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다운 것을 찾아서

지난날을 돌아보니 여럿이서 모여 뭔가를 결정할 때 내 의견을 관철시켰던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식사 메뉴를 정할 때도 만날 장소를 정할 때도 나는 늘 다수의 의견을 따르는 편이었다. 있는 듯 없는 듯 그저 조용히 존재감 없는 사람으로 늘 묻어가기를 바랐다. 굳이 나까지 나서서 선택지 하나를 더 늘릴 마음이 조금도 없었다. 나는 특별히 좋은 것도 그렇다고 못 견디게 싫은 것도 없었다. 그냥 모두가 좋으면 나도 좋았고 다들 반대하면 딱히 내 취향을 고집할 필요도 느끼지 않았다. 다 좋으면 좋은 거지 했다. 그게 나였다. 

그런데 가만히 나를 들여다보니 또 다른 나도 있었다. 강자 앞에서의 나다. 누군가를 제압하고자 스스로 강자라 여기는 사람들 앞에서는 죽어도 고개 숙이기 싫었다. 그들에게 나는 완고했다. 특히 내 공부와 일에 있어서만큼은 강한 자존심과 절대 타협하지 않는 반골기질로 무장했다. 어쩌면 이것이 실은 내가 진짜 원했던 나의 모습이 아니었을까. 하지만 이런 ‘나’는 일상에서는 늘 억압된 채로 좀처럼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이 길보다는 인내하며 조용한 나로 사는 게 더 편했다.

말 잘 듣는 아이, 묵묵히 제 할 일 열심히 하는 학생, 웬만하면 타인에게 맞춰주는 무난한 어른, 남편과 아이들에게 잔소리 안 하려고 노력하는 가정주부, 성격 강한 시어머니랑 한 집안에서 모녀처럼 잘 지냈던 큰며느리. 이렇게 적어 놓고 보니 나를 정의하는 수식어들이 어째 다 맹해 보인다. 내 삶의 모습이 저렇게 무색무취였구나. 내 목소리라곤 비집고 들어설 곳 없는 아주 꽉 막힌 답답이였구나. 순간 헛웃음이 났다. 저런 모습으로 살아왔다면 어쩌면 제대로 된 ‘No’는 내 사전엔 ‘있어도 없는’ 단어였을 수도 있었겠다. 

언제부턴가 현대인의 병든 마음을 치유하는 심리상담 관련 책들이 유행하면서 착하게 사는 건 미덕이 아닌 게 되었다. 그토록 오랫동안 나보다는 타인을 먼저 배려하는 이타적인 삶을 가르치던 유교전통이 완벽하게 전복된 것이다. 착한 건 자신의 삶을 온전히 사랑하는 게 아니란다. 그러니 자신을 사랑하고 남에게 인정받으려는 마음을 버리란다. 착하게 살려는 사람에겐 이제 자연스럽게 질타가 들어온다. 그렇게 살지 말라고. 

이런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그동안 나보다는 남을 먼저 생각하며 사는 게 옳다고 믿고 살아온 삶이 부정당하는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내가 삶을 잘못 산 걸까 되묻게도 된다. 최선을 다해 살았다고 자부했던 삶이 부끄럽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나만 조금 참으면 모두가 좋으니까 그 길을 선택한 것뿐인데 그게 나 자신을 사랑하지 않은 나쁜 삶이었단다. 문득 ‘좋은(Good)’과 ‘나쁜(Bad)’의 기준이 뭐냐고 반문하고 싶어 졌다(알고 보니 그건 거창한 철학적 질문이었다). 그저 내 가슴이 시키는 대로 소신껏 산 것뿐이라고 강변하고 싶은 나는 조금 억울했다.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진 덕분에 내 머릿속에도 참 많은 생각들이 담기는 요즘이다. 억울한 내 인생을 보상이라도 받고 싶었던 걸까? 사회적 거리두기로 인해 시간은 넘쳐나고 할 일은 없으니 괜스레 내 안의 나를 소환해서 말을 걸어본다. “네가 좋아하는 것 몇 가지만 얘기해볼래?” “네가 싫은 건 뭐야?” 그리고 곰곰이 생각이란 걸 해본다. 내가 뭘 좋아하더라. 싫어하는 게 뭐지? 근데 잘 모르겠는 거다. 나도 분명 나만의 뭔가 취향이라는 게 있을 텐데 말이다. 금방 떠오르는 게 이렇게 없다니 나름 충격이다.

그래서 내가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 리스트를 작성해보기로 했다. 이것만큼 나다운 걸 찾는 쉬운 방법은 없을 테니까. 몇 가지 적고 나니 금세 밑천이 떨어졌다. 귀찮은 일이긴 했지만 포기하지 않고 끊임없이 고민했다. 신기하게도 리스트업 과정이 지속될수록 조금씩 내 모습이 구체화되는 게 보였다. ‘그래, 내가 이런 걸 좋아했었지. 맞아, 나 그런 사람 싫어했었어. 그런데 싫다는 표현은 못하고 살았구나. 이제는 좋은 건 좋다. 싫은 건 싫다고 말하는 내가 될 수 있을까? 내가 만약 ‘No’를 외친다면 평소 입에 ‘No’를 달고 사는 사람의 그것과는 분명 그 무게부터 다를 텐데.’ 이렇게 나 자신과 솔직한 대화를 나누며 마음속에 숨겨둔 말들을 하나하나 글로 적어보았다. 그랬더니 또 다른 욕심 하나가 스멀스멀 고개를 쳐들었다. 용기 있게 말하고 그 무게감에 걸맞게 책임질 수 있는 나로 살고 싶어 졌다. 그럴 수 있을 것 같았다.

분석심리학자 칼 융(Carl Gustav Jung)은 ‘자기(self)’를 찾는 것이 우리 삶의 목표라고 했다. 의식의 ‘자아’가 무의식의 ‘자기’를 찾아 떠나는 여행이 바로 삶이라는 것이다. 융은 사회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젊은 시절에는 어쩔 수 없이 ‘페르소나’라 부르는 다양한 가면을 쓰고 살아갈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중년이 어쩌면 ‘자기’를 찾아 떠날 좋은 기회일 수 있다는 거다. 그렇구나. 물론 좀 더 일찍 자각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중년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나 역시도 지금 이런 고민을 하고 있지 않은가. 이것이야말로 융이 말하는 진정한 자기실현의 과정이지 싶다. 그러기 위해서는 대담하게 마음의 문을 열고 나 자신의 무의식과 대면해야 한다. 페르소나를 과감히 벗어던지고 그 속에 감춰진 자기를 들여다볼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진짜 자기를 만날 수 있는 거다. 

인생의 반환점을 막 돈 이 시점에 나는 ‘자기(self)’를 찾아가는 길 위에 섰다. ‘나는 나’라고 말할 수 있기 위해 내가 어떤 사람인지 하나씩 확인해가는 중이다. 그러고 보니 나답게 사는 게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짜장이냐 짬뽕이냐?”에서 나의 선택을 확실하게 말하는 이 단순한 것부터 시작하는 거더라. 내가 좋아하는 것엔 ‘Yes’, 내가 싫어하는 것엔 ‘No’를 말하는 것이 나로 사는 길의 첫걸음이었다. 이 간단한 걸 이제야 자각한 내가 안쓰러워야 할 테지만 지금이라도 바꿔보려고 노력하는 내가 대견하고 감사하다. 생각해 본다. 내가 좀 더 일찍 이런 시도를 했더라면 내 인생이 달라졌을까? 아닐 것이다. 지금 이 순간, 바로 여기에 이렇게 홀로서기 위해서 나는 그 길을 뚜벅뚜벅 걸어왔어야만 했으리라. 그동안도 나는 잘 산거다. 앞으로는 더 잘 살자. 오롯이 나로. 그러면 된다.

4 thoughts on “나다운 것을 찾아서”

  1. 그럼요..우리가 살아온 모든 날은 다 귀하고 우리는 최선을 다한거 아닌가 해요.. 어제 신문은 내가 못 고치지만 내일신문은 내가 쓸수있지않을까 합니다.. 언제나 존경합니다. 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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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어제 신문은 못 고치고 내일 신문을 내가 쓸 수 있다. ㅎㅎ
      그래요. 내일 신문을 오늘도 저는 열심히 쓰고 있습니다. 이렇게 ~^^
      늘 따뜻한 말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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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모든게 무너져 있는 나의 삶.
    이 무기력한것들을 어찌 일으켜 세워야 할지 무던히도 노력하고 있지만 잘 안되네요. 중년의 나이에 들어서 나에게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것인지
    아무것도 할수 없는 무기력함에 참 슬퍼지는 시간들…
    그래도 선생님의 글을 읽으며 힘을 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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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선화님~^^ 제가 가장 잘했던 게 무기력에서 헤매기였어요.
      그 안에서 참 많은 날들이 슬펐구요. ㅠ
      그런 시간이 영원할 줄 알았고 그래서 더 절망했던 저의 모습을 떠올리게 되었네요.
      수선화님의 이 글을 읽으면서요.
      흔적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시간 속에서 무던히 애쓰고 계신 선생님께 제 어깨 내어드리고 싶어요.
      저 힘들 때 선배언니가 양동근의 ‘어깨’라는 노래( 비긴 어게인에서 부른 영상)를 보내줬는데..
      그때 얼마나 위로가 되고 눈물이 나던지요. ㅎ 오늘 밤에 잠들기 전에 수선화님도 그 영상 한 번 찾아서 보세요.
      가사에 귀기울이면서 한 번 들어보세요~
      아셨지요? ㅎ 저랑 약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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