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_거리의 파토스(Pathos der Distanz)

니체와의 토리노 데이트 8

나는 유독 의심이 많은 사람이라 도덕을, 말하자면 지금까지 지상에서 도덕으로 칭송받은 것을 죄다 미심쩍게 생각한다. 환경이나 나이, 선례며 출신과 모순되게 일찍부터 저절로 끊임없이 의심이 생겨서 나는 그것을 나의 ‘선천성’이라고 부를 권리마저 있을 것 같다. 의혹뿐만 아니라 호기심 때문에 나는 본래 선과 악의 기원이 무엇인가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도덕의 계보학》서문 3)

지오: 아무리 그렇다 해도 어떻게 그 당시 누구나 자명한 보편 법칙으로 믿고 있던 도덕까지 의심할 수 있을까? 그런 니오가 놀랍기도 하지만 진심 부러워요. 나는 어쩌면 의심할 줄 몰라서 늘 현명한 판단을 못하고 살았던 게 아닌가 싶어요. 사람들은 내가 정말 사람 볼 줄 모른대요. 사람을 너무 잘 믿는다나. 그러니 나랑 달라도 너무 다른 니오가 내게는 외계인 같이 느껴져요.

니오: 지오가 어떤 것을 옳다고 느끼는 이유는, 어린 시절부터 지오에게 옳다고 규정된 것에 대해 지오가 한 번도 깊이 성찰해보지 않고 맹목적으로 받아들이는 데 있을지도 모르죠. 아니면 지오가 의무라고 부르는 것이 지오에게 지금까지 빵과 영예를 제공해왔기 때문일지도 모르고. 다시 말해 그것이 지오에게 ‘생존의 –조건’으로 여겨지기 때문에 그것이 지오에게 ‘옳다’고 받아들여진다는 것이지요.

지오: 그럴지도 모르겠군요. 모든 사람이 옳다고 믿는 것들은 나한테서도 역시 자동적으로 아주 자연스럽게 하나의 신념으로 자리 잡았을 테니. 단 한 번도 그것에 대해 의심을 해볼 생각은 못해본 거죠. 특히 의무에 대해선 더더욱 말이죠.

니오: 사람의 도덕적 판단에 대한 확고함은 여전히 개인적인 비열함이나 비인격성의 증거일 수도 있죠. 사람의 도덕적 ‘능력’은 그 사람의 고집에 원천을 두고 있을지도 몰라요. 아니면 새로운 이상을 볼 줄 모르는 그 사람의 무능력에!

지오: 왠지 지금 내가 혼나고 있는 것 같은 이 느낌은 뭐지? ㅎㅎ

니오: 한 마디로 말해, 지오가 보다 섬세하게 사유하고, 더 잘 관찰하고, 더 많이 배웠다면 지오의 ‘의무’와 ‘양심’을 어떤 상황에서도 더 이상 의무와 양심이라고 부르지 않을 겁니다. ‘도대체 매번 도덕적 판단이 어떻게 생겨나는가’에 대한 통찰은 이 비장한 말들을 무의미하게 만들 거요.

지오: 음… 이제 대놓고 저의 깊이 생각하지 않는 무지함을 나무라시는군요.

니오: 또 예를 들어 ‘죄’, ‘영혼의 구제’, ‘구원’ 등과 같은 다른 비장한 말들도…. 음…이제 내게 정언명법 같은 얘기는 꺼내지 말아 주시오. 이 단어는 내 귀를 간지럽게 만들어서 지오의 진지함을 보면서도 웃음을 터뜨리게 되니까.

지오: 속사포가 지나간 줄 알았습니다. 칸트 얘기는… 하지 말라는 거잖아요? 내가 또 잘못했네. 니오가 싫어하는 칸트 얘기는 또 왜 꺼냈을까나…  

니오: 나는 늙은 칸트를 기억해요. 역시 우스꽝스러운 물건인- ‘물 자체’-를 교활하게 얻어낸 벌로 ‘정언명법’에 붙들려, 이를 통해 ‘신’, ‘영혼’, ‘자유’, ‘불멸’을-다시 가슴에 되불러들이는 오류를 범했던 칸트를 말이요. 자신의 판단을 보편적 법칙이라고 느끼는 것은 바로 이기심이야!

지오: 세다. 내가 계속 들어주면 얼마나 많은 독설이 더 쏟아질지… 휴우.. 근데 우리가 이제부터 도덕에 관한 얘기를 나눌 텐데.. 칸트가 안 나올 수는 없지 않을까요? 일단 흥분 가라앉히고 우리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자고요.

니오: 그럽시다. 암튼 내가 의심의 철학자가 된 건 아주 오랜 시간 이 문제의 해답을 찾아 다각도로 시도한 결과요. 나에게 의심이란 칸트가 말한 정언명법과도 같다고나 할까. 나는 신학적 선입견, 즉 칸트의 신학적 부분을 도덕적 선입견에서 제거했지요. 저 새롭고 부도덕한, 적어도 비도덕주의적인 ‘선천성’에서 비롯된 반칸트적이고 수수께끼 같은 정언명법인 나의 의심으로부터 강자가 약자를 지배하는 ‘거리의 파토스(Pathos der Distanz)’가 바로 도덕의 기원이었음을 알게 되었소.

지오: 언젠 정언명법 꺼내지 말라더니? ㅎㅎ 드디어 나왔다. ‘거리의 파토스’ 두둥~~

니오: ‘간격, 사이’라는 뜻의 ‘거리(Distanz)’, 영어로는 ‘distance’. 이 단어에 ‘고통, 열정, 불행’등의 의미를 담고 있는 그리스어 ‘파토스(Pathos)’를 결합한 건데, 우리가 어떤 것을 보고 느끼는 모든 감정을 의미하오.

지오: 인간 감정의 총체라 할 수 있겠네요. 저도 ‘파토스’라는 단어의 어원을 찾아봤어요. ‘느끼다, 겪다, 견디다, 감지하다. 참다’라는 의미의 동사 ‘파스코(paskho)’에서 왔더라고요.

니오: 쉽게 말해서 우리가 어떤 상황에서 보고 느끼는 다양한 형태의 감정을 가리키는 단어라고 이해하면 돼요. 슬픔, 기쁨, 연민, 고통, 광기… 이 모든 게 다 파토스라고 볼 수 있어요. 이 ‘거리의 파토스’라는 표현을 이해하려면 먼저 귀족 도덕과 노예 도덕에 대한 설명으로부터 시작해야 하는데…

지오: 니오가 노예 도덕은 그리스도교의 도덕으로서 삶을 병들게 하고 인간을 약화시키는 도덕이라고 그랬던 것 같아요. 그에 대립되는 도덕이 귀족 도덕이고요. 이제 슬슬 선악의 문제로 들어가나요?

니오: 지금까지 선악에 관하여 행해진 고찰은 조악하기 짝이 없었어요. 그것은 언제나 너무나 위험한 일이었지. 양심, 좋은 평판, 지옥, 경우에 따라서는 경찰마저도 솔직함을 허용하지 않았어요. 모든 권위와 마찬가지로 도덕 앞에서는 따져서도 안 되고 더구나 말해서도 안 되었죠. 여기서는 복종만이 허용되지요. 세계가 생겨난 이래, 자신을 비판의 대상으로 만드는 권위는 지금까지 존재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도덕을 비판한다? 도덕을 문제로 삼고 의문시한다는 것은 비도덕적인 일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지금도 비도덕적인 일이 아닐까?

지오: 근데, 니오는 스스로 비도덕주의자임을 선포했지요.

니오: ‘비도덕주의자’라는 내 말은 근본적으로 두 가지 부정을 내포하고 있어요. 첫째, 나는 이제껏 최고라고 여겨졌던 인간 유형, 즉 선한 인간, 호의적인 인간, 선행하는 인간을 부정한다. 둘째, 나는 도덕 그 자체로서 행사되고 지배적이 되었던 도덕 유형을 부정한다. – 즉 데카당스 도덕,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그리스도교 도덕을.

지오: ‘데카당스’ 도덕이라는 건, 그러니까 신에 대한 신앙을 기초하고 있는 유럽의 도덕 전체가 ‘퇴폐적’이 되었다는 의미네요.

니오: 도덕은 단 한 번의 눈길만으로도 비판적인 의지를 마비시키고, 심지어 자기편이 되도록 유혹할 수 있어요. 도덕은 아주 옛날부터 모든 종류의 사악한 설득 기술에 정통했지. 오늘날에도 도덕에게 도움을 청하지 않는 연설가는 없어요. 무정부주의자들 연설을 들어보라고! 설득을 위해 그들은 얼마나 도덕적으로 말하는지! 심지어 자신들을 ‘선하고 정의로운 사람들’이라고 칭하잖아? 세상에서 연설과 설득이 이루어진 후 도덕은 유혹하는 방면에서는 최고의 대가로 입증되어왔소.

니오 말대로 도덕은 항상 유혹적이다. 그래서 도덕은 ‘철학자들을 유혹하는 키르케’였다고 했나 보다. 키르케는 요즘 우리에게는 인어공주의 원조 격인 세이렌으로 더 익숙하다. 세계적인 커피, 그 유명한 스타벅스의 로고에 있는 여인이 바로 이 세이렌이다. 사이렌으로도 알고 있는 팜므파탈의 원형! 지오는 불현듯(?) 커피가 마시고 싶어졌다.

지오: 그렇네. 도덕이 얼마나 강하고 유혹적인지 확실히 알겠어요. 향기로운 커피 한 잔은 더 강렬한 유혹이지요. ㅎㅎ

니오: 커피?

지오: 하하..아니오. 아니오. 도덕이 매우 유혹적이라고요. ㅎㅎ 정말 맞네요. ‘이건 나한테 이득이니까 이게 옳아’라고 말하고 싶은 경우에도 우리는 항상 도덕적 정당성을 찾잖아요. 그래야 설득이 될 테니까. 그럼, 이제 진짜 질문, 도덕이란 무엇인가요?

니오: 지오, 방금 그 질문은 다시 다른 방식으로 물어져야 해요.

‘도덕’이란 무엇인가? 이렇게 본질을 묻는 서구 형이상학적 방식이 과연 제대로 된 질문일까? 난 그 도덕 자체의 본질이 궁금한 게 아닌데? 그러니 ‘어떤 것이 도덕적이게 하는가?’ 바로 이렇게 ‘도덕을 사로잡고 있는 힘’은 무엇인지, 그 ‘도덕이라는 체계 안에서 무엇이 작동’하는지를 물어야 하는 거요.

지오: 그럼 ‘도덕이 대체 우리에게 무슨 도움이 되지?’라고 물으면 괜찮은 건지…

니오: 좋아. 바로 그런 도발적 질문 아주 좋아. 사실 그동안 여러 철학자들 사이에서는 도덕 개념은 각각의 사회집단이 처한 역사적 조건에 따라 변화한다는 공감대가 있었습니다. 나 역시 같은 생각이고. 근데 나는 또 궁금하더라고. 아까도 잠깐 말했지만 내게 중요한 건 ‘선악이 무엇’인지가 아니고 선악이라는 가치판단을 생각해낸 그 ‘어떤 조건’이었소.

지오: 나도 궁금해졌어요. 선악이 대체 무엇을 위해, 어떤 이익이 되기에 만들어졌을까?

니오: 무엇을 위해? ㅎㅎ 궁금하오? 내가 대답해주겠소. 도덕은 우리의 생존조건이었던 거요.

지오: 생존조건이라… 사실 서구 철학의 2000년 동안 철학자들이 제기해왔던 인류 보편의 질문이 바로 ‘왜 도덕적으로 행해야 하는가’와 ‘도덕적 선과 악의 본질은 무엇인가’였잖아요. 칸트는 우리가 자유롭게 선택하는 의지의 존재이기 때문이라고 대답했고요. 자유롭기 때문에 도덕적 행위를 한다는 거죠.

니오: 철학을 망친 게 도덕이라는 내 생각은 변함이 없어요. 특히, 선악의 이원론을 상정하는 기존의 도덕 담론은 결국 ‘도덕적 절대주의’잖소. 이성적 절대주의와 뭐가 다릅니까? 이 또한 같은 맥락이라고. 절대적 도덕이 있다는 게 말이 됩니까? 도덕도 역시 해석입니다. 해석이란 우리가 생존조건으로서의 도덕을 스스로 만들어내고 그 생존조건을 반영한다는 얘기지요. 우리가 살기 위해서 인간이 만들어낸 게 도덕이란 말입니다.

지오: 그러고 보니 이것도 칸트 비판이네. 절대적 도덕이란 칸트식으로 말하면 보편적 도덕 법칙일 테니. 이 같은 칸트의 정언명법이 형식주의에 빠져 있다는 것도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고.

니오: 선과 악의 근원도 결국은 전통 형이상학적 프레임에서 찾은 거라고 볼 수 있어요. 이 세계를 이원화시켜서 플라톤식으로 말하면 ‘이데아-현상’이고, 기독교적으로 말하면 ‘신의 나라-인간 세계’와 같은 구분이죠. 내가 일관되게 비판하는 건 바로 이러한 이원론적 사고방식이라고요.

지오: 그러면 어서 아까 거리의 파토스 얘기하다가 나온 선악을 이해하기 위한 귀족 도덕과 노예 도덕에 대해서 말해줘요. 원래는 아주 단순한 ‘좋음과 나쁨’이었는데, 거기서 그 어마무시한 ‘선과 악’이 나왔다는 니오의 분석 정말 제대로 알고 싶소이다.

선과 악의 개념은 ‘좋음’과 ‘나쁨’에서 나왔다. 그 어원을 보면, ‘좋음’은 ‘고귀한, 용기 있는’이라는 의미이고, 그 당시 지배계층이었던 그리스의 귀족들은 자신들이 바로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단다. 거기에는 형이상학적 의미 자체가 없다. 그저 단순하게 ‘좋다’는 뜻이다. 그게 다다. 반면에 ‘나쁨’이라는 단어엔 ‘노예적인, 게으른’이라는 어원적 의미를 담고 있다. 당시 귀족들은 노예를 보면서 게으르다고 생각했단다. ‘너희들은 게을러. 그래서 나빠.’ 뭐.. 이런 느낌인 거다. 귀족들이 쓰는 이 말에는 결코 어떠한 악의적 의미도 없었다. 진짜 아주 심플하고 즉흥적인 ‘좋고 나쁨’인 거다. 비하의 의미도 없었다. ‘그냥 난 고귀하니까 좋은 사람이고, 넌 게을러서 나쁜 사람이야.’ 이 정도였다는 얘기다.

2 thoughts on “8화_거리의 파토스(Pathos der Distanz)”

  1. 지오가 소개시켜주는 니오는 너무 저랑 맘이 같은느낌이 듭니다. 도덕적인 것에 40년동안 옥살이를 한 기분이 든 저는 도덕적인 사람이 제일 짜증 납니다. 그렇게하는 그들의 행동과 삶이 얼마나 옆에사람을 피를 말리게하고 옥살이 보다 더 심한 옥살이를 시키는지 겪어보지 못한 사람은모를껍니다. 자신을 도덕적인 행위를 앞에다 세우는 사람은 그만큼 자신의 인간적인것을 바로보지 못하는 비겁함이 아닐까 합니다. 자신의 실수를 인정할수없고 자신의 약함을 도저히 감당할수없으니 자꾸 자신들의 도덕적인 행위로 자신을 내세우는게 아닐까.. 가난한 아이가. 맛잇게 익은 자두를 훔쳤다. 그걸 보고 훔친 아이를 도덕적으로 나쁜짓을 한거니까 혼내는것이 오를까 아니면 먹고싶어하는 그 마음을 보고 자두를 사주고 훔치면 너가 더 아프고 망가지니까 자두를 어떻게 사먹을수있는지 그 방법을 가르쳐주는것이 좋을까.. 참고로 자두를 훔친자는 저였습니다. 지오의 니오는 어떻게 생각하셔요? 자두를 먹고 싶으신적은 있으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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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덕적 인간들의 그러한 무의식을 건드리는 게 니오의 파격이고 훌륭함이 아닐까 싶어요.
      세상의 모든 도덕적 인간들을 향해 ‘위선 떨지마”라고 소리치는 듯한 니오가 연상되지 않으세요? ㅎ
      정말 저 역시도 니오 덕분에 저의 내면을 다시 들여다보며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지요.
      선과 악의 개념에 대해 다시 한 번 사유해보는 그런 시간이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니오입니다. ㅎㅎ 자랑스럽도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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