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_처음 뵙습니다. 프리드리히 니체!

니체와의 토리노 데이트 3

지오: 처음 뵙습니다. 프리드리히 니체.

니체: 나를 아시오?

정직하게 불쑥 내민 손에 살짝 당황한 사내의 흰 손이 찰나의 방황을 마치고 어색하게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그의 입에서 힘없이 미끄러진 첫 물음에 거침없이 답하는 진격의 그녀.

지오: 아오. 그런데 귀하는 나보다도 방금 내가 건넨 그 말에 더 놀란 것 같소. 귀하의 눈동자가 지금 묻고 있구려. 방금 내가 했던 그 첫마디가 궁금하오? 

니체: 그 말을 그대가 어찌?

지오: 귀하가 한때 사랑했던 푸른 눈의 여인, 루 살로메와의 첫 만남에서 귀하가 그녀에게 건넸던 인사말을 내 한 번 따라 해 본 거요. 불편하게 했다면 용서하오. 다른 뜻은 없으니. 그저 귀하에게 말 걸기가 쉽지 않을 듯하여 내 딴엔…

니체: 깜짝 놀랐소. 덕분에 내 정신이 번쩍 들었소만. 이렇게 맑은 정신은 정말 오랜만이고. 그런데 뉘신지?

개의치 않는다는 듯 누구냐고 묻는 것으로 화제를 돌려주는 그가 고맙다. 그녀는 다시 용기를 내본다. 니체와의 역사적 만남에 가슴은 두근거리고 정신은 혼미했지만 시침 뚝 떼고 천연덕스럽게 자신을 소개하기 시작했다.

지오: 이제야 내가 누군지 궁금한가 보오? 그래도 귀하가 정신이 돌아왔다니 기쁘오. 그럼 내 소개도 들어보겠소? 지오라고 하오. 만나서 반갑소. 한국에서 온 ‘귀하의 독자’라고 이해하면 쉬울 거요. 글 속에서 늘 잘난 척하고 쓴소리 입에 달고 사는 까칠한 철학자를 직접 보고 싶었는데… 무엇이든 바라면 이루어지나 보오. 내 생이 몇 바퀴 돌았는지는 모르나 포기하지 않고 돌다 보니 여기까지 왔소. 내 사는 시대에서 조금 뒤로 날아오긴 했소만 이곳 토리노로 진짜 오게 될 줄은 몰랐소. 

니체: 내가 까칠하오?

역시 그다웠다. 그녀의 입을 통해 흘러나온 그 수많은 단어들 중에 그에게 꽂힌 말은 단지 ‘까∙칠∙한’이었다. 초롱한 눈으로 외계어 같은 알 듯 모를 듯한 그녀의 자기소개를 듣는 그 짧은 순간에도 남자의 표정은 여러 번 요동쳤다. 예민하기 그지없는 사내 앞에 홀연히 나타난 이 묘령의 여인, 충분히 그럴 만했다. 그녀는?? 최소한 겉으로는 지극히 초연해 보였다.

지오: 망치를 들고 여기저기 깨부수고 다니는 자를 까칠하다 한 게 뭐가 잘못됐소? 귀하는 어찌 그리 하고 싶은 말을 다 하고 살 수 있는 게요? 다들 할 말이 있어도 가슴에 품었다만 마는데 말이오. 그것도 능력이오.

허허. 이 여인, 사내는 만나자마자 자신을 까칠이라 부르는 이 여인이 궁금해졌다. 낯선 이에 대한 경계가 호기심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그는 어인 일인지 금방 무장해제되어버린 자신의 마음에 갸웃하면서도 말투는 여전히 새침하게 툭 던졌다.

니체: 못할 게 뭐요? 할 말은 꼭 해야 하는 성미라. 그게 어쨌단 말이오. 보자마자 나를 혼내는 그대가 한 수 더 위요.

지오: 그래서 좋다는 뜻이오. 부럽다는 얘기고. 귀하의 말들은 때로는 정곡을 찔러서 아프지만 그래서 생각이란 걸 하게 한다오. 이 세상의 너무도 당연하고 자명하던 것들이 결코 당연한 게 아님을 귀하에게서 배웠소. 모든 가치를 전복시킨 귀하의 철학은 위험하지만 그만큼 매력 철철이오. 우리가 알고 있는 가치판단의 기준 자체를 해체한 거요. 귀하는 모르겠지만 지금 내가 살고 있는 후기 현대사회의 다양한 분야에서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오. 귀하의 철학이 말이오.

그의 얼굴이 드디어 환해졌다. 삐딱하게 뒤로 기대고 있던 몸을 앞으로 곧추세우며 그가 웃었다. 그 오만하던 사내는 온데간데없고 칭찬받고 의기양양해진 아이만 남았다. 그 모습이 너무도 해맑아서 그녀도 그만 따라 웃었다. 그때, 한층 유쾌해진 그의 목소리가 귓가를 가볍게 두드렸다.

니체: 하하, 정말이오? 내 생각을 이해해주는 이를 만나다니 마음이 좋소. 요즘 부쩍 우울하던 참인데 그대 덕분에 내 기분도 명랑해졌소.

지오: 그럼, 오늘 이상한 나라에서 날아온 이 정체 모를 여인과 동무를 해주겠소? 궁금한 것이 참 많소. 대답해 주겠소? 내 여기까지 왔는데…

니체: 궁금한 게 뭐요. 사람들과 대화를 한 지가 언젠가 싶소. 뭐든 물어보시오. 나도 오랜만에 얘기 나누고 싶으니.

그는 확실히 생기를 되찾은 느낌이었다. 이제 더 이상 그 누구와도 제대로 된 대화가 이루어질 수 없을 거라 예단했던 그녀가 틀렸음을 그가 눈앞에서 증명해주고 있었다. ‘다행이다’ 싶은 안도감보다 낯선 이방인을 흔쾌히 받아주는 그의 쿨한 태도에 감동한 게 먼저였다. 하지만 그 마음을 들키지 않으려 그녀는 다른 곳으로 얼른 시선을 돌렸다. 그렇게 잠시 갈 곳 잃고 헤매던 눈동자는 다시 슬쩍 원위치로 회귀했다. 그러고도 한참을 지긋이 그를 바라보던 그녀는 뭔가 결심한 듯 진지해진 표정으로 말을 꺼냈다. 

지오: 음… 한 가지 부탁이 있소. 오늘 하루 우리가 동무하는 동안은 귀하를 ‘니오’라고 불러도 되겠소? 니체, 니체 하기 부담스러워 그러오. 귀하 이름이 우리에겐 그리 편한 이름도 아니고. 내 사는 곳에서 니체랑 동무했다고 하면 사람들이 웃소. 또 굳이 이유 하나 덧붙이자면, 내 어릴 적 소꿉친구랑 놀 때 우리는 서로 둘만 아는 이름으로 부르곤 했다오. ‘금지, 은지’ 뭐 이런 식으로 말이오. 조금 유치해도 더 재밌어 보이지 않소?

니체: 더 재밌는 건 모르겠고, 뭐 원한다면 그렇게 하시오. 난 상관없으니. 내가 아이들 놀이를 좋아하기도 하고. 근데 왜 ‘니오’인지 그 이유나 압시다. 전공은 못 속이나 보오. 난 늘 이름이든 뭐든 그 어원이 궁금한 사람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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