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와의 토리노 데이트 11
다시 천고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by 이육사
우리는 끊임없이 추락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뒤로 옆으로 앞으로 모든 방향으로 추락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아직도 위와 아래가 있는 것이 아닐까? 무한한 허무를 통과하고 있는 것처럼 헤매고 있는 것이 아닐까? 허공이 우리에게 한숨을 내쉬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한파가 몰아닥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밤과 밤이 연이어서 다가오고 있는 것이 아닐까? 대낮에 등불을 켜야 하는 것이 아닐까? 신을 매장하는 자들의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신의 시체가 부패하는 냄새가 나지 않는가? 신들도 부패한다! 신은 죽었다! 신은 죽어버렸다! 우리가 신을 죽인 것이다!((《즐거운 학문》, 125. 광인)
니오: 사람들은 내가 신을 죽였다고 다들 오해하지요. 나는 신이 죽었다는 사실만 말한 건데. 그 당시 유럽은 이미 신에 대한 믿음이 약화되고 있었어요. 그리고 신이 죽은 뒤에 찾아오는 허무주의의 귀결이 뭔지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난 그런 상황 하에서 유럽에 필연적으로 불어닥칠 엄청난 공포인 허무주의를 보였을 뿐이오.
그렇다. ‘신은 죽었다’는 앞으로 도래할 ‘허무주의’에 대한 하나의 경고였던 셈이다.《즐거운 학문》에서 광인이 등불을 켜고 시장 곳곳을 헤매며 신을 찾았던 건 절대적 가치가 사라졌을 때 발생할 문제를 정확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대들은 밝은 대낮에 등불을 켜고 시장을 달려가며 끊임없이 ‘나는 신을 찾고 있노라! 나는 신을 찾고 있노라!’고 외치는 광인에 대해 들어본 일이 있는가? 시장 사람들은 이런저런 말로 비아냥거린다. ‘신을 잃어버렸는가? 신이 아이처럼 길을 잃었는가? 신이 숨어버렸는가? 신이 우리를 두려워하고 있는가? 신이 배를 타고 떠났는가? 이민을 떠났는가?’ 이렇게 말이다.
니오: 그들은 아직 신의 죽음 이후에 오게 될 허무를 알지 못한 거요. 지구가 태양으로부터 풀려났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지 못했던 거요.
지오: 광인은 신을 죽인 뒤에 오는 허무감을 극복하기 위해서 ‘우리 스스로가 신이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라고 반문하잖아요. 그런데도 이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을 보며 광인의 입에서 흘러나오던 그 한탄이 떠오르네요.
‘나는 너무 일찍 세상에 나왔다. 나의 때는 아직 오지 않았다. 이 엄청난 사건은 아직도 진행 중이며 방황 중이다. 이 사건은 아직 사람들의 귀에 들어가지 못했다. 천둥과 번개는 시간이 필요하다. 별빛은 시간이 필요하다. 행위는 그것이 행해진 후에도 보고 듣게 되기까지 시간이 필요하다. 사람들에게 이 행위는 아직까지 가장 멀리 있는 별보다도 더 멀리 떨어져 있다. 하지만 바로 그들이 이 짓을 저지른 것이다!’(《즐거운 학문》, 125. 광인)
지오: 태양이 갑자기 사라져도 지구는 얼마 동안 없어진 태양 주위를 공전한대요. 태양에서 지구로 빛이 도달하는데 시간이 걸리는 것처럼 광인이 봤을 때 신은 죽었지만 신이 죽은 결과는 아직 사람들에게 전해지지 않았다는 거지요. 그러나 이 사건은 반드시 전해질 거라는 거. 그리고 마침내 우리 현대인들은 이러한 신-죽음, 즉 절대적 가치의 붕괴 속에서 허무를 느끼고 있지요. 니오의 동시대인들은 이것을 느끼지 못했지만 비로소 우리에게 신 죽음에 대한 의미가 드러난 거예요.
니오: 내가 그때 그랬잖소. 아직 이르다고. 엄청난 사건은 인간의 귀와 마음을 아직 파고들지 않았다고. 위대한 소식은 이해되기까지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한다고.
지오: 이제 인간은 태양(가치)으로부터 떨어져 공허한 우주에 내던져졌어요. 니오의 동시대 사람들은 알지 못했지만 이제 우리는 절대적 가치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파괴되어가는 것을 누구보다 분명하게 보고 있지요.
니오: 그래서 그런 가치가 사라진 세계에서 인간이 추구해야 할 새로운 상이 바로 위버맨쉬(Übermensch)라는 거요. ‘초인(超人)’ 말이요. 신이 죽은 세계, 즉 절대적 가치가 사라진 세계는 필연적으로 허무의 감정을 동반하니까.
지오: 그허무에 대해 정확하게 설명 좀 해줄 수 있나요? 내가 피상적으로 알고 있는 허무주의는 염세주의와 별반 다르지 않았거든요. 그런데 니오가 말하는 허무주의는 그것과는 결이 좀 다른 것 같아서. 니오가 그렇게 좋아했던 쇼펜하우어를 나중에는 비판한 건 알고 있지만… 그는 지독한 염세주의자였잖아요.
니오: 허무주의는 진리란 없다는 것, 사물의 절대적 성질이란 없다는 것, ‘(사)물 자체’란 없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어요. 그 자체가 허무주의죠. 어떠한 실재도 그 사물의 가치에 대응하지 않고, 대응했던 적도 없었으며, 오히려 가치 설정자가 지닌 힘의 증후이자 그 삶의 목적을 위한 단순화에 지나지 않는 것, 바로 거기에 부여하는 게 허무주의죠.
지오: 그래서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결론?
니오: 허무주의는 병리적 중간 상태를 표현하죠. 여기서 ‘병리적’이란 전혀 아무런 의미도 없다고 결론짓는 끔찍한 일반화를 말해요. 이 병리적 중간 상태에서 그냥 머무르는 것이 ‘수동적 허무주의’ 요. 허무주의가 다 똑같은 게 아니오. 현실세계를 부정하는 플라톤 사상과 기독교 사상을 나는 수동적 허무주의라 부르오.
지오: 수동적 허무주의라… 그럼 능동적 허무주의도 있다는 건데?
니오: 반대로 중간에서 머무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 즉 자기 삶의 의미를 창조하려는 태도를 ‘능동적 허무주의’라고 하지요. 인간은 ‘짐승과 초인 사이에 놓인 밧줄’이라오. 그 말은 짐승과 초인 사이에 매달린 운명의 인간은 짐승을 향해 돌아갈 수도 있지만 초인을 향해 나아갈 수도 있다는 겁니다.
그 어떤 도덕적 사실은 없고 단지 어떤 현상에 대한 도덕적 해석만이 존재하며, 그것도 하나의 잘못된 해석만이 있을 뿐이라고 했던 니체가 우리에게 하고 싶었던 말은 뭘까? 바로 ‘초극하는 삶’을 살라는 것이었으리라. 그러기 위해서는 기존 가치에 대한 지적인 도전이 필요했고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진정으로 무엇을 원하는지를 의심하게 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치열한 의심을 통해 극복된 존재가 바로 ‘초인’이라 해석되는 위버맨쉬((Übermensch)인 것이다. 지오는 문득 우리의 저항시인 이육사가 ‘광야’라는 시에서 천고(千古)의 뒤에 백마 타고 오리라던 그 ‘초인’을 떠올렸다.
지오: 결국 신과 함께 모든 의미가 사라진 세계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의 문제로군요. ‘이제 아무런 의미도 없다’며 짐승과 다름없는 본능적 쾌락만을 추구하며 살 수도 있고, 반대로 자신의 삶에 끊임없이 의미를 부여하며 이 허무를 극복하는 삶을 선택할 수도 있다는…
니오: 그대들에게 초인을 가르치려 하노라. 인간은 극복되어야 할 그 무엇이다. 그대들은 자신을 극복하기 위해 무엇을 했는가? 지금까지 모든 존재는 자신을 넘어서 그 무엇인가를 창조해 왔다. 그런데도 그대들은 이 거대한 밀물의 한가운데서 썰물이 되기를, 자신을 극복하기보다는 동물로 되돌아가기를 원하는가?
지오: 그건《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나오는 구절인데… 아니 이렇게 갑자기 차라투스트라에게 감정 이입하시면 어떡합니까? 하하.
니오: 그렇게 초인은 자신을 극복하는 자요. 초인은 ‘상승’과 ‘보다 많이’를 추구하는 존재지요. 그래서 초인을 끊임없이 앞으로 나아가는 자, 자신을 상승시키는 자라고 한 거요.
지오: 그러면 이 초인이 기존에 존재했던 신을 대체할 새로운 ‘신’인 건가요?
니오: 아닙니다. 초월적인 것을 거부했는데 다시 신을 만든다면 그건 모순이겠지요? 이 초인은 비록 신은 아니지만 허무주의에 빠진 세계를 구원할 수 있는 존재라고 이해하면 쉽지요.
지오: 전혀 안 쉽거든요? ㅎㅎ 그러면 차라투스트라가 ‘나는 유럽의 부처가 될 수도 있을 것’이라고 말한 건 허무를 극복할 수 있는 가능성인 초인을 유럽 사람들에게 보여줬다는 의미인가?
니오: 그 말의 의미에서 중요한 게 있어요. 고통을 피하려고 한 인도의 부처와는 달리 자신은 인류에게 다가오는 허무를 능동적으로 극복할 수 있는 초인을 제시했다는 거죠. 인도의 부처와는 대립자라고 할 수 있겠지요.
지오: 인도의 부처가 고통을 피하라고 한 건 아닌 것 같은데? 부처 역시 인간 세상의 고통을 인정하고 그 안에서 자신의 마음에 집중하라고 한 거 아닐까요? 피하는 것과는 좀 다른 것 같아요.
니오: 그런가요? 뭐.. 암튼…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밧줄 위에 있다는 것은 즉 짐승으로 돌아가는 것, 중간에 머무는 것, 초인을 향해 앞으로 나아가는 것 전부다 위험천만한 일이라는 거요. 어느 것 하나 쉬운 게 없지. 인간이 매달려 있는 밧줄 아래에는 심연이 있거든. 그러니 그 위에서 밧줄에 매달려 있는 그 자체가 위험인 거요.
지오: 거 봐요. 부처도 인생은 고해(苦海)라고 했거든요. 암튼 니오는 그러니까 모든 게 위험 자체인 그 밧줄 위에서 짐승이 되든, 초인이 되든 결국 궁극적 의미는 없다는 거예요?
니오: 인간은 다리일 뿐입니다. 목적이 아니라는 거죠. 건너가는 존재이며 몰락하는 존재라는 것에 인간의 위대함이 있다는 거예요.
지오: 아고.. 뭐라시는 건지? 참으로 어렵습니다. 완성은 없고 과정만 있다는 말씀이신가?
니오: ㅎㅎ 그렇소. 극복해가는 과정 자체가 우리 삶이 아니겠소? 그 과정에서 짐승으로 돌아가는 것, 중간에 머무르는 것, 초인으로 나아가는 것 모두 위험하니 기왕 그중의 최선인 초인을 향해 나아가는 것을 택하는 게 낫지 않겠소? 어차피 다 위험하다면 말이요.
지오: 초인은 그러니까 자신의 존재 의미를 초월적 존재인 신으로부터 찾지 않는다는 게 핵심이네요? 초인을 향해 나아가는 인간은 삶을 뛰어넘는 또 다른 세계, 즉 초월적인 것을 거부하고 이 지상의 삶을 유일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여기서의 삶 속에서만 자신의 존재 의미를 찾는다는 거죠?
니오: 그렇기 때문에 초인이 등장하려면 필연적으로 신이 죽어야만 했습니다. 신이 죽지 않는다면 인간은 자신의 존재 의미를 이 지상에서는 물을 필요가 없어지니까. 신이 죽지 않는다면 신만이 인간의 살아가는 의미에 대해서 알려준다고 믿을 테니.
지오: 글쿠나. 신이 죽음으로써 인간에게 살아가야 할 궁극적 의미가 사라졌으니 이제 스스로 삶의 의미를 부여하는 존재가 출현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초인이 등장했다는 거군요. 결국 이 생이 중요하니 저 너머를 바라보지 말고 여기에 발을 붙이고 살라는 말을 하고 싶었군요. 니오는…
니오: ‘모든 신은 죽었다. 이제 우리는 초인이 등장하기를 바란다.’
지오: ‘신은 죽었다. 이제 우리는 초인이 살게 되기를 바란다.’
니오: 이러한 초인이 바로 대지의 뜻이오. 여기서 대지는 지상과 인간의 몸을 모두 의미하지요. 신이 살아있을 때는 ‘대지’, 즉 ‘지상’과 ‘몸’은 경멸의 대상이었잖소. ‘지상’은 ‘하늘나라’의 그림자일 뿐이기 때문에 경멸받았고, ‘몸’ 또한 ‘영혼’에 밀려 취급할 가치가 없는 것으로 경멸받았지요. 그러나 신 죽음 이후에는 이원화되었던 세계가 하나로 합쳐지면서 인간에게는 오직 ‘지상’과 ‘몸’만이 남게 된 겁니다.
지오: 이제 인간이 충실해야 하는 건 저 하늘나라가 아니라 이 지상이라는 거지요? 그래서 초인은 폄하되고 부정되었던 이 지상을, 이 대지를 최고의 가치척도로 생각한 거고요.
니오: 초인은 신이 살아있을 때처럼 이 지상을 ‘부정의 대상’으로 생각하지 않아요. 그래서 ‘대지의 뜻’이라는 말이 성립되는 겁니다. 차라투스트라도 ‘대지에 충실하라!’고 명령한 거고. 하늘나라에 대한 희망을 말하는 자들을 믿지 말라고…
지오: 니오는차라투스트라의 그런 명령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초인이 아닌 말종( 末種) 인간의 삶을 택한다는 게 슬픈 거죠? 더 이상 자기 자신을 극복하지 못하는 자, 각자 현실에 안주하며 몸과 마음의 평안만을 찾는 그런 말종 인간을요.
니오: 그렇소. 그들은 내가 인간의 힘을 약화시킨다고 했던 그 ‘동정’만을 행하고 있으니… 참… 뭔가 상승하고자 하는 ‘힘에의 의지’도 없고…
지오: 그래도 말종 인간은 차라투스트라에게 다가와 말하잖아요. ‘우리는 행복을 찾아냈다’고. 그럼 된 거 아닌가? 그들이 행복하다는데…
차라투스트라가 구상하는 인간 유형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생각한다: 그 인간은 그럴 수 있을 만큼 충분히 강하며-, 그런 현실에서 소외되지도 멀리 떨어져 있지도 않다. 그는 그 현실 자체이며, 현실의 끔찍하고도 의심스러운 모든 것을 자기 내부에도 가지고 있다. 이렇게 해서야 인간은 위대해질 수 있는 것이다(이 사람을 보라-왜 나는 하나의 운명인지).
니오: 초인은 스스로를 경멸하며 그것을 자기 발전의 기회로 삼는 인간형이오. 그러나 말종 인간은 더 이상 스스로를 경멸할 줄 모르는 인간, 나아감 없는 인간, 힘에의 의지가 상실된 인간, 즉 추해진 인간일 뿐이오. 그래서 차라투스트라가 한탄한 거요. ‘슬프다! 인간이 더 이상 별을 낳지 못하는 때가 오겠구나! 슬프다! 자기 자신을 더 이상 경멸할 줄 모르는, 경멸스럽기 그지없는 인간들의 시대가 오고 있다!’
지오: ‘경멸’이라는 단어가 쪼끔 거슬리긴 하지만.. ㅎㅎ 초인은 그런 말종 인간과는 반대로 절대적인 가치로부터 나오는 삶의 목표와 의미에서 벗어나 ‘자신이 설정한 삶의 목표’를 척도로 모든 것의 가치와 의미를 평가하는 평가자이며 창조자가 된다는 건 맘에 드네요. 주체적인 삶을 산다는 거니까. 니오는 우리가 다 그런 초인과 같은 사람이 되길 바라는 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