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으로도 때리지 마라. 제발…”

여느 때처럼 아침 뉴스를 들으며 커피를 내리는데 앵커의 날짜 멘트가 내 맘에 탁 걸렸다. 가만있자. 이 날짜가 왜 이리 각별한 거지? 생각해보니 바로 4년 전 이날 우리 혀기와 미니가 결혼을 했다. 그렇구나. 애들의 결혼기념일이네.

아들에게 전화해서 오늘 뭐 안 하냐고 물었다. “지유랑 집에 있어야죠.” 한다. 그렇지. 애 데리고 집콕 말고 니들이 뭘 할 수 있겠나.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맘이 짠했다. 내가 지유 봐줄 테니 둘이서만 시간 좀 보낼래? 그렇게 해서 16개월 된 지유랑 내가 함께 하루를 보내게 되었다. 

아이들은 아는 걸까? 자신의 절대 우주 엄마 아빠가 사라지면 더 착해져야 한다는 것을. 지유는 연신 방글방글 웃으며 밥도 잘 먹고 잘 논다. 그리곤 책장에 꽂힌 동화책을 들고 와서 내 무릎 위로 오르는 일을 끊임없이 반복한다. 

‘음… 네가 이 할미의 능력을 이미 간파한 게로구나. 내가 이래 봬도 네 아빠 어릴 때 무려 수천 권의 책을 입으로 소리 내서 읽어준 사람이다.’ 어린 혀기와의 동화 읽던 추억을 떠올리니 감개무량해졌다. 그 책 좋아하던 녀석이 자라서 또 이렇게 자기를 꼭 닮은 딸을 낳다니. 세월, 참…

그렇게 저녁 시간 내내 책장과 내 무릎을 오가며 스무 권이 넘는 동화를 읽고 난 지유.. 슬슬 졸린가 보다. 함께 침대에 누웠다. 잠들기 전 지유의 행동은 사랑스러움의 극치였다. 귀여운 원맨쇼를 마친 아기천사는 내게 무한의 행복감을 선물하고는 이내 꿈나라로 여행을 떠났다. 

이튿날 아침, 혀기와 미니가 일찍 돌아왔다. 현관문을 들어서면서 “감사해요, 어머님”을 우렁차게 외치는 며눌님. 어젯밤 혀기랑 16개월 만에 처음으로 단둘이서 보내게 되니 울컥하더란다. 그동안 딸 키우느라 최선을 다한 서로가 너무 대견해서 함께 울었다고. 누가 그랬더라. 자신의 노력에 감동해서 눈물이 날 정도가 되면 진짜 열심히 산거라고.  

그래, 인정! 그 어린 나이에 결혼하고 남편에 아빠까지 돼서 공부하랴 가장 노릇 하랴 얼마나 어깨가 무거웠을까. 혀기를 보니 나도 순간 코끝이 찡했다. 정말 장하다. 내 아들 며느리.

그리고 며칠 후, 방바닥에 배를 깔고 편안하게 뉴스를 검색하다가 우연히 정인이 사건 기사에 시선이 멈췄다. 기사 첫 줄에 눈시울이 뜨거워지더니 절반쯤에서 그만 방바닥에 엎드린 채 얼굴을 묻고 말았다. 며칠 전 지유의 웃던 얼굴과 정인이 웃는 사진이 오버랩되면서 흐느낌은 점점 꺼이꺼이 오열로 변했다. 

지유와 같은 그 어린 나이에 정인이는 그렇게 짧고 슬픈 생을 마감한 것이다. 그 순간, 무능한 어른인 게 너무 미안했다. 웃는 아이의 얼굴을 보며 그토록 잔인해질 수 있는 인간을 도대체 어떻게 이해해야 한단 말인가.

그날, 하늘의 별이 된 지유 친구 정인이에게 눈물로 편지를 썼다. 다음 세상이 있다면 꼭 내 딸로 태어나달라고. 이 생에 누리지 못한 행복 다음 생에서 나와 함께 만들어가자고. 진심으로 정인이를 꼬~옥 안아줄 수 있는 엄마가 되어주고 싶었다.  따뜻한 우주이고 싶었다. 

지유야, 정인아, 

사랑한다, 사랑한다, 사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