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_그게 생이었던가? 자, 다시 한번.

니체와의 토리노 데이트 12

“너희는 아직도 너희가 그 앞에서 무릎을 꿇을 수 있는 그런 세계를 창조하고자 한다” by 차라투스트라 <자기 극복에 대하여>

독일어 ‘위버맨쉬(Übermensch)’ 문자 그대로 ‘인간을 넘어섬’, ‘인간을 극복함 뜻이다그동안 사람들은 ‘위버맨쉬 ‘슈퍼맨으로 번역하기도 했으니 ‘특별한 능력을 가진 강한 라는 오해는 거기서부터 시작되었으리라지오는 생각했다뭐니 뭐니 해도 니체 철학에 대한 가장 무서운 오해는 초극적 삶을 위한 ‘힘에의 의지 ‘권력에의 의지 해석하고   엮은 ‘초인 사상이라고히틀러의 망상을 자극한 바로  자의적 해석 말이다. ‘자기 극복의 존재로서의 초인이 세계사적 재앙이라   폭력적 (유대주의에 이용당한  알면 니체는 과연 뭐라고 할까상상이나 했을까?

지오는 어느새 니체에 빙의한 채 그를 대신해 분노하고 있는 자신을 애써 추스르며 ‘초인’을 니체의 철학적 사상을 총동원해서 설명한다면 얼마나 다양하게 표현할 수 있을까를 생각해 본다.

주인으로 사는 인간, 자신과 세계를 긍정하는 인간, 허무주의를 넘어선 인간, 가치를 창조하는 인간, 능동적으로 행동하는 인간, 힘에의 의지를 가치로 설정하는 인간, 디오니소스적인 긍정의 힘을 가진 인간, 어린아이의 정신으로 늘 새롭게 시작하는 인간…

이 모두를 다시 한 마디로 포괄하자면 ‘자유정신을 가진 인간’일 게다. 그 순간 지오의 머릿속에 섬광처럼 떠오른 표현 하나 ‘자발적 아싸’. 오… 요즘 가장 핫한 표현으로는 기존의 도덕과 가치, 시류에 얽매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게 딱이다. 아닌가? ‘자발적 아싸’라 하면 초인의 존재감이 너무 떨어지려나? ㅎㅎ

지오는 궁금해졌다. 어떻게 하면 자기 자신의 운명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며 새로운 창조로 나아갈 수 있는 인간이 될 수 있는지… 사실 방금까지도 그녀는 너무 집요하게 질문만 한 것 같은 미안함에 잠시 니오에게 산책을 나가자고 하려던 참이었다. 그런데 안 되겠다. 폭발하는 궁금증에 슬쩍 자신과 타협해보는 그녀, 이것까지만… 하고 막 질문을 던지려는데, 니오가 먼저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니오: 지오, 어느 날 낮, 혹은 어느 날 밤에 악령이 지오의 가장 깊은 고독 속으로 살며시 찾아들어 이렇게 말한다면 그대는 어떻게 하겠소?

지오: 뭐라고 하는지 일단 들어보고요. ㅎㅎ 악령이 나한테 무슨 말을 하려나?

니오: “네가 지금 살고 있고 살아왔던 삶을 너는 다시 한번 살아야만 하고, 또 무수히 반복해서 살아야만 할 것이다. 거기에 새로운 것이란 없으며, 모든 고통, 모든 쾌락, 모든 사상과 탄식, 네 삶에서 이루 말할 수 없이 크고 작은 모든 것들이 네게 다시 찾아올 것이다.”

지오: 정말요? 이 생과 완전히 똑같은 삶이 다시 찾아온다고요?

니오: 자, 계속. “모든 것이 같은 순서로 예를 들면, 나무들 사이의 이 거미와 달빛, 그리고 이 순간과 바로 나 자신도, 현존재의 영원한 모래시계가 거듭해서 뒤집혀 세워지고…”

지오: 자… 잠깐만.. 정말 그게 가능하다고요?

니오: 그렇게 한 번 가정해보자는 거요. 마저 들으시오. 악령이 마지막에 “티끌 중의 티끌인 너도 모래시계와 더불어 그렇게 될 것이다.”라고 말을 맺는다면 어떻게 하겠소? 지오는 땅에 몸을 내던지며, 그렇게 말하는 악령에게 이를 갈며 저주를 퍼붓지 않을까요?

지오: 어.이.없.음. 아니.. 악담도 어디 그런 악담을…

니오: 아니면, 이렇게 말하려나? “너는 신이로다. 나는 이보다 더 신성한 이야기를 들어보지 못했노라!” 이렇게? ㅎㅎ

지오: 와.. 상상만 해도 그냥 끔찍해요. 지금 내 삶이 얼마나 맘에 안 들고 재미없는데… 꾸역구역 겨우 살아내고 있구만. 이런 삶이 또다시 반복된다고? 말도 안 돼.

니오: 끔찍하겠지요?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삶이 고통이기만 하고 정말 무의미하기만 하다면 그럴 겁니다. 여기서 탈출해서 저기 좀 더 나은 세상으로 가기를 갈망하고 있었다면 말이지.

지오: 맞아요. 희망이 사라지잖아요. ‘지금 이 순간만 지나가면 돼. 조금만 잘 버텨보자!’ 이러고 있는데, 근데 이게 끝이 아니래. 이런 삶이 똑같이 내게 돌아온대. 노노노… 안 돼. 너무 고통스러울 것 같아요.

니오: 그런데 이렇게 한 번 생각해 보자고요. 그렇게 내 삶이 다시 돌아온다는 그 생각이 지오를 지배하게 되면, 그것은 지금의 지오를 변화시키지 않을까요? 이 순간만 모면하면 되는 게 아니라면 뭔가 달라져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까? 다음에 다시 오더라도 괜찮게 이 삶을 살아내야겠다는 뭐 그런…

지오: 음… 괜찮게라…

니오: “너는 이 삶을 다시 한번, 그리고 무수히 반복해서 다시 살기를 원하는가?”라는 질문은 모든 경우에 최대의 중량으로 지오의 행위 위에 얹힐 거요.

지오: 그래, 이 삶이 다시 한번 살고 싶어지려면? 지금을 사랑스러운 삶으로 만들어야 하네. 그러면 그 삶이 기다려질 수도 있을 테니. 지금 이 순간이 행복하다면 다시 한번 살아도 좋지 않을까?

니오: 그렇지. 바로 그거요. 이렇게 극단적으로 한 번 몰아붙여서 생각해보는 겁니다. 그러면 현재 내가 해야 할 일이 조금 명확하게 보이지 않을까요? 이 최종적이고 영원한 확인과 봉인 외에 더 이상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너 자신과 너의 삶을 만들어가야만 하는가? 바로 이 질문인 거요.

지오: 오.. 소름… 나 방금 소름 돋았어요. 니오는 어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죠? 처음엔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생각했는데, 곰곰 생각해보니 말이 되네요. 니오는 그러니까 지금에 충실하라는 얘기를 하고 싶은 거잖아요. ‘지금, 여기에’가 중요하다는 것!

니오: 오늘부터 숙제. 한 번 잘 생각해 보오.

지오: 이 순간을 긍정하라! ‘이 또한 지나가리라’의 적극 버전이네. ㅎㅎ

내가 대지를 밟고 서있는 바로 여기, 이 순간은 영원과 맞닿아 있다는 것. 존재가 나타났다가 사라지듯 이 순간은 결국 사라질 거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순간을 긍정하는 것. 지금까지 있어 왔던 그 끊임없는 순간의 반복을 또다시 긍정하는 것, 그것은 결국 삶의 힘으로 되살아나는 것이 아닐까.

지오: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어요. ‘그 고통과 심연의 시간을 즐길 수 있고 광대와 같이 웃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비애와 절망과 그 인간이 가질 수 있는 모든 감정을 결국 긍정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쉽지 않을지라도.

“용기는 최상의 살해자다. 공격하는 용기는 최상의 살해자다. 모든 공격 안에서 울려 퍼지는 연주 소리가 있다. 그러나 인간은 가장 용기 있는 동물이다. 그는 이 용기를 가지고 모든 동물들을 극복했으며 이 울려 퍼지는 연주 소리와 더불어서 모든 고통을 극복했다. 인간의 고통이 가장 큰 고통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지오는 차라투스트라의 이 말을 들으니 왠지 우리 인간의 큰 고통을 알아주는 것만 같아 묘하게 위안이 되었다. 그래, 가장 깊은 심연의 고통을 느낄 수 있는 게 인간이고 또 가장 밝은 희망을 가질 수 있는 것도 인간이라 하지 않던가.

니오: “용기는 최고의 살해자다. 공격하는 용기는 죽음조차도 살해한다. 왜냐하면 용기는 그것이 삶이었던가! 자. 다시 한번…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초인에게 최고의 덕목이 용기다.”

지오: 그것도 차라투스트라가 말한 거예요?

니오: 그렇소. 차라투스트라가 이렇게 말했다오.

지오: 참, 그 차라투스트라 아저씨 나도 한 번 만나보고 싶네. 뭐 이렇게 멋진 말만 다 골라했냐?

니오: 차라투스트라는 지오 안에 있을 수도 있소. 밖으로 향해 있던 시선을 지오의 내면으로 돌리면 거기에 차라투스트라가 있을지도 모르오.

지오: 그게 생이었던가? 자, 다시 한번. 삶이여, 오라. 천만 번이라도 내 너를 기쁘게 맞이할 테니…

니오: 그거요. 그렇게 자기 삶을 환대할 수만 있다면 지금 여기서 우리는 잘 산거요. 그거면 충분하오.

‘근데… 왜 갑자기 눈물이 나지?’ 주책이다. 영원히 반복되는 삶까지도 환대할 수 있으려면 내가 지금 얼마나 이 생을 사랑해야 하는 거지? 그건 나의 이 생이 그만큼 소중하다는 반증이겠거니… 이런 생각 끄트머리에서 만난 슬픔에 지오는 그만 울컥했다. 지금 뜬금없이 밀려드는 이 감정은 그동안 미처 깨닫지 못한 내 삶에 대한 벅찬 사랑일까, 아니면 그저 들키고 싶지 않은 시시한 삶을 사는 자의 서러움일까? 인간은 자신의 인식과 더불어 뻗어나가고, 스스로를 객관적으로 드러낼 수 있다고 했는데… 결국 인간은 자기 자신의 생애 외에 아무것도 짊어지지 않는다던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니체의 말이 떠올라서였을까.

니오: 인간은 극복되어야 할 그 무엇이오. 그저 내 운명이 평탄하기만을 바라지 말고 안락한 삶을 경멸해야 한다는 거요. 그게 초인으로 사는 법이지. 우리의 삶을 기억하자는 얘기가 너무 과격했나요? 자기 극복을 위해서는 경멸이 중요하다는 얘기를 하고 싶었소. 자기 파괴가 끊임없이 일어나면서 우리 삶은 이어져야 하니까.

지오: 그게 생성의 힘인 거죠? 영원회귀를 듣던 순간 뭔지 모를 감정이 벅차올랐어요. 근데 확실한 건, 내 운명을 사랑해야겠다는 그 마음이 체념이 아니라 오히려 새로운 창조를 향해서 나아가는 강력한 힘으로 느껴진다는 거예요. 제가 지금 니오에게 세뇌당하고 있나 봅니다.

니오: 나의 충격요법이 또 한 번 통했군. 바로 그거요.

지오: 음.. 초인이라… 내친김에 그럼 초인이 되는 구체적인 방법까지 부탁할게요. 요즘은 초인 대신 ‘위버맨쉬’라고 그냥 독일어 그대로 쓰기도 하더구먼. 이 타이밍에 또 차라투스트라가 등장해야 하나요?

니오: 아마도? 어쨌든 자기를 극복하고 나온 것이기에 이 긍정은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자신의 운명을 사랑할 수 있는 초인만이 가능한 거요. 그것이 바로 아모르 파티(Amor Fati)!

지오: 저 그거 알아요. 아모르 파티(Amor Fati). 운명을 사랑하라! 결코 운명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숙명론이 아닌 삶을 긍정하는 삶의 태도로서의 운명애(運命愛)!

니오: 그래요. 자신의 운명을 사랑하려면 그 운명이 사랑받을 만하게 만들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새로운 창조를 강조하는 겁니다. 극복되어야 할 그 무엇으로서의 인간인 우리는 무엇을 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