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_의심하라! 치열하게~

니체와의 토리노 데이트 7

“아무 거리낌 없고, 조소적이며, 난폭하게 – 지혜는 우리에게 이런 것을 원한다. 지혜는 여성이며, 지혜는 언제나 오직 전사(戰士)만을 사랑한다.《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도덕의 계보학》제3 논문)”

니체는 《도덕의 계보학》 서문에서 밝히기를, 《도덕의 계보학》 제3 논문은 저 경구(아포리즘)의 코멘터리라고 했다. 그 두 줄의 문장을 해석하기 위해 한 편의 논문이라는 이 많은 편폭이 필요했다는 얘기다. 그는 자신이 왜 그 짧은 잠언 형식의 글쓰기를 고집했는지를 명쾌하게 답해준다. 그 안에서 건진 ‘읽기의 정석’은 값진 덤이다. 그가 요구하는 끈덕진 읽기의 중요성이 새삼스럽게 지오의 가슴을 뛰게 한다.

지오: 참, 방금까지 우리가 나눈 저 ‘고독한 전사’가 나오는 경구 말인데… 니오는 왜 그렇게 경구를 좋아하나요? 내가 알기로 《도덕의 계보학》만이 유일하게 서술체로 쓴 논문이고 나머지는 다 아포리즘 형식이잖아요.

니오: 그럼 나도 하나 물어볼까요? 지오는 ‘아포리즘’, 뭐 ‘경구’라 해도 좋고 ‘잠언’이라 해도 좋겠지요. 아무튼 이런 형식의 글에서 받는 느낌이 뭐죠?

지오: 일단 짧고 압축된 문장이다. 고정된 맥락이 없다. 그래서 어렵다? 대신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 꼭 무한히 열린 문장(?)이라고나 할까요? 저한테는 뭐 이 정도의 느낌…

니오: 올바르게 새겨 넣으며 쏟아낸 잠언은 읽는다고 해도 ‘해독(解讀)’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제 비로소 그 해석이 시작되어야만 하며, 거기에는 해석의 기술이 필요합니다. 내가 ‘해석’이라 부르는 하나의 모범을 바로《도덕의 계보학》세 번째 논문에서 보였지요. 이 논문의 맨 앞에 하나의 잠언이 있고 논문 자체가 바로 그에 대한 주석이니까요.

지오: 세상에… 경구 하나를 해석하기 위해 한 편의 논문이라니… 니오, 사람들 고생하는 거 보는 게 좋은 건 아니죠? ㅎㅎ 니오의 말처럼 ‘그와 같이 읽는 기술을 연습하기 위해서는, 니오의 저서들을 ‘읽을 수 있게 되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했지요. 정말 오랜 시간이…

니오: 그렇소. 그러기 위해서 사람들은 소가 되다시피 해야 하며…

지오: 되.새.김.질. 반추(反芻)~하라.

니오: 하하.. 내 팬 맞구먼…  

지오: 찐팬이라니깐요.. ㅎㅎ아무튼… 독자들이 ‘반추’를 통해 니오의 전작들을 다 읽었을 거라 생각해서 서문에 그렇게 쓴 겁니까? ‘《도덕의 계보학》이 이해하기 어렵고 귀에 거슬린다 해도 그 책임이 반드시 나에게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아무리 그래도 보통은… 작가들이 서문에 이런 비스무리한 말을 꼭 써야 한다면 다들 ‘…… 모든 게 저의 책임입니다..’라고 쓰던데. 니오는 어쩜 그리… 음.. 더는 말 안 하겠음…

니오: 그냥 읽는 것만으로는 안 돼요. 책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끈덕지게 곱씹으며 그렇게 되새김질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나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관해 말하자면,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때로는 깊이 상처받고 또 때로는 깊이 황홀해본 적이 없는 사람은 누구도 그 책에 통달한 자라고 할 수 없지요. 그러한 경험을 한 후에야 그 작품이 태어난 평온한 경지에, 그 태양빛 같은 밝고, 아득하고, 드넓고, 확실함에 존경심을 갖고 참여하는 특권을 누릴 수 있을 겁니다.

지오: 그렇네요. 책은 그렇게 읽어야 하네요. 그러고 보면 진리를 은유라고 했던 니오의 철학적 사유가 글쓰기에서는 오롯이 아포리즘으로 구현되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 안에서 우리에게 끊임없이 해석의 기술을 요구하고 있구요.

니오: 그것이 어쩌면 나의 철학하는 자세일지도 모르겠군요. 그게 무엇이 되었든 어떤 현상을 해석할 때 하나의 의미로 묶어두지 않는 것, 끊임없이 의심하며 사유하는 것! 《도덕의 계보학》의 ‘계보’가 뭡니까? 우리는 그동안 도덕을 신이 준 절대적인 것으로, 의심할 필요도 없는 ‘자명한 진리’로 받아들여 왔지요. 그런데 난 그 배후에 뭔가 숨겨져 있다는 의심이 계속 드는 겁니다. 그렇게 도덕적 선입견의 출처를 찾아 저 고대 그리스 시대까지 올라간 게  바로 이 ‘계보’ 아닙니까?

지오: 과연 ‘의심의 철학자’ 답습니다.

니오: 누가요? 내가요? 의심의…?

지오: 프랑스의 리쾨르라는 철학자가 그랬어요. ‘니체는 의심의 철학자’라고. 아주 딱입니다. 그 의심은 진정 탁월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특히 제가 언어학 전공자라 그런지 몰라도 니오가 그 도덕의 본질을 해체하기 위해 어원을 해석하는 부분은 정말 인정!!

니오나를 의심의 철학자라고 봤다면 그 리꿀(?)…리란 사람이 제대로 봤구먼. ‘선천성’이라고 부를 만한 권리가 있을 만큼 내게 있어서 의심은 선험적인 것이오. 나의 호기심과 의혹은 선과 악이 본래 어떤 기원을 갖는가 하는 물음 앞에 멈춰 서게끔 했소. 사실 악의 기원에 관한 물음은 이미 열세 살 소년 시절 나를 따라다녔답니다.

지오: 리꿀리 아니고 리.쾨.르요. 폴 리쾨르. 기억하세요. ㅎㅎ 앞으로 니오를 사랑한 프랑스 철학자들 이름이 우수수 쏟아져 나올 테니. 니오는 모르겠지만… 그대가 그토록 원했던 ‘니체의 사상을 알아주는 사람들’이 드디어 나왔다는 거 아닙니까? 그것도 아주 많이~

문득… 지오는 그렇게 천진하게 자신의 애정 어린(?) 핀잔을 다 들어주고 있는 눈앞의 니오가 정말로 자신이 포스트모더니즘의 아버지가 된 것을 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싶었다. 프랑스의 그 수많은 철학자들이 자신을 그토록 사랑하고 선망하며 그 사상에 영향받아 엄청난 걸작들을 만들어냈다는 사실을 정말 알았으면 싶었다.

지오: 참, 그건 그렇고 ‘선험적’이라는 단어가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확실히 니오는 ‘반칸트적’입니다. 독일의 그 유명한 철학자 칸트는 도덕을 하나의 선험적인 보편 법칙으로 보고 신을 요청하고 정언명법을 말했는데, 니오는 그게 아니라 순전히 인간이 만들어낸 거라고 본 거니까.

니오: 다행스럽게도 나는 때로 신학적인 편견을 도덕적인 편견에서 떼어놓을 수 있었고 심리학적 문제 일반에 관한 타고난 감식력을 갖춘 데다가 역사적, 문헌학적으로 수련하고 나니 곧장 이런 질문이 들더이다.

‘인간은 어떤 조건 아래 선과 악이라는 가치 판단을 생각해냈던 것일까? 그리고 그 가치 판단들 자체는 어떤 가치를 가지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이제까지 인간의 성장을 저지했던 것일까 아니면 촉진했던 것일까?’

지오: 니오는 도덕을 칸트가 선험 철학을 위해 만든 ‘도덕 형이상학’이 아닌 ‘인간학’으로 끌어내린 겁니다. 그쵸?

니오: 거기까지 오는 데 차~암 오~래도 걸렸다. ㅎㅎ 우리가 단지 오래도록 침묵을 지킬 줄만 안다면, 오 우리 인식하는 자, 우리는 얼마나 행복한가!……

지오: 지금 니오는 정말 행복해 보이오. 부럽다~ 정말. ㅎㅎ 지금부터라도 의심하는 법을 배워야 할까 봐요. 저는 사람이 멍청해서 의심할 줄을 몰라요. 늘 너무 잘 믿어서 손해만 보는 ㅎㅎ 사람들이 저를 바보라고 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지요.

니오: 의심을 못한다고 다 바보일까… ㅎㅎ 꼭 그렇진 않으니 너무 상심 마오.

지오: 지금 위로해주시는 겁니까? 앞으로 니오 앞에서 몇 번이나 더 나 자신이 바보라는 자각을 하게 될까 벌써 걱정이옵니다. ㅎㅎ

니체는 어쩌면 지오와는 완전히 다른 종의 사람인지도 모른다. 그녀는 살면서 그렇게 치열하게 의심을 해본 적이 없다. 의심을 한다는 건 싸울 수 있는 용기가 전제되어야 한다. 그 싸움의 대상이 꼭 사람이 아니어도 말이다. 지난날을 돌아보니 여럿이서 모여 뭔가를 결정할 때 그녀는 자신의 의견을 관철시켰던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지오: 지금 잠깐 나라는 사람을 생각해봤어요. 저는 늘 다수의 의견을 따르는 편이었던 것 같아요. 있는 듯 없는 듯 그저 조용히 존재감 없는 사람으로 묻어가기를 바랐죠. 굳이 나까지 나서서 선택지 하나를 더 늘릴 마음이 조금도 없었어요. 그러고 보니 이것도 니오가 너무 싫어했던 바로 그 ‘무리 본능(?)’이었네. ㅎㅎ

마치 고백성사라도 하듯 스스로를 돌아보는 자신을 편안한 미소를 띠며 바라봐주고 기다려주는 니오를 보며 지오는 마음이 한없이 따뜻해져 옴을 느꼈다.

지오: 나는 특별히 좋은 것도, 그렇다고 못 견디게 싫은 것도 없었으니까. 그냥 모두가 좋으면 나도 좋았고 다들 반대하면 딱히 내 취향을 고집할 필요도 느끼지 않았어요. 다 좋으면 그게 좋은 거지 했지요. 거기서 나의 감정은 중요치 않았어요. 그게 나였네요. 비록 지금 ‘도덕이라는 거대 담론’을 얘기하다가 뜬금없이 저의 이 사소한 일상을 끌어들여 민망하지만 지금 니오를 보면서 자꾸 제 자신을 들여다보게 되네요. ‘니오는 어쩜 저렇게 자신감이 넘칠까?’ ㅎㅎ 그냥 니오의 당당함이 부러운 걸까요? 저는 그리 못 살았으니…?

니오: 우리 삶에 사소한 것이란 없어요. 우리가 맨날 이렇게 거창한 얘기를 하며 살지는 않으니.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 의심의 태도란 결국 일상적 삶을 살아가는 것과 연결된다는 것이오. 왜 자신의 생각을 당당하게 말하지 못 하오? 뭐 일부러 나처럼 까칠한 사람이 되라는 건 아니요. 하지만 상대방이 하는 말에 무조건 의심 없이 따르는 게 그 당장은 논쟁의 여지가 없으니 편해 보여도 그렇지가 않아요.

그렇다. 그녀는 남 눈치 안 보고 하고 싶은 얘기 다 하며 살아본 적이 없다. 늘 그렇게 살아보고 싶었지만 결국 그녀는 결코 이룰 수 없었던 ‘그 당당한 삶’을 산 사람, 이 의심이 많은, 하지만 표면이 심연인 듯 정직한 사내, 그래서 그녀는 니오가 좋았는지 모른다. 자신과 너무 달라서… 그 모습이 너무 투명해서 그래서 좋았는지도 모른다. 그녀는 분명 책 속에서나마 니체를 통해 대리만족을 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2 thoughts on “7화_의심하라! 치열하게~”

  1. 의심하는것과 그저내 마음과 같지 라고 생각하는것을 다른듯합니다. 의심하는것은 뭔가 저 사람이 진실을 말하지 않고있다라는 의미가 많이 있다라고 생각이 든다면, 내 생각과 같겠지하는 마음은 또한다른 사람들의 생각이 다름에 대한 인식이 적거나 아니면 내가 다른 사람들의 다름을 참은것처럼 그들도 그렇겠지 또는 내가 가지는 의식의 다름에대해서 귀히 여기지않을수도 있고.. 단지 나와 다를수있다는 생각을 하는것은 “의심” 이라고 표현하는건 무리가 있지않을까.. 의심보다는 내 마음을 더 열어놓고 진정 말하는 의미가 무엇인가? 를 알아보고 그것이 나의 생각과조화가 될것인가 아닌가? 어디까지 합의가 될것인가..어느정도의이해관계가 되어야하는가.. .. 생각을 적어봅니다. 지오님..

    응답
    • 의심이라는 말에는 그 모두가 포함되어 있지 않을까 싶어요. 자기의 생각을 끊이없이 의심하면서 내면을 들여다보는 것도 있고,
      진짜 우리가 흔히 말하는 다른 사람의 의도가 있지 않을까 생각하는, 그가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닐까 의심하는 것도 있을 수 있구요.
      니오가 말하는 의심은 좀 더 범위가 큰 것 같아요. 단순히 거짓말의 차원이 아닌 기존의 질서를 포함한 이 세계가 작동하는 모든 방식에 대해 일단 의심해보라는 거니까.
      우리가 그동안 자명하다고 여긴 게 그렇지 않을 수 있다는 걸 인식시키고자 한 게 먼저이지 않을까.
      그러니까 당연히 그 하위 범주의 ‘인간들이 모르고 있거나 숨기고 있는 무의식의 생각들’까지 포함되겠지요.
      좀 큰 개념으로 접근해야 할 것 같아요.

      응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