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_”신은 죽었다!”

니체와의 토리노 데이트 10

지오에게 《도덕의 계보학》은 하나의 훌륭한 문화정신분석학으로 읽힌 책이었다. 그동안 도덕은 인간이면 당연히 지켜야 할 보편적 규칙으로서의 윤리로 받아들여졌다. 그런데 니체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도덕의 개념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단어의 어원을 거슬러 올라가 시대적 문화와의 관계 속에서 그 배후에 숨겨진 도덕의 실체를 파헤친 것이다. 사람을 미치게 하는 건 애매함이 아니라 명확함이라 했다. 뭘 보고 그렇게 확신한단 말인가? 우리가 진정으로 확신할 수 있는 게 이 세계에 존재하기나 할까?

그녀는 문득 인간이 심연이 아닌 표면만을 보기 때문에 서로 사랑할 수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엉뚱한 생각을 하며 창밖의 시린 하늘에 시선을 돌려본다. 우리 눈에 보이는 표면이 다가 아님을 그녀도 안다. 도덕은 비도덕으로부터 나왔고, 모든 아름다운 것은 추함으로부터 나왔으며 모든 진리는 비진리로부터 나왔다는 니체의 말처럼 우리는 도덕의 표면 뒤에 늘 존재하는 심연을 들여다볼 수 있어야 함도 안다. 존재자들이 가진 차이를 지워버리는 무차별적 사유에 대한 비판으로서의 심연을 말이다.

니체의 그 ‘심연’은 결국 인간의 무의식에 대한 통찰이었다. 나중에 걸출한 오스트리아의 정신분석학자인 프로이트가 꽃피우는 바로 그 ‘무의식’ 말이다. 지오는 《도덕의 계보학》이 서구문화 최초의 정신분석학적인 도덕의 해체론이라 생각하니 니체의 선견지명에 다시 한번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도 모르는 새 속삭이듯 그녀의 입 밖으로 미끄러진 한 마디. ‘아시나요? 그대는 진정 시대를 앞서간 철학자였다는 걸.’ 

니오: 방금 뭐라 했소? 지오.

지오: 하하. 그게.. 음..  ‘우리는 왜 애초에 그런 노예 도덕을 가지게 된 걸까요?’라고 했습니다.ㅎㅎ

니오: 기독교 때문이지요. ‘마음이 가난한 자에게는 복이 있으니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요’ 이 말 들어봤지요? 

지오: 그거 성경에 나오는 말씀이잖아요. 그게 왜요? 

니오: 그리스도교의 가치 판단은 바로 이 말에서 드러나지요. 마음이 가난한 자, 불행을 운명처럼 짊어진 자, 십자가를 지고 간다는 말도 있잖소? 이처럼 약한 자는 ‘선한 자’로 간주되었으니 강한 자는 어찌 되었겠소? 아까 말한 것처럼 고귀함, 아름다움을 지니고 행복 등을 누리던 강한 자는 이제 ‘악한 자’가 되지 않았을까? 

지오: 이왕 말이 나왔으니 그럼 어디 한 번 제대로 들어가 볼까요? 

니오: 그럽시다. 지오도 알 거요. 그리스도교는 금욕만을 추구하느라 인간이라면 너무도 자연스러운 본능적 쾌락을 억눌러왔다는 것을. 이렇게 인간의 육체적 쾌락보다 이성을 중시한 건 바로 플라톤이 만들어놓은 그 이데아 때문이라는 것도 말이요. 그는 사람들로 하여금 끊임없이 우리가 발 딛고 있는 이 대지가 아니라 저 하늘의 이상향만을 바라보게 했단 말이오. 난 그러한 그리스도교적인 가치관을 ‘노예 도덕’이라 부르는 거요. 

지오: 처음 우리가 얘기 시작할 때 플라톤의 이데아와 현상을 나누던 그 이원론이라는 사상적 토대 위에서 기독교가 발전했다는 게 이 말이었군요. 음.. 이해가 쏙쏙 돼요. 이제 더 깊이 들어가나요? ㅎㅎ

니오: 늘 핍박을 받아왔던 성직자 민족인 유대인들을 한 번 생각해봅시다. 그들은 자신의 적과 압제자에게 오직 그들의 가치를 철저하게 전도시킴으로써, 즉 정신적인 복수 행위로 명예회복을 할 줄 알았던 거요. 


유대인이야말로 두려움을 일으키는 정연한 논리로 귀족적 가치 등식(좋은=고귀한=강력한=아름다운=행복한=신의 사랑을 받는)을 역전하고자 감행했으며, 가장 깊은 증오(무력감의 증오)의 이빨을 갈며 이를 고집했던 것이다. 즉 “비참한 자만이 오직 착한 자다. 가난한 자, 무력한 자, 비천한 자만이 오직 착한 자다…… 이에 대해 그대, 고귀하고 강력한 자들, 그대들은 영원히 사악한 자, 잔인한 자, 탐욕스러운 자, 무신론자이며 그대들이야말로 또한 영원히 축복받지 못할 자, 저주받을 자가 될 것이다! (《도덕의 계보학》제1 논문)


지오: 유대인들은 서구의 인류 역사에서 지배만 당하던 민족이었으니 정복자(귀족)들의 문화에 대한 가치를 전복시켜 정신적 복수를 했다는 거네요. 즉 정복자들의 문화에 대항하여 ‘No’를 말함으로써 자신들의 가치를 창조한 게 노예 도덕이라는 말씀인 거죠? 바로 ‘원한’ 감정의 토대 위에서 만들어진 가치인 거네요. 늘 외부로 방향을 틀어서 적을 설정하고 약한 자는 ‘나’고 신은 약한 자의 편에 서 있다고 하는… 

니오: 노예들이 기독교 사상을 가지고 반란을 일으킨 거지. 기독교적 가치, 즉 믿음, 사랑, 소망, 용서, 희생 같은 것은 노예들에 의해 선한 것이 되었다는 거요. 하지만 이런 노예의 도덕은 허구이며 왜곡된 도덕이기 때문에 인간은 주인의 도덕을 회복하기 위해 기독교적 가치를 없애야 했소. 그러기 위해서는 ‘신은 죽었다’라는 명제가 필요했던 거고.

지오: 저도 그게 궁금했어요. 왜 거기서 신이 죽어야만 했는지.

니오: ‘신은 죽었다’는 명제를 통해 비판하고자 한 것은 기독교 정신에 뿌리를 두고 있는 이성주의적 믿음 전체인 거요. 여기서 신의 죽음이 상징하는 것은 선과 악의 구분이 사라졌다는 의미이기도 하고. 선악을 구분하는 노예의 도덕이 없어지고 좋음과 나쁨만을 갖는 주인의 도덕이 다시 새로운 가치체계가 되었다는 거요. 다시 말해 서양 전통의 모든 도덕과 가치가 죽었다는 뜻이지.

지오: 음… 그니까 기독교와 이성주의가 연결되는 접점이 바로 플라톤이다?

니오: 그리스 신화에 비유해서 얘기해 볼까요? 인간은 ‘아폴론’으로 상징되는 이성과 ‘디오니소스’로 대변되는 감성 이 두 가지 면을 다 가진 존재요. 기독교는 이 둘을 이분법으로 나누고 무한하고 선한 편에 신을 상정하고 유한하고 나약한 편에 인간을 놓았던 겁니다. 즉 이성과 비이성으로 구분한 것이죠. 이것이 근대로 오면서 오직 정신적인 이성만이 고귀한 것으로 간주되고 육체적이고 감각적인 건 추악하다고 치부되며 억압되었죠. 비이성에 대한 이성의 우월성만을 관철시키고자 한 것이지. 근대의 그 많은 철학자들이 한 게 바로 그런 게 아니겠소?

지오: 이성을 중요시한 덕분에 근대 과학의 태동을 가져온 게 아닌가?

니오: 아폴론적인 관점에서 이성적인 것으로 세상을 설명하면서 인류사회의 발전을 견인한 건 맞소. 하지만 문제는 동시에 인류사회를 건강하지 못한 방향으로 이끌었다는 겁니다. 우린 분명 디오니소스적인 부분도 갖고 있는데 그것을 억압하려고만 한다면 언젠가는 속이 곪아 더 왜곡되고 저열한 형태로 발현되지 않겠소? 19세기 그 이성적이라고 자부하던 유럽 사회가 진정 건강한 시대였는지를 보면 알 것이오.

지오: 아… 단순히 신이 죽었다는 게 아니었군요. 그 말에 이토록 심오한 의미가 들어있을 줄이야. 갑자기 니오가《즐거운 학문》에서 광인의 입을 빌어 ‘우리가 신을 죽였다’고 했던 부분이 떠오르네요.

그때, 니오 역시 그의 저서 《즐거운 학문》에서 광인이 시장에 모여있던 사람들 한가운데로 뛰어들며 ‘신은 죽었다’고 소리치던 장면을 재현하려는 듯 혼자서 중얼대기 시작했다. 마치 자신이 광인인 것처럼.

니오: 신은 죽었다! 신은 죽어버렸다! 우리가 신을 죽인 것이다! 살인자 중의 살인자인 우리는 이제 어디에서 위로를 얻을 것인가? 지금까지 세계에 존재한 가장 성스럽고 강력한 자가 지금 우리의 칼을 맞고 피를 흘리고 있다….

지오: 저도 이 부분이 가장 인상적이에요. 광인이 소리치며 하는 말요. “신이 어디로 갔느냐고? 너희에게 그것을 말해주겠노라! 우리가 신을 죽였다.–너희들과 내가! 우리 모두가 신을 죽인 살인자다! 하지만 어떻게 우리가 이런 일을 저질렀을까? 어떻게 우리가 대양을 마셔 말라버리게 할 수 있었을까? 누가 우리에게 지평선 전체를 지워버릴 수 있는 지우개를 주었을까?” 

니오: 허허.. 이리 통하니 좋소. 여기서 신은 ‘서양의 형이상학’과 그것에 영향을 받은 ‘그리스도교의 신’을 말합니다. 그리고 ‘지평선’은 ‘서양의 형이상학’을 탄생시킨 이분법적 세계관을 의미하지요. 

지오: 와… 서양 형이상학의 출발점인 플라톤이 ‘이데아’와 ‘현상’의 세계를 구분한 걸 지평선으로!! 그러고 보니 플라톤에게 영향받은 서양의 거의 모든 철학과 신학은 세계를 두 개로 나누어서 전자는 ‘존재’로 후자는 ‘비존재’로 사유해왔네요. 

니오: 데카르트, 스피노자, 칸트, 그리고 쇼펜하우어는 모두 형이상학을 탄생시킨 서양의 이분법적인 세계관을 그대로 따르고 있소. 

지오: 플라톤의 이분법적 사고가 그리스도교를 등에 업고 서양의 전체 사고에 파고들었다? 그리스도교야말로 ‘대중을 위한 플라톤주의’로 규정한 게 바로 그 맥락이군요.

니오: 이해하기 어려웠던 플라톤의 철학을 대중을 위해 보다 쉽게 보급했던 것이 그리스도교였던 거지요. 서구 세계를 지배한 건 바로 이 이분법적 사고방식과 그로부터 탄생한 형이상학이오. 그 세계를 둘로 갈라놓는 ‘지평선’을 지워버려야 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지요.

지오: 그광인은 또 “지구를 태양으로부터 풀어놓았을 때 우리는 무슨 짓을 한 것일까? 이제 지구는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 것일까?”라고도 묻잖아요. 여기서 그 태양은 ‘신’을 의미하겠네요. 가만… 오.. 이건 우연의 일치인가요? 아폴론이 ‘태양의 신’이라는 점에서 볼 때는 세상이 나아갈 방향을 정해준다고 믿는 절대적 가치, 즉 이성을 이렇게 연결시켰군요. 아귀가 딱딱 들어맞는 것 같은 이 느낌적 느낌… ㅎㅎ 니오는 바로 그 이분법적인 세계관과 그 안의 절대적 가치를 다 없애고 싶었던 거네요. 그래서 지평선이 지워졌다고 한 거고.

니오: 맞아요.이렇게 서양 전통의 모든 철학과 사상의 중심에는 기독교가 있었소. 신의 죽음은 도덕과 가치뿐만이 아니라 서양의 모든 철학과 사상의 죽음을 의미합니다. 소크라테스로부터 시작된 서양의 철학, 사상, 도덕, 가치가 모두 죽었다는 거지요. 내가 나 지신을 인간이 아니라 ‘다이너마이트’라고 한 이유도 바로 고대부터 근대까지 쌓아 올린 서양 전통의 철학과 도덕은 무너져야 했고 그것을 내가 깨부숴야 했기 때문이요.

기독교의 이러한 이분법적 세계관의 영향으로 사람들은 이곳은 인생의 종착지가 아니니 조금만 참으면 된다는 마음으로 그렇게 하루하루 견디며 살아가게 된다. 언젠가는 저곳으로 갈 수 있으리라는 막연한 희망을 안은 채 말이다. 니체는 그 오랫동안 사람들 머릿속에서 너무 자연스럽게 자라난 믿음을 깨부수고 싶었던 거다. 여기 아닌 저기는 없다고. 우리가 사는 바로 이곳이 우리 인생의 다라고 말하고 싶었던 거다. 그러니 저곳을 동경하며 여기를 그저 버텨야 하는 곳으로 만들지 말고 이 생을 긍정하고 받아들여 자신의 운명을 사랑스럽게 만들라는 것이다. 저곳이란 존재하지 않으니 그 허상에서 벗어나 이곳에서의 실제적 삶을 사랑해야 한다고.

지오: 그럼 지구가 이 태양으로부터 풀려난 상황, 즉 절대적 가치가 사라진 지구는 이제 어떻게 되는 건가요? 인간은 또 어찌해야 하고요? 인간은 어디로 가야 하냔 말이지요. 그렇게 삶의 기준이 되던 가치가 다 무너졌으니 이제 인간은 무엇을 등불로 삼고 살아야 할까요?

니오: 목표가 사라졌으니 이제 ‘왜?’라는 물음에 대한 대답도 결여되겠지요. 그러면 허무 속으로 빠져들지 않을까요? 그래서 허무주의가 ‘최고 가치들의 탈가치화’가 되는 거요. 신을 잃은 인간, 태양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지구의 인간이 느끼는 허무의 감정인 거요.

2 thoughts on “10화_”신은 죽었다!””

  1. 니오지오 브라보!!! 하루하루의 애매함을 명확함으로 노력하면서힘들어했던 나에게 자유를 주셨어요!! 이제 나의 애매함을 그대로 받아들일수있었네요.. 니오를 소개시켜준 지오가 이렇게 감사할수가.. 내 가까이만 있으면 지오 그대를 꽉 안아드리리다!!! 나의 하루가 이렇게 신나고 재미있고 의미있고 활력이 넘쳤을때가 언제였나 싶어요.. 니오지오.. 우리는 어떻게 하면 되지요?

    응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