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_프롤로그: 만남

니체와의 토리노 데이트 2

토리노의 겨울은 음울했지만 또 황홀했다. 사보이 왕가의 수도였던 이곳, 토리노는 그 귀족적 정체성을 뽐내기라도 하듯 태생적 우아함 속에 진지함이 곳곳에서 묻어나는 그런 도시였다. 한 번쯤은 꼭 와볼 만한 그런, 소란스럽고 분주한 일상으로부터 느긋하게 잠깐만이라도 시간을 벗어나 살고 싶은 누구라도 딱 살기 좋은 그런.

오늘보다 더 아름다운 날은 없으리만치 이른 새벽부터 공기는 맑고 부드럽고 힘에 넘쳤다. 마치 우리도 모두 그래야만 한다는 듯이. ‘무미건조하고 비겁한 세계일 수 없는’ 이 도시, ‘고요하고도 귀족적인 토리노’에서 날이 일찍 밝았고 모든 것이 신선했다. 이탈리아 북서쪽 눈 덮인 산봉우리로부터 바람에 실려 온 산뜻함이 토리노의 대기 속에서 고스란히 느껴졌다. 깔끔하게 정돈된 광장 곳곳에는 분수대와 조각상들이 고풍스러운 자태를 뽐내고 있었고, 연노랑 바탕에 적갈색 테라코타의 질감에서 오는 매트함이 어우러진 건축물에선 도시의 고결한 품격이 묻어났다. 

이런 산뜻한 공기 속에서라면 끝없이 걸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녀는 네이비블루 정장에 진회색 루즈핏 코트를 걸쳐 입고 발목 위로 살짝 올라간 바짓단에 어울리는 브라운 앵클부츠를 신고 있었다. 전체적으로 엄숙함과 완고함을 연상시키는 차분한 색상에 보랏빛 머플러로 포인트를 준 그녀의 연출은 그냥 무리 속에 묻어가기에는 아까운 차림새였다. 세기의 철학자를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다행히 고요한 새벽, 차가운 바람 속에 오롯이 혼자 걷고 있는 그녀, 진지하고 교양 있는, 대체로 온화하지만 약간은 고집스러운 철학자를 만나러 가는 자의 모범답안이 있다면 이런 모습일까.  

과거와 미래, 그리고 현재가 공존하는 토리노의 1월, 홀로 아침놀 속을 걷는다. 존재는 유한한 시간을 살지만 그 찰나는 곧 영원이다. 시작도 끝도 없이 동그라미를 그리는 반복 속에서 현재는 흘러가는 순간들이 아니라 영원 그 자체다. 영원회귀의 수레바퀴 위에 놓인 삶의 조각으로 그렇게 돌고 돌아 여기에 섰다. 골목길 사이사이 고즈넉한 풍경 위로 흐르는 오롯한 레트로 감성이 시린 가슴을 감싼다. 

무심코 올려다본 토리노의 하늘, 어느새 시야를 방해할 정도로 강해진 아침햇살에 잠시 눈을 감아본다. 그때 아스라이 들려오는 지적이고 우아하되 깊은 슬픔을 잉태한 어느 고독한 부름에 이끌려 이내 골목 사이로 비치는 햇빛 속으로 한 걸음 더 내딛는다. 

아침놀은 때론 울음일 때가 있다고 했던가. 저기 그 울음이 되어버린 사내, 그가 있다. 카를로 알베르토 광장 6번지에 위치한 하숙집 3층 소파에 웅크리듯 앉아 누가 봐도 환자인 핼쑥한 얼굴로 창밖만 멍하니 응시하고 있는 그. 평생 근시에 시달렸던 니체는 그렇게 늘 멍한 눈빛으로 세상을 바라보았으리라. 고갯짓조차 하지 않고 맥없이 바깥 풍경을 바라볼 뿐인 그는 방금 전까지 또 디오니소스에게 편지를 쓰고 있었나 보다. 문을 열고 들어설 때 그녀를 바짝 뒤따라온 찬바람에 그의 손에 들려있던 종이 한 장이 나비처럼 허공을 날아 그녀 발 앞에 사뿐히 내려앉았다. 마치 먼 데서 온 이 손님을 환대하는 의식으로 착각될 만큼 절묘한 타이밍이었다. 초대장을 영접하듯 《디오니소스 송가》라고 씌어진 그 하얀 종이를 집어 다시 그의 손에 쥐어주며 그녀가 인사를 건넸다. 

지오: “우리는 어느 별에서 내려와 여기 서로에게로 떨어진 것일까요?” 

방금 전까지도 초점 없이 허방을 헤매던 그의 눈동자가 순간 반짝하고 빛났다. 열정 따위는 사라진 지 오래인 그 청회색 눈동자는 어느새 그녀에게 묻고 있었다. 불쾌해하는 기색은 없었다. 그저 알 수 없는 이 상황이 뭔가 싶고 자신이 방금 들은 말이 왜 이 불청객의 입에서 나왔는지가 궁금할 뿐. 무감하게 늘어져 있던 그가 이리 반응하는 걸 보니 일단 그의 관심을 끄는 덴 성공한 듯 보였다. 그녀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머금고 그에게 한 발짝 더 다가가 손을 내밀며 악수를 청했다.

지오: 처음 뵙습니다. 프리드리히 니체.

4 thoughts on “2화_프롤로그: 만남”

  1. Oh my god!!!
    왜그렇게 샘을 보며 연극이 생각이 났는지.. 제가 늘 그 연극을 하거나 극단을 해야하는 분이라고 늘 말했었는데.. 이런거였군요..
    세상에, 이 참에 샘의 능력보다 이기적인 저는 저에게 이런걸 알려주는 영들에게 너무 놀랄수밖에..어떻게 이런걸 알았겠어요.. 너무너무 신기해요.. 우리의 대화를 누가 알수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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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Oh my god!!!
    왜그렇게 샘을 보며 연극이 생각이 났는지.. 제가 늘 그 연극을 하거나 극단을 해야하는 분이라고 늘 말했었는데.. 이런거였군요..
    세상에, 이 참에 샘의 능력보다 이기적인 저는 저에게 이런걸 알려주는 영들에게 너무 놀랄수밖에..어떻게 이런걸 알았겠어요.. 너무너무 신기해요.. 우리의 대화를 누가 알수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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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어? 왜 동일한 게 두 개 올라왔지? ㅎㅎ 참… 다른 채널로 이 블로그에 들어와 글을 읽고 댓글 달려고 하면 안 된다는 문의가 있던데…
      샘.. 댓글에 제가 뭘 설정해야 누구나 댓글 달 수 있는 걸까요? 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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