트리거가 되어 표표히 흘러가던 생각을 여기서 멈출 그녀가 아니다. 지오는 어느새 바그너와 니체의 그 질긴 애증의 관계를 떠올렸다. 오페라 역사상 가장 위대한 걸작 가운데 하나라는 평가를 받는 바그너의 곡 ‘니벨룽의 반지’ 중 ‘신들의 황혼’은 바그너가 니체에게 바치는 음악이었다. 이 음악에 맞춰 그리스 비극을 해석한 니체의 책이 바로 <비극의 탄생>이다. 

재밌는 건, 후에 니체가 바그너에게 크게 실망하고 완전히 등을 돌리고 나서 자신의 후기 저작의 제목을 지을 때 바그너를 비웃으며 ‘우상의 황혼’이라고 지었다는 거다. ‘어떻게 망치를 들고 철학하는지’라는 부제가 달린 바로 그 책(그래서 니체는 ‘망치를 든 철학자’가 되었다). 바그너에 대한 적의를 숨기지 않는 니체의 솔직함에 그녀의 얼굴엔 다시 한번 잔잔한 미소가 번졌다. 그리고 곧바로 지오의 머릿속에는 니체가 <비극의 탄생>을 쓰고 흥분해마지 않던 모습이 눈앞에 펼쳐지는 듯했다. 바그너 음악이 유럽에서 차지하는 의의를 혁명적으로 전달한 책이라고 했던 후대의 어느 학자의 말이 무색하게도 그 당시 이 책에 대한 평가는 참으로 처참했다. 

문헌학자로서의 명예가 많이 실추되었던 그 시절, 니체가 교수로 있던 스위스 바젤대학에서 적응하지 못하던 자신을 발견했을 때의 그 쓸쓸함이 지오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졌다. 그즈음 건강 악화까지 겹쳐 결국 니체는 상처만을 안은 채 바젤을 떠나게 되지 않았던가. 니체는 자신이 문헌학보다는 철학이 맞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았으리라. 과연 그때 그는 기존 가치에 지적으로 도전하는 것이야말로 자신의 길임을 알았을까?

니오: 뭐 틀린 말은 아니오. 도덕의 본질을 귀족 도덕과 노예 도덕이라는 관점에서 보게 만들었으니 말이오. 귀족 도덕은 결국 주인의 도덕이라 이해하면 쉬워요. 주인의 특징은 어떻소? 대체로 자신감 넘치고 자기 결정적이고 자기 긍정적이죠. 또 강하고 화려함도 갖추고 있어요. 주인들은 또 자연스럽게 그런 모습이 되고자 하겠죠? 그게 좋은 것이니까요. 그런데 노예는 어떤가요? 자신감도 없고 남의 눈치나 보고 의존적이며 자기부정적이잖아요. 게다가 약하고 지저분하기까지 하고. 그것은 주인이 보기에 나쁜 거겠죠. 

지오: 내가 주인이라도 노예들이 갖는 저런 특성은 좋아하지 않을 것 같긴 해요. 음.. 가만있자. 근데 주인의 이런 모습이 노예들의 입장에선 오히려 더 나쁜 것으로 간주된다고 한 것 같은데… 주인의 화려함은 사치스러운 것이고 자신감이 넘치는 모습은 이제 건방진 것이 되며 자기 결정적인 태도는 독단적인 것이 되고 자기 긍정적인 모습은 허세로 해석된다고 했던 것 같아요. 좀 찌질하긴 하지만 노예의 입장에서 보면 그럴 수도 있겠다 싶어요. 우리 인간이 참 그렇더라고요. 씁쓸하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는 이것도 결국 관점의 차이와 또 연결될 수 있겠네요.

니오: 그렇지요. 그럼 주인의 모습을 이렇게 해석하는 노예가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어떻게 평가하는지 궁금하지 않나요?

지오: 당근 궁금하지요.

니오: 노예는 자신에 대해 이렇게 생각합니다. ‘나는 약한 것이 아니라 선량한 것이고 지저분한 게 아니라 검소한 것이며 의존적인 것이 아니라 타인의 생각을 존중하는 거야. 그리고 내가 부정적이라고? 그건 자기 성찰이야. 나는 자신감이 없는 게 아니라 배려심이 있는 거지.’ 이렇게 말이죠. 상대방을 하나의 ‘적’인 ‘악’으로 규정하고 자신이 ‘선’이 되는 이런 식의 도덕이 바로 노예 도덕입니다.

지오: 입장이 바뀌니 똑같은 현상이 완전히 다르게 읽힌다는 거죠? 그러고 보니 <도덕의 계보학>에서 읽고 내가 특히 충격받았던 부분과 오버랩되네요. 

“고귀한 인간은 자신의 적에게 과연 얼마나 큰 경외심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그리고 그러한 경외심은 이미 사랑에 이르는 다리이다……그는 자신을 두드러지게 하기 위해 스스로 자신의 적을 요구한다. 그는 경멸할 것이 전혀 없고 대단히 존경할 만한 적이 아니면 참을 수 없다! 이에 반해 원한을 지닌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적’을 상상해 보자. 바로 여기에 그의 행위와 그의 창조가 있다 : 그런 인간은 ‘나쁜 적’을, 즉 ‘악한 사람’을 생각해내고, 사실 그것을 근본 개념으로 거기에서 그것의 잔상(残像) 또는 대립물로 다시 한번 ‘선한 인간’을 생각해낸다-그것이 자기 자신인 것이다!……(도덕의 계보학 제1 논문 10 )”

지오: 아… 이제 확실히 알겠어요. 니오가 도덕에서의 노예 반란은 ‘원한’ 자체가 창조적이 되고 가치를 낳게 될 때 시작된다고 했던 바로 그 말이군요. 이 원한은 실제적인 반응, 행위에 의한 반응을 포기하고 오로지 상상의 복수를 통해서만 스스로 해가 없는 존재라고 여기는 사람들의 원한이라고 했던 바로 그…. 맞아. 피지배자는 지배자에 대한 원한이 있기 마련이고, 그럼에도 그들로서는 물리적 복수는 불가능하니까. 힘으로는 싸울 수 없으니 정신적 복수가 가능한 심리학적 기제가 발달한 거네.

니오: 그래요. 이제 그 얘길 해봅시다. 다시 노예의 입장이 한 번 되어볼까요? 노예가 갖는 감정 중에서 눈여겨볼 게 바로 방금 지오가 언급한 주인에 대한 ‘원한’ 감정이에요. 원한, 즉 ‘르상티망’이라고 하는 이 감정이 뭐냐? 그건 바로 약자들이 강자들에 대해 갖는 감정, 즉 나약한 자들이 현실에서 자신의 억울한 처지, 그로 인해 느끼는 불행을 잊기 위해 만들어낸 하나의 거짓말 같은 논리라는 거요. 

지오: 음… 여기서 무의식이 작동하는 건가? 프로이트가 ‘무의식’을 이론화하기 전에 이미 니오가 그 개념을 얘기한 거나 마찬가지네. 와~ 소름… 그 단어를 니오는 모를 테니 일단 패~스!! 암튼 지금 니오의 표현대로 하자면 ‘정신적 만족을 위한 자기기만’? 그럼 아큐(阿Q)의 정신승리법 같은 건가? 중국의 루쉰이라는 작가가 한 말, 그런 게 있어요. ㅎㅎ 니오가 형식주의에 빠져있다면서 중국의 유학을 비판한 적도 있잖아요. 바로 그 중국요. 그건 그렇고… 그니까 우리가 진리라고 믿는 그 도덕이라는 게 결국 그동안 철학자들이 말한 것처럼 ‘이성’으로부터 나온 게 아니라 바로 이런 원한 감정으로부터 나온 거라는 말이죠?

그렇다. 정신승리법! 지오는 개연성은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작가 루쉰이 ‘중국의 니체’라고 불릴 정도로 니체를 좋아했으니 충분히 그의 사상에서 영향받았을 테고 그러니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겠다. 이런 얘기를 나누다 보니 지오에게는 ‘니체는 이미 심리학자’였다는 믿음이 더욱 확고해졌다. 니체라는 19세기 철학자가 오늘날 심리학자들이 말하는 인간의 무의식과 창조성의 본질을 앞서 간파했으며 <도덕의 계보학>이 바로 그것을 탐구한 책이라는 생각에 지오는 새삼 다시 한번 전율을 느꼈다. 심리학의 3대 거장인 프로이트, 융, 아들러도 결국 쇼펜하우어와 니체의 철학에 큰 영향을 받았다고 하지 않았던가.

니오: 내가 말했잖소. 고귀함과 거리의 파토스, 좀 더 높은 지배 종족이 좀 더 하위의 종족, 즉 하층민에게 가지고 있는 지속적이고 지배적인 전체 감정과 근본 감정-이것이야말로 ‘좋음’과 ‘나쁨’이라는 대립의 기원이라고. 그럼 거기서 어떻게 선악이 나왔느냐? 그건 바로 그 ‘좋음’과 ‘나쁨’의 대립, 다른 말로 ‘귀족’과 ‘노예’의 대립 속에서 약자의 위치에 있던 노예들이 주인에 대해 원한 감정을 갖게 되면서 만들어낸 ‘나는 선한 자이고 주인은 악한 자’라는 프레임에서 나온 것이지.  

지오: 그러면 인간은 왜 애초에 그런 노예 도덕을 가지게 된 걸까요?

니오: 기독교 때문이지.더 거슬러 올라가면 그 위에는 플라톤이 있겠고. ‘마음이 가난한 자에게는 복이 있으니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요’ 이 말 안 들어봤나? 

2 thoughts on “9화_귀족 도덕과 노예 도덕”

  1. 니오 브라보!!! 니오의 노예적 도덕이 기독교에서 계속 꼭 예수가 말한것처럼 포장되어서 대중에게 심겨지는거아닌가합니다. 그러면서 귀족같은 생활을 하는 성직자들은 귀족의 도덕을 가지고있고요.. 참 쓰레기같은 현상들이죠.. 창조적인관념과 생각을 도덕적인것으로 싸잡아서 묶어놓은것 같아요. 요즘 말로는희생자마인드.. 니오, 어떻게 하면 대중은 노예도덕에서 벗어날수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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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귀족 도덕과 노예도덕.. 이 부분은 <도덕의 계보학>을 읽으면서 충격을 받았던 ㅎㅎ
      나름 도덕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살았던 나의 삶을 돌아보게 만들었다는 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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