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와의 토리노 데이트 13
그대 바보여, 작별의 말로 그대에게 다음의 가르침을 전한다. 더 이상 사랑할 수 없는 곳은 스쳐 지나가야 한다.(『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스쳐 지나감에 대하여』)
“인간의 위대함은 그가 다리일 뿐 목적이 아니라는 데 있다. 인간이 사랑스러울 수 있는 것은 그가 건너가는 존재이며 몰락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나는 사랑한다. 몰락하는 자로서 살뿐 그 밖의 삶은 모르는 자를. 왜냐하면 그는 건너가는 자이기 때문이다. 나는 사랑한다. 마음껏 경멸하는 자를. 왜냐하면 그는 마음껏 숭배하는 자이며, 저편 물가를 향해 날아가는 동경의 화살이기 때문이다.”(『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차라투스트라의 머리말』)
위험한 책,『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부제는「모든 이를 위한, 그러나 그 누구의 것도 아닌 책」이다. 니체도 이 책의 운명을 감지했던 걸까? 그는 백 년을 기다리면 인간을 탁월하게 이해하는 천재가 나타나 자신을 무덤에서 발굴할 것이라고 했다. 이런 작품은 아주 수준 높은 것이어서 이해되기에는 시간이 필요하며 수세기가 필요하다고.
철학자 알프레드 보임러는 니체를 이해하는 사람은 [차라투스트라]를 이해할 수 있지만 [차라투스트라] 하나만으로는 니체를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지오는 그의 말에 전적으로 동감한다. 내용이 반시대적이다 보니 사람들은 위험한 책이라고들 한다. 또 선지자의 예언 같은 아포리즘, 당췌 알 수 없는 비유와 상징, 그리고 패러디로 가득 찬 아주 불친절한 책이 바로『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이다.
출간 당시에는 한 마디도 못 알아먹겠다는 악평과 함께 그토록 냉대받았던 책이 뒤늦게, 그것도 이렇게 오랫동안 사랑받는 이유는 뭘까? 문학의 가면을 쓴 철학서라고 평가받는 이 책이 현대철학과 정신분석학, 그리고 예술계, 특히 음악계에 끼친 영향력은 어마어마하다. 지오는 이 책의 주제를 한 마디로 정리하라면 뭐라 해야 할지 생각해본다. 건강한 사람 만들기 프로젝트? 초인으로 가는 긍정의 철학? 지오는 잠깐이지만 니오와의 대화를 통해 확신이 들었다. 니체가 차라투스트라의 목소리를 빌려 말하고 싶었던 건 ‘건강한 삶이란 자기 자신과 이 세계를 긍정하고 사랑하는 것’이라고. 그리고 그렇게 사는 건강한 사람이 바로 위버맨쉬, 즉 초인이라고.
니체가 생각하는 철학적 사명은 ‘어떻게 하면 인간을 제대로 잘 살게 만들 것인가’였던 게 아닐까? 그는 기존의 이성주의 철학자들이 하는 것처럼 그저 관념적 유희에 그치고 싶지 않았던 거다. 철학자라면 사람들이 건강하고 의미 있게 사는 데 있어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어야 한다고 믿었던 거다. 당시 19세기 유럽 그리스도교의 퇴락으로 불행에 빠진 사람들이 다시 건강하게 살 수 있기를 바랐으리라. 그러니 그리스도교 가치관에 대항할 새로운 존재가 필요했던 것이고, 동양의 조로아스터교 창시자인 차라투스트라가 등장했어야 했다.
“나는 사랑한다. 자유로운 정신과 자유로운 심장을 가진 자를. 그런 자에게 머리는 심장에 있는 내장일 뿐이다. 그러나 그의 심장은 그를 몰락으로 몰아간다. 나는 사랑한다. 인간의 머리 위에 걸쳐 있는 검은 구름으로부터 방울방울 떨어지는 무거운 빗방울 같은 자들을. 그들은 번개가 칠 것임을 알려 주고 예고자로서 파멸한다. 보라, 나는 번개의 예고자이며, 구름에서 떨어지는 무거운 빗방울이다. 이 번개야말로 초인이 아니던가.”(『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차라투스트라의 머리말』)
지오: 왠지 금방이라도 번개가 칠 것만 같네요. ㅎㅎ 인간은 건너가는 자라는 말이 다시 봐도 참 인상 깊습니다. 어떤 끝에 도달한 완성형이 아니라 끊임없이 만들어지는 과정 속에 있는 존재라는 거잖아요. 그러니 성공과 실패도 없는 거구요. 늘 새로워지는 과정인 나만 있을 뿐.
니오: 심연 위에 걸쳐진 밧줄이니 얼마나 위태롭겠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과정에서 매일매일 새로워지는 삶을 긍정하고 살아내야 하는 거요. 그리 살 수 있는 자는 어떤 사람일 것 같소?
지오: 위버맨쉬요. 초인.
니오: 그 위버맨쉬가 되는 과정을 한 번 봅시다. 우선 정신의 세 가지 변화에 대해 말해줄거요. 어떻게 정신이 낙타가 되고 낙타는 사자가 되며 사자는 마침내 아이가 되는가를. 정신이라는 말이 어색하면 인간의 세 가지 유형으로 이해해도 되오.
지오: 낙타, 사자, 아이…
니오: 머릿속에 상상을 해보면서 따라오세요. 차라투스트라가 했던 비유 표현 그대로 말해 볼 테니. 내면에 외경심이 깃들어 있는 강력한 정신, 인내심 많은 정신은 무거운 짐을 잔뜩 지고 있어요. 그 정신의 강인함은 무거운 짐을, 가장 무거운 짐을 요구하고 있지요.
지오: 낙타 유형의 사람이겠네요.
니오: 무엇이 무겁단 말인가? 인내심 많은 정신은 이렇게 물으며 낙타처럼 무릎을 꿇고는 짐을 가득 싣고자 한다. 그대 영웅들이여, 가장 무거운 짐은 무엇인가? 내가 짊어지고 나의 억센 힘에 기쁨을 느낄 가장 무거운 짐은? 인내심 많은 정신은 이렇게 묻는다.
지오: 이 가학적인 느낌은 무엇? ㅠㅠ
니오: 인내심 많은 정신은 이 모든 짐을 짊어지고 그의 사막을 달려간다. 짐을 가득 실은 채 사막을 달리는 낙타처럼.
지오: 낙타는 못 달리는데. 하하. 암튼…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게 우리 어머니들이 사셨던 인고의 삶이네요. 모든 짐 다 홀로 둘러매고 묵묵하게 당신의 길을 걸어가셨던 우리 부모님의 삶은 대부분 다 그랬으니까. 물론 나 역시 예외일 수 없고요.
니오: 그렇소. 우리 대부분은 낙타 유형에 속하지 않을까요? 자, 그럼 이제 고독하기 그지없는 사막에서 두 번째 변화가 일어나죠. 여기에서 정신은 사자가 됩니다. 사자는 무거운 짐을 벗어던지고 자유를 쟁취하려고 하고 사막의 주인이 되려고 하지요. 그러나 주인이 되려면 사막을 지배하는 용과 일전을 벌여야 합니다. 그 용의 이름은 ‘너는 해야 한다’입니다.
지오: 이름이 ‘너는 해야 한다’라고요?
니오: 이것도 은유요. 여기서 용이 상징하는 건 우리를 옥죄는 전통적 가치, 제도, 관습 등의 모든 문화라고 보면 됩니다. 생각해봐요. 만약 묵묵히 ‘너는 해야 한다’는 명령을 짊어졌을 때는 그것과 결투할 필요를 못 느끼겠지요? 그러나 자유로운 정신이 되기 위해서는 이 ‘너는 해야 한다’고 강요하는 용과 대결해야만 하겠죠. 혹시 용이 사자에게 하는 말도 기억하오?
지오: 물론이지요. ‘모든 가치는 이미 창조되었다. 모든 창조된 가치, 그것이 바로 나다. 진실로 말하노니 “나는 원한다”라는 요구는 더 이상 있어서는 안 된다!’
니오: 맞소. 용의 비늘들에는 ‘너는 해야 한다’는 명령이 빛나고 있지. 그렇게 황금빛으로 번쩍이며 정신이 가는 길을 가로막아요. 그럼이제 무엇 때문에 정신에 사자가 필요한지 생각해봅시다. 왜 무거운 짐을 견디는 짐승으로, 체념과 외경심을 갖고 살아가는 짐승으로는 만족하지 못할까요?
지오: 자유정신? 자유를 위해서일까요? 그것은 사자의 힘으로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니까.
니오: 그렇지요. 자유를 쟁취하고 의무 앞에서도 신성하게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기 위해서는 사자가 되어야 합니다. 새로운 가치를 위한 권리를 쟁취하는 것, 이것은 인내심 많고 외경심을 가진 정신에게 주어질 수 있는 가장 놀라운 소득인 거요.
지오: 지금 생각해보면 난 왜 그렇게 ‘너는 해야 한다’에 갇혀서 살았는지 모르겠어요. 한 번쯤은 나도 싫다고 말할 수도 있었으련만… 내가 하지 않으면 정말 큰일 날 것만 같았나 봐요. 인내가 최고의 미덕인 양 그렇게 참고만 살았던 삶이었어요. 참 어리석게도…
니오: 정신도 한때 ‘너는 해야 한다’를 가장 신성한 것으로 사랑했죠. 하지만 이제 정신은 가장 신성한 것에서도 미혹(迷惑)과 자의(恣意)를 찾아내야 해요. 그의 사랑으로부터 자유를 강탈하려면 말이요. 그리고 바로 이러한 강탈을 위해 사자가 되어야 하는 거요.
지오: 미혹과 자의라 함은 뭐 의심과 자유의지, 선택 의지라고 이해하면 될까요?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드네요. 나도 사자처럼 ‘No’를 외칠 수 있는 용기가 있었더라면 내 삶이 조금은 더 나았을까?
니오: 과거는 과거로! 지금부터가 중요하지. 운명애, 아모르 파티를 벌써 잊었군요. 하하.
지오: 과거는 과거다. 하.. 참나 왜 이게 안 될까나. ㅎ이제 정말 ‘지금 여기’만 생각하자. 그런데 궁금한 게 있어요. 사자의 자유정신이면 최고 아닌가요? 왜 또 한 단계가 더 있어야 할까요? 사자로도 충분할 것 같은데…
니오: 사자는 어떤 존재라고 했는지 다시 떠올려보세요.
지오: 자유를 쟁취하고 의무 앞에서도 신성하게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는 존재요.
니오: 그래요. 하지만 사자는 가치를 창조할만한 힘은 가지고 있지 않소. 반항만 하는 정신은 필연적으로 허무에 빠지기 십상이지. 그래서 결론은 뭐냐? 새로운 창조! 그것은 사자도 할 수 없는 영역이라는 겁니다.
아이는 순진무구함이며 망각이고 새로운 출발, 놀이, 스스로 도는 수레바퀴, 최초의 움직임이며 성스러운 긍정이 아닌가. 그렇다. 창조라는 유희를 위해서는, 형제들이여, 성스러운 긍정이 필요하다. 정신은 이제 자신의 의지를 원하고 세계를 상실한 자는 이제 자신의 세계를 되찾는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차라투스트라의 가르침:세 가지 변화에 대하여』)
지오: 아하… 어린아이는 놀 때 금방금방 잊어버리고 만들었다 부수고 또 새로 만들고 하니까. 그렇다면… 이 말은 우리도 그렇게 놀이하듯이 가볍게 살아가야 한다? 낙타의 무거운 짐을 벗어버리고 사자처럼 자기가 원하는 것을 쟁취하기 위해 ‘노’라고 외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해맑게 웃으며 노는 아이의 그런 정신이 필요하다는 걸 얘기하고 싶은 거군요.
니오: 차라투스트라가 ‘그렇다’고 전해달라 하오. 하하. 영원히 반복되는 그런 삶을 사랑하려면 어린아이의 망각을 배울 필요가 있다고. 그렇게 삶이 가벼워지지 않고는 그 영원회귀의 무거움을 견딜 방법이 없을 테니.아까 지오가 그러지 않았소? ‘과거는 과거다’가 왜 안 되는지 모르겠다고. 그건 잊어버리지 못하기 때문이오.
지오: 망각이 정말 중요하다는 건 인정. 과거의 기억들을 차곡차곡 쌓아놓고 있으니 이 생이 무거울 수밖에. 기억이란 참…
니오: ‘내 기억은 “이것을 내가 했다”라고 말한다. 내가 그러한 것을 했을 리 없다고 내 자부심은 말하며 냉정해진다. 결국 기억이 양보한다.’ 내 책『선악의 저편』잠언 68절에 나오는 말이오. 이게 무슨 말이냐? 우리의 기억은 환상을 가졌다는 의미지.
지오: 맞아요. 정신분석학자인 프로이트도 인간의 자아는 기억이라고 했어요. 우리의 기억은 언제나 우리를 기만한대요. 환상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기억은 늘 왜곡되어 있다는 거죠. 우리의 자부심과 자아는 기억을 굴복시킬 수 있다는 거 정말 무섭네요. 니오의 저 기억에 관한 얘기는 정말 정신 분석해주는 의사가 할 법한 말이었어요.
니오: 나는 의사 맞소.
지오: 음.. 니오의 자신감은 정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