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_‘나’라는 최고의 걸작…

니체와의 토리노 데이트 14

그대가 삶을 도저히 견딜 수 없을 때, 그대는 그것을 사랑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최고의 현자들이 항상 사용하는 기술이었다. (유고 1883년 가을)

어느 시대에서든 최고의 현자들은 삶에 대한 똑같은 판단을 내렸다: 삶은 별 가치가 없다고…… 언제나 그리고 어디서든 사람들은 그들의 입에서 똑같은 소리를 듣는다-회의와 우울 가득한, 삶에 완전히 지쳐버리고 삶에 대한 저항이 가득한 소리를. 심지어는 소크라테스마저도 죽으면서 말했다: “삶-이것은 오랫동안 병들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네: 나는 구원자 아스클레피오스에게 닭 한 마리를 빚졌다네.”(우상의 황혼-소크라테스의 문제)

소크라테스조차도 삶에 넌더리를 내고 있었다고 말하는 니체. 그 자신도 인생을 비극으로 보았고, 비극을 감당할 줄 알아야 한다고 했다. 고통 없는 삶은 없으니 삶을 사랑한다는 것 자체가 고통을 사랑하는 것이라나.

예전에 지오는 니체라는 철학자가 정말 알다가도 모를 사람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이 세계의 모든 사물을 차갑게 바라보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고 모든 것을 의심하고 비판하는 태도에 거부감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언젠가부터는 ‘의심한다는 건 어찌 보면 바꿔서 생각한다는 건데, 그게 뭐?’가 되더라. 이것이 니체가 그녀에게 가르쳐준 교훈이었다. 과연 이 세계에 순수한 헌신이란 존재할까? 내 행위 배후에 순수하지 않은 것들이 있지는 않은지 되돌아보게 하는 것이 니체 철학이었던 것이다. 이런 참회 이후에 조금이라도 순수에 가까워질 수 있다면 우리는 더 치열하게 의심하고 또 의심해야 하지 않을까.

우리에게 익숙한 니체의 책,『우상의 황혼』의 원래 제목은『어느 심리학자의 휴식』이었단다. 이 성공하지 못한(?) 제목으로부터 우리가 알 수 있는 건 니체는 확실히 인간의 무의식에 천착했던 철학자였다는 거다. 니체보다 12년 늦은 1856년생인 프로이트가 심리학의 대가로 새로운 학문의 시대를 열었다면 그 씨앗을 뿌린 사람은 니체였다. 프로이트 이후 우리는 언제든지 나 자신을 속일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제 사람들은 선한 행동 배후에는 다른 무의식적 이기심이 발동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지오: 젊은 시절의 제게는 니오가 부정적 인간의 전형처럼 느껴졌어요. 니오는 ‘긍정적’이라는 말과는 안 어울린다고 생각했지요. 기존의 가치를 깨부수는 사람이고 절대적인 믿음을 거부했으니 니체는 극단적인 허무주의자일 뿐이라고 오해했던 거예요. 사실, 니힐리즘의 극복이 니오 철학의 요체였는데 말이죠.

니오: 니힐리즘 그 자체로 나를 보았군요. 충분히 그럴 수 있으니 뭐 새삼스럽지는 않으나 조금 서운하기는 합니다. 하하. 사실, 나는 줄곧 삶의 아주 작은 부분까지 무한히 반복된다 할지라도 그 생을 긍정하라고 말하는 사람이었으니까요. ㅎㅎ

지오: 어린 지오의 미숙함이니 ‘섭섭 금지!’ ㅎㅎ 진리를 말하는 자의 무의식 속에 무엇이 있는지를 보라고 말하는 니오에게는 격하게 공감합니다. 그것이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한 것은 아닌지… 그렇다면 진리는 속이려는 의지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닐까 또 의심해봐야 하는 게 맞다고 보거든요. 니오는 끊임없이 참회하라고 말하는 것만 같아요. 진리를 말하는 마음속에 무엇이 있는지를 보라고 말이죠.

니오: 이제라도 나를 제대로 이해해주니 고맙구려. ㅎㅎ 사실 이 세상이 긍정적인 가치로만 가득하다고 믿는 것보다는 인정하고 싶지 않은 추악한 가치까지도 외면하지 말고 마주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성격이 긍정적인 사람들은 대체로 기존의 관습이나 도덕 체계에 충실한 편이고 그게 살아가는 데는 더 편할 수도 있지요.

지오: 그렇죠. 순응하는 편이 사는 덴 확실히 편하죠. 어찌 보면 조금 부정적인 기질의 사람들이 더 현실 감각이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세상을 좀 더 균형 있게 바라보는지도 모르고요. 이 세상을 아름답게만 보려는 사람들은 실망스러운 삶의 모습 앞에서도 그저 ‘괜찮아, 좋아질 거야’라는 말로 스스로를 위로하고 그 상황을 덮고 넘어가는 경우도 많을 테니. 현실을 직시하지 않는 거죠.

니오: 바로 그거요. 이 세상은 그렇게 아름답지만은 않아요. 어쩌면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불행하고 추악한 곳일 수도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그저 나이브하게 다른 사람들이 부여한 가치에 일방적으로 영향을 받으면서 살아가지 말고 스스로 의미와 가치를 만들며 살아가야 한다는 거죠. 그렇게 할 수만 있다면 부정적인 태도가 반드시 나쁜 건만은 아닐 거예요. 자기 나름대로 삶의 의미를 찾아내는 그런 전향의 경험이 가능할 수도 있을 테니. 이쯤 되면 부정적인 태도라는 표현보다는 ‘비판적인 태도’가 맞겠지요? ㅎㅎ 암튼… 그러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자기를 해체하고 변화하는 그 과정에서 오는 모든 것들을 즐기면서 살 수 있어야 해요. 이 위험한 삶 자체를 온전히 누리며 웃을 수 있는 법을 배우는 것이 디오니스적 긍정이자 아모르파티죠.

지오: 이제 확실히 알겠어요. 니오가 추구하는 높은 정신이란 파괴하는 정신이고 그것을 넘어 창조하는 정신인 거예요. 그렇죠? 자신을 묶고 있는 수많은 족쇄들을 깨부숴야 한다는 거죠. 그리고 파괴하는 것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시선을 위로 고정시키고 자신만의 비전과 새로운 가치를 창조해야 하고요.

이미 누군가가 확립한 길을 걷지 마라. 자기의 길을 가라. 막막한 가운데서도 오직 자기의 길을 넓혀가라. 자기를 자기 자신이 이끌어 당당하게 나아가야 한다(농담. 간계. 그리고 복수).

니오: 그리고 그런 창조자에게 가장 필요한 게 바로 용기입니다. 혹자는 ‘인간을 목적으로 보고 그 자체로 괜찮고 사랑받을 만하다’라고 합니다. 참 좋은 얘기죠. 하지만 내겐 그들은 지금 자신의 삶을 묶어두는 족쇄를 부숴버릴 용기도 힘도 없는 사람들로 보여요. 자신을 가두는 것들을 끊어내기 위해서는 그 과정에서 맞닥뜨리게 될 따돌림과 불이익, 외로움과 갈등까지도 감내하고 이겨낼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만 합니다.

지오: 맞아요. 우리 사회에도 한참 ‘힐링’의 바람이 불었던 적이 있어요. 여전히 진행 중이긴 하지만… 어쨌든 ‘괜찮아, 지금 이대로도 좋아’라는 위로의 키워드가 한참 유행했었는데… 니오의 철학은 확실히 그런 방향성과는 다른 것 같아요. 삶의 고통까지도 끌어안고 그것에 긍정적인 가치를 부여할 수 있는 자기 극복의 끝판왕(?)인 초인을 요구하고 있으니까요. 그러고 보면 니오는 ‘영원회귀’라는 사고 실험을 통해 높은 정신의 창조자가 갖춰야 할 어려운 조건을 제시한 거네요. 절대적인 것에 의지하지 않으면서도 자신이 숨 쉬고 있는 순간순간의 삶을 긍정할 수 있다면 그보다 더 좋은 삶이 있겠냐고 묻는 것 같아요.

모든 생성과 성장, 미래를 담보하는 것은 전부 고통을 전제한다…… 창조의 기쁨이 있기 위해서는, 삶에의 의지가 영원히 자신을 긍정하기 위해서는, ‘산모의 고통’도 영원히 존재해야만 한다…… 이 모든 것을 디오니소스라는 말이 의미하고 있다. …… [중략] …… 삶 자체에 대한 긍정이 가장 낯설고 가장 가혹한 문제들 안에도 놓여 있는 것이다; 자신 최고 유형의 희생을 통해 제 고유의 무한성에 환희를 느끼는 삶에의 의지-이것을 나는 디오니소스적이라 불렀으며 비극 시인의 심리에 이르는 다리로 파악했다(우상의 황혼-내가 옛사람들의 덕을 보고 있는 것).

우리 인간을 ‘힘에의 의지’의 총제로 바라보는 그다. 인간은 끊임없이 우리 삶 전체가 더 나아지기를 추구한다고 말하는 그다. 바로 상승적 삶에의 의지, 즉 ‘힘에의 의지’가 우리 삶을 이끌어간다는 것이다. 이 힘에의 의지가 잘 작동하는 한 그 삶은 좋은 삶이란다.

지오는 모든 만물에 깃들어 있는 어떤 기운을 상상해본다. 살아있는 모든 것은 다 변화한다. 그 안에서 작용하는 힘은 필연적으로 ‘상승’과 ‘보다 많이’를 원한단다. 그래서 이 세계의 모든 존재는 생성일 수밖에 없다고. 인간은 언제나 그 자체로 머물러 있지 않으니까 말이다. 즉 모든 살아있는 존재에게는 ‘힘에의 의지’가 있으니 우리는 ‘상승’ 해야 하고 늘 ‘보다 많이’를 추구하게 된다는 거다.

지오: ‘힘에의 의지’가 뭔지 이제 좀 감이 오는 느낌. ㅎㅎ 나라는 존재 역시도 ‘힘’을 추구하기 때문에 나는 나 자신의 상태에 머물러 있지 않고 변화할 수밖에 없다. 그 변화를 다른 말로 하면 생성이다. 그 말인 거죠?

니오: 그렇소. 내가 존재를 ‘생성’으로 파악한 건 ‘힘에의 의지’라는 작용이 있는 한은 필연적이었소. 인간은 끊임없이 생성하는 존재니까. 그러므로 우리에게 유일하게 보장된 존재는 변화하고 있으며, 한순간도 스스로와 동일하지 않다는 것이며, 관계들을 가지고 있다는 거지요. 이것이 존재의 근본적 확실성이라 할 수 있고요.

지오: 이제 힘에의 의지 개념은 확실히 이해됐어요. 그런데 아직도 남는 의문 하나, 안락한 삶을 추구하는 게 뭐가 잘못된 거죠?

니오: 내가 말했지요. 안락이라는 게 우리 인간의 목표가 아니라고. 그것은 우리가 조소해야 하는 대상이고 경멸해야 하는 것이며 인간은 그것에 의해서 자신의 몰락을 바라게 되는 것이라고.

지오: 안정된 직장, 안락한 가정, 그렇게 적당한 편안함을 추구하며 사는 삶이 우리 모든 현대인들이 바라는 행복 아닐까요? 이런 소소한 일상을 꿈꾸는 게 왜 문제인지 난 모르겠어요.인간이 결국 바라는 건 행복 아닌가? 그럼 니오가 생각하는 행복이란 뭔데요?

니오: 아까 말했던 것, 바로 힘이 증가되고 있다는 느낌, 저항을 초극했다는 바로 그 느낌이죠. 그래서 위대한 삶을 지향하고 내적으로 강하면서 기품 있는 생명력에 충만한 초인이 되어야 하는 거요. 외부의 환경에 쉽게 굴복하지 않고 항상 그 상황의 주인으로서 존재하면서 압도하는 자신의 힘을 느낀다는 거요. 그러니 초인의 세계는 단연코 아름답게 보이지 않겠소. ㅎ

지오: 니오의 철학은 결국 ‘초인으로 가는 여정 그 자체’네요. 궁금해요. 그 아름다움이란 구체적으로 뭔지?

니오: 여기서 ‘아름다움’이라 함은 인간이 자신의 아름다움과 풍요로움을 세계에 나눠주는 것을 말한달까요? 자신이 아름답고 풍요롭다고 느끼는 사람은 이 세계도 똑같이 그런 것으로 경험하게 되니까. 이런 사람은 직업적인 예술가가 아니더라도 이미 예술가라고 할 수 있지요. 그리고 인생의 최고 걸작을 창조하게 되는 거요.

지오: 글쎄.. 난 예술적 재능은 1도 없는 사람이라… 예술가가 되고 걸작을 만든다? 감히 상상도 안 되는데…

니오: 내가 말했잖소. 초인이 되면 이미 다 예술가라고.

지오: 그 초인이 그러니까 아무나 되냐고요? ㅎㅎ

니오: 누구나 될 수 있소. 흔히 행복을 고난과 고통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 상태라고들 하잖아요. 그저 좋기만 할 것 같은… 그러나 우리는 결코 고통을 피할 수는 없어요. 그것만 받아들이면 돼요. 그러니까 행복한 인간이란 살면서 절망과 좌절이 없기를 바라기보다는 그런 것들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정신적인 평정과 충일함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인 거요.

그렇게 살 수 있는 사람에게 이 세계는 아름다운 것이 된다는 거다. 거기서 ‘자기 삶의 예술가’라는 말이 나온 것이 아닐까. 우리 모두가 예술가가 되어 각자 만들어내는 최고의 걸작은 바로 ‘자기 자신’이란다. 바로 ‘나’라는 작품. 정말 그 상상만으로도 멋지지 않은가. ‘나’라는 최고의 걸작이라니.

니오: 그럼 반대로 불행은 뭐냐? 내적으로 빈곤해지고 생명력이 쇠퇴한 결과로 나타나게 되는 우울증과 염세주의요. 그러니 그런 불행을 극복하고 행복한 인간이 되기 위해 자신의 의지와 생명력을 강하게 단련해야 한다는 얘기지요. 행복은 고통을 초극하여 힘의 고양과 충만을 경험하는 것이니까. 안락이라는 것은 결코 우리의 목표가 아닙니다.

지오: 하긴, ‘안락’만을 목표로 삼고 열심히 앞만 보고 달렸다가 그게 실현되지 않았을 때의 절망감이 더 아플 것 같긴 해요. 근데 늘 초극하려는 삶 역시도 너무 고단할 것 같아요. ㅠㅠ 아, 인생이여!!

니오: 그게 인생 아니겠습니까. ㅎㅎ 이 세상엔 목자는 없고 군중만 넘쳐나요. 현대인의 꿈은 그저 안정된 직장, 안락한 가정, 적당히 일상의 편안함만을 추구하는 삶이고. 그러지 말자는 거요. 남들과 같아지려고 하지 말고 자신만의 삶을 살자는 겁니다. 남들이 정해놓은 규칙에 무조건적으로 따라가지는 말자는 건데. 그게 어렵나요?

지오: 그럼요. 어렵죠. ㅎㅎ 남들이 하는 걸 안 하는 게 제일 어려운 거 아닌가? 그냥 평범하게 살고 싶으니까. 눈에 띄기 싫으니까 남들과 자꾸 같아지려고 하는 게 아닐까요? 우리가 일상적 삶을 사는 데 있어 대중 속에 숨어버리는 게 가장 쉽잖아요. 물론 니오는 또 ‘무리 본능’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하겠지만…ㅠㅠ 알겠어요. 오늘 니오의 가르침은 ‘네가 되어 순간을 살아라. 행복은 순간에 있나니…’인 걸로!!

니체가 말하고자 했던 것은 이렇듯 우리 일상적 삶의 ‘현상’에 대한 이야기다. 플라톤은 ‘이데아’라는 저쪽이 본질이고 다른 건 다 그림자, 즉 가짜라고 했지만 니체는 ‘현상’으로 내려와서 이쪽이 진짜라고 말한다. 여기서 실존이라는 단어가 나왔다. 이 실존이 독일 철학에서는 야스퍼스와 하이데거로 이어졌고 프랑스로 건너가서 실존주의가 되었다.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라고 했던 사르트르나 ‘실존적 삶을 위해 부조리에 저항하라’라고 했던 까뮈를 소환하지 않더라도 니체는 조국인 독일에서보다 프랑스에서 훨씬 더 큰 영향력을 발휘했다. 미셸 푸코, 자크 데리다, 질 들뢰즈 등 니체를 너무도 사랑했던 걸출한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자들이 대거 등장한 곳도 ‘예술과 혁명의 나라’ 프랑스가 아니던가.

3 thoughts on “14화_‘나’라는 최고의 걸작…”

  1. 지오님에게.. 지오님에게 용기는 뭘까요? 그런걸 왜 물어봐! 할것 같지만.. 슬쩍 물어봅니다.

    응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