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이 그동안 보여준 모습에서 얼마 전 읽었던 책 ‘팩트풀니스(factfulness)’에서 저자 한스 로슬링이 말한 인간의 본능 10가지가 오버랩되었다. ‘팩트풀니스’의 한국어 번역은 ‘사실 충실성’으로서 팩트에 근거한 사고법을 의미한다. 이 책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세상을 명확히 이해하고 있는가?”
저자 한스 로슬링은 스웨덴의 통계학자이자 의사이며 세계 보건기구에서 활동한 저명한 학자다. 그는 인간이 갖고 있는 극적 본능으로 인해 우리는 세상을 왜곡해서 이해하고 과도하게 극적인 세계관을 형성한다고 말한다. 인간 본유의 10가지 본능이 우리로 하여금 사실과는 동떨어진 프레임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하고 그 프레임으로 바라본 세상이 수많은 오류의 기반이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본능의 배후에는 바로 언론이 있다고 지적한다.
나는 이 지적에 동감하며 우리 언론이 지금까지 얼마나 사실 충실성에 입각한 보도를 해왔는지를 생각하다 깊은 한숨만 남았다. 정말 씁쓸하고 슬픈 현실이 아닐 수 없다.
한스 로슬링이 말하는 첫 번째 본능은 간극 본능이다. 사람들이 양극단의 것들만 보려는 본능에 의해 이분법적 세계관에 빠지게 된다고 한다. 즉 우리는 별다른 생각 없이 양극단으로 나누어 세상을 바라보는데 간극 사이의 것들도 충분히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브라질의 경우, 상위 10%가 전체 소득이 40%를 차지한다고 한다. 이것은 팩트다. 하지만 언론이 그 상위 10% 삶의 모습을 다 보여주지 않고 상위 0.1%의 화려한 삶만을 보도함으로써 사람들은 브라질을 왜곡되게 바라보게 된다.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브라질의 정확한 통계는 말해준다. 브라질은 중산층이 탄탄하고 꽤 살기 좋은 나라이며 점점 더 발전하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간극 본능에 휘둘리지 않고 다수의 사람이 어디 있느냐를 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저자는 말한다. 양극단을 차지하는 소수가 아닌 간극을 채우고 있는 다수를 본다면 세상을 좀 더 정확하고 다르게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언론이 또 교묘하게 이용하는 것이 바로 인간의 ‘공포 본능’이다. 사람은 별 것 아닌 상황에서도 공포를 느낄 수 있고 극단적인 공포 속에서는 사실규명을 분명하게 할 수 없다. 예를 들어 보자. 비행기 사고로 죽을 확률은 자동차로 죽을 확률의 65분의 1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비행기 사고를 더 무서워한다. 그것은 언론의 영향이 크다. 크고 무서운 사건들만 선별해 보여주는 언론으로 인해 사람들은 비행기 사고로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죽는다고 믿는다. 사실은 그렇지 않다.
여기서 주는 메시지는 우리 머릿속이 공포에 사로잡혀 있으면 사실이 들어올 틈이 없다는 것이다. 언론은 사람들의 공포 본능을 이용하고자 하는 욕구를 억제하기 어렵다. 사람들의 주의를 사로잡는 데는 공포만 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주요 뉴스의 이면을 제대로 들여다볼 필요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바로 우리에게 존재하는 공포 본능이 이 세계를 바라보는 시각을 어떻게 왜곡하는지를 언론은 너무도 잘 알고 있는 것이다.
또 하나의 중요한 것이 바로 ‘비난 본능’이다. 2015년 작은 고무보트에 몸을 싣고 유럽으로 향하던 시리아 난민 4천 명의 시신이 유럽 해안으로 떠내려 온 일이 있었다. 이때 유럽인들은 밀입국을 알선한 업자들을 비난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사실을 들여다보면 문제는 유럽 이민정책에 책임이 있다. 즉 시스템이다. 난민을 태운 배는 입국 후 무조건 압수되는 유럽의 시스템 하에서 알선업자들은 좋고 큰 배를 압수당하지 않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작고 위험한 고무보트에 태울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바로 그 참사 원인의 팩트다.
사람들은 문제의 본질보다는 우선 비난할 사람을 찾는 본능이 있으며 그것을 부추기는 것이 언론이라는 것이 바로 조국 전 법무부 장관 사태에서 잘 드러났다고 본다. 조국 전 장관의 자녀 입시부정 사건 보도를 접한 시민들이 그 당시의 입시제도라는 시스템을 한 번 돌아봤더라면 어땠을까? 그래도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분노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언론이 바로 그 불특정 다수의 분노를 끌어내는 트리거 역할을 한 것이다. 사건의 원인에 대한 사실규명보다는 마녀사냥 식으로 자극적인 표현을 써가며 검증되지 않은 보도를 경쟁하듯 쏟아냈다. 거기에 검찰의 ‘다급함 본능’이 더해져서 정경심 교수 기습 기소라는 시나리오가 완성되었던 것이다. 9월 7일 서울 중앙지검 특수 2부는 전날 오후 10시 50분쯤 사문서 위조 혐의로 불구속 기소했다고 발표했다. 검찰은 사문서 위조 공소시효가 6일 밤 만료되는 것을 감안해 그전에 정경심 교수에 대한 사법처리를 결정한 것이다.
저자는 인간은 다급한 상황을 만났을 때 너무나도 비합리적이고 멍청한 결정을 내린다고 했다. 다급한 본능의 포로가 되는 순간 비판적 사고를 하기보다는 빨리 결정하고 당장 행동해버리고 마는데 그건 대개 사실이 아니다. 매사에 우리는 침착하게 정확한 사실에 입각하여 세계를 바라봐야 함을 절감하게 되는 부분이다.
‘팩트풀리스’는 인간의 이러한 본능으로 인해 오늘날 사람들이 이 세상을 실제보다 더 무섭고 더 폭력적이며 더 희망이 없는 곳으로 인식한다는 점을 지적한다. 즉 부정적 세계관에 갇혀있다는 주장이다. 이 말을 달리하면 사람들은 과도하게 극적인 세계관 속에 살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사실에 입각하여 세계를 본다면 엉터리 정보에 스트레스를 받지 않아도 된다고 말한다. 그리고 세상은 그렇게 겉보기만큼 극적이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세계를 오해하지 않고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언론의 보도를 판별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야 한다. 언론에서 무차별적으로 양산해내는 보도에 매몰되어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우매한 시민이 되어서는 안 된다. 늘 깨어있는 시민으로서 언론이 팩트에 충실한 보도를 하고 있는지 얼마나 신뢰할 수 있는지 비판적인 시각으로 날카롭게 체크해야 한다. 그럴 때에라야 우리가 그토록 바라는 언론개혁이 느리게나마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동력을 얻는 것이다.
사실 충실성은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아무리 사소하고 느린 변화라도 조금씩 쌓이면 큰 변화가 된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이다. 점진적으로 꾸준히 일어나고 있는 사회의 변화를 거대한 혁신적 변화의 물결로 만드는 것은 바로 우리 시민 개개인의 자각에 달려 있다. 세상을 사실 그대로 바라보지 못하게 하는 모든 본능을 억제하고 좀 더 이성적으로 사고하고자 노력하는 순간, 더디지만 우리가 원하는 변화는 일어나게 된다. 그게 검찰개혁이든 언론개혁이든 반드시 가능해진다.
‘팩트풀리스’라는 이 책을 통해 저자 한스 로슬링이 하고 싶었던 말은 이 세상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그렇게 절망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우리가 정확한 팩트와 통계를 통해 세계를 이해하면 이 세상은 충분히 살만하고 지금보다 더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그렇다. 언론에서 쏟아내는 팩트와 무관한 무분별하게 보도되는 정보에 현혹당하지 않을 수 있다면 우리는 쉬이 분노하지 않고 차분하게 현실을 직시할 수 있다. 그 힘으로 꿋꿋하게 버티다 보면 우리가 사는 이 사회도 언젠가는 올바로 가고 있다고 느끼게 되는 그날이 올지도 모른다. 희망을 버리기엔 이 세상이 너무 괜찮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