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로 산다는 것.

햇살이 참 좋은 오후였다. 논문 마감을 맞추느라 전쟁 같았던 지난 한 달여의 시간을 지나 오랜만에 여유로운 마음으로 찾은 교정. 나무벤치에 앉아 여기저기 무심하게 주위를 둘러본다. 조금씩 섬세하게 변하고 있는 초록 세상. 나무 위의 초록은 다양한 빛깔을 드러내며 색상 차트의 부채꼴 모양으로 펼쳐져 있다. 이 나무들을 보고 있노라니 내 몸이 건강해지고 충만해지는 느낌이다. 10월의 녹색 향연은 봄과는 또 다르다. 눈이 시리도록 푸른 나무들 속에 내 얼굴을 묻고 그들의 맑은 기운을 내려받고 싶은 충동이 나를 유혹한다. 

오늘은 강의가 없는데도 나를 보겠다고 찾아온 후배와 이런저런 사는 이야기를 나눴다. 후배가 유난한 딸내미로 인해 맘고생이 심하다는 걸 처음 알게 되었다. “엄마 되는 게 왜 이리 힘든지 모르겠어요. 언니. 그냥 도망치고 싶을 때가 많아요.” 성격이 예민해서 학교생활에 적응을 못하는 딸 문제로 오후에 담임선생님을 만나야 한단다. 동생이면서도 때로는 언니처럼 차분하게 내 얘기를 들어주던 후배에게 이런 마음의 그늘이 있었다니 순간 많이 미안해졌다. 나 역시도 우리 아이들의 예민한 성격으로 인해 고생했던 경험이 있었던 지라 그 아픔의 크기가 그대로 전해져 와 눈물이 났다. 마음의 감기가 찾아온 아이들을 위해 한동안 내 일을 모두 접고 아이들의 엄마로만 살아가리라 마음먹었던 적이 있었으니까. 

내 경험을 바탕으로 여러 가지 조언도 해주고 그러다가는 한참을 후배의 넋두리를 그냥 묵묵히 들어만 주다가 헤어졌다. ‘엄마로 산다는 것’에 대해 새삼 다시 생각하게 하는 밤. 내가 엄마로서 가장 힘들었던 시기에 썼던 육아일기를 꺼내 읽다가 문장 하나를 발견했다. 

‘부자는 속도의 덫에 걸리고, 빈자는 제도의 덫에 걸린다.’ 

부자인 엄마가 속도의 덫에 걸려 빨리빨리 이것저것 아이에게 시키는 데만 급급하면 아이는 평생 부자로 살지 못할 것이며, 엄마가 ‘이것은 이래서 안 돼 저래서 안 돼’ 하는 제도의 덫에 걸리면 아이는 평생 빈자로밖에 살 수 없다는 것이다. 내가 그때 이런 말들을 가슴에 새기며 아이들과 함께 했었구나. 새삼 그 시절이 주마등처럼 스치며 언젠가 신문에서 읽었던 중동지역의 경제전문가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경제는 말, 정치는 마차. 마차가 말을 끌면 안 돼.” 

아이는 말이고 엄마는 마차가 되어야 한다는 의미로도 행간을 읽을 수 있는 문장이다. 그렇다. 우리 엄마들만 모르는 너무도 당연한 진리다. 아이가 말이 되어 마차를 끌게 해야지 마차인 엄마가 앞에서 말을 마음대로 끌어선 안 되지 않을까. 아이들이 ‘자기 세계’를 가질 수 있게 하려면 앞에서 내 욕심대로 이끌기보다는 뒤에서 마차가 되어줘야 한다. 짐도 실어주고 피곤할 땐 잠시 쉴 수 있는 공간도 마련해주는 그런 엄마가 되어야 한다는 얘기다. 

뉴욕항으로 흐르는 허드슨 강 입구에 위치한 리버티 섬에 세워진 조각이자 건축물의 요소도 갖춘 자유의 여신상은 미국의 독립을 기념하는 의미로 프랑스가 보내준 선물로 유명하다. 이 조각상의 작가는 자신의 어머니를 모델로 이 여인상을 조각했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많은 예술가들은 다양한 이유들로 자신의 어머니를 화폭에 혹은 글 속에 담았던 것 같다. 그 덕분에 세상의 어머니들은 그림 안에서 때로는 늙고 지친 모습으로, 때로는 더없이 인자하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형상화되곤 했다. 

그 어떤 모습으로 그려졌든 간에 어머니의 초상은 그 자체만으로도 깊은 호소력을 지니는 것 같다. 작가는 인간이 그토록 갈구하는 자유가 바로 모든 이들의 안식처이자 조건 없는 아가페적 사랑을 실천하는 어머니라는 존재를 통해 이 땅에 구현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 여신상을 조각한 것은 아닐까. 

단테에게는 다정한 스승이었고, 존 싱어에게는 자녀의 재능을 가장 잘 아는 존재였으며, 조르주에게는 언제나 훌륭한 대화 상대였던 어머니라는 존재가 내 아이들에게는 어떤 모습으로 기억될까 궁금해졌다. 그러면서 좀 더 노력하면서 살아야 할 것 같은 실체 없는 두려움과 함께 막중한 책임감이 엄습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