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체성’으로서의 ‘이름’

중학교 시절이었던가 고등학생 때였던가 기억이 확실하진 않지만, 그즈음 우리 여학생들 사이에서 엄청 유행하던 시가 있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 그는 다만 /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 그에게로 가서나도 / 그의 꽃이 되고 싶다. // 우리들은 모두 / 무엇이 되고 싶다. /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바로 김춘수의 ‘꽃’이라는 시다. 우리는 그 시절, 멋진 그림엽서에 또 색색깔의 편지지에 예쁜 글씨로 이 시를 적어 친구에게 주곤 했다. 그때부터였으리라. 나에게 ‘이름’이라는 것의 특별함이 각인된 게 말이다. 어린 마음에도 잘은 모르지만, 아무튼 ‘이름’은 그저 이름일 뿐인 게 아니란 걸, ‘의미 있는 어떤 것’이란 걸 어렴풋이나마 알게 된 거다.

그러다 대학생이 되어서야 그 ‘꽃’에 대한 철학적 의미를 이해하게 되었다. 저 시가 말하고자 하는 게 ‘꽃’이라는 사물과 언어의 관계라는 것을. 그리고 감각적 실체로서의 꽃이 아닌 관념이자 개념으로서의 꽃이란 걸 말이다. 좀 더 어려운 말로 하자면, 언어정체성의 문제와도 연결된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면, 언어정체성이란 무엇인가? 일단 ‘정체성’의 그 사전적 의미는 ‘변하지 않는 본질적인 속성, 혹은 그러한 성질을 지닌 독립적 존재’일 터다. 그리고 거기에 언어라는 단어를 더 얹으면? ‘언어로 표현되는 어떤 사물이나 개인이 갖는 고유하고 본질적인 변하지 않는 속성’이라 정의할 수 있겠다.

자, 여기서 고개를 드는 의문 하나!

정체성이란 정말로 변하지 않는 그 무엇일까?

아닌 것 같다. 언어정체성이란 본질적으로 변화하지 않는 것이라기보다는 상황이나 맥락에 따라서 변할 수 있다고 봐야 맞을 것 같다. 또 독립적이라기보다는 타인과의 상호작용 속에서 변화하는, 그야말로 관계적인 것으로 보는 게 맞을 것이고.

암튼… 저 ‘꽃’이라는 시가 말하고자 한 건, 결국 ‘꽃은 무엇인가?’라는 정체성에 관한 철학적 질문이었다는 거다.

그럼, 나의 정체성이란?

이제 본격적으로 ‘이름’의 문제로 넘어와 보자.

우리는 살아가면서 누구나 한 번쯤은 자기자신에게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해보았으리라. 그런데 이 질문은 그저 ‘자신’에게만 천착해서는 절대 답을 할 수 없는 테제다. 결국 내가 누구인가는 다른 사람과의 관계, 즉 앞서 언급했듯이 타인과의 상호작용 속에서만이 드러난다는 것이다.

나라는 존재의 정체성은 크게 개인적인 정체성과 사회적인 정체성으로 나눌 수 있다. 전자는 ‘무감한 나, 잘 웃는 나…’ 등등 개인의 성격, 성향, 특질 등에서 드러난다. 그럼 후자는 뭐냐? 어떤 집단이나 공동체에 소속되어 있는가에 관한 것이다. ‘한국인, 미쿡 사람, 하버드대 대학원생…’ 같은.

그러면 나의 이런 개인적이고 사회적인 정체성을 보여주는 언어적 표식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우리가 ‘나는 누구인가’를 논할 때 가장 처음 떠올리는 게 바로 ‘이름’이 아닐까? 그래서 난 지금 정체성으로서의 이름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리라.

뭐.. 고유 이름 석자뿐이랴. 예전 같으면 별명, 혹은 애칭…. 온라인에서 여러 개의 자아로 살아가는 요즘 같은 세상에서는 나를 대변하는 언어적 표지체가 얼마나 많을 것인가? 아, 맞다. 필명도 있네. 어떤 작가는 필명을 쓰는 이유를 이렇게 말하더라. 자연의 ‘나’와 작가인‘나’를 나누고 싶고 필명 뒤에 숨고 싶기 때문이라고.

영국의 작가 서머셋 몸은 ‘스스로를 되돌아보며 내 속에 여러 인격이 혼재되어 있다는 것을 깨닫고 깜짝 놀란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렇다. 이렇게 우리 안에는 정말 여러 모습의 내가 살고 있다. 필명은 어쩌면 내가 지향하는 그 어떤 이미지를 떠올리며 스스로 지어 부르는 이름일 게다. 혹은 어느 날, 불현 듯 내 안의 또 다른 나를 발견하고 그에게 생명을 불어넣고 싶어질 때 짓는 이름이 필명일지도.

이렇게 어떤 상황에서 내 역할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혹은 되고 싶은 나의 모습을 보여주는 언어적 표시가 바로 이름인 거다. 우리는 확실히 이름으로 어떤 특정 모습의 자아 정체성을 드러내고 마찬가지로 그걸 통해서 타인의 정체성을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나만의 어두운 동굴 속에서 은둔하던 시절,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 앞에서 방향을 잃고 무너졌던 절체절명의 순간이 있었다. 그 암흑기를 지나면서 나에게 왔던 이름, ‘지오(至吾). 그때, 나는 진심 ‘나’로 살고 싶었던가 보다. 그 ‘지오(至吾)’라는 한자가 의미하는 ‘나에게 오는 길’은 그토록 멀고도 험난했노니. ㅎㅎ 이제는 그 길 위에서 완전히 이탈하지 않을 만큼만 흔들리며 살리라는 염원을 담아 스스로 이름을 지어 불렀는지도 모르겠다.

나의 남은 생은 정말 내 필명처럼 ‘나’에게 온 ‘나’를 다시는 남에게 안 보내고 잘 데리고 살고 싶다. 하지만 진정한 ‘나’가 있기 위해선 반드시 내 곁에 ‘남’이라는 존재가 있어야만 한다는 사실을 잊지 않으려 한다. 타인과의 건강한 관계 속에서만이 오롯이 나로 존재할 수 있으므로. 나를 사랑하는 만큼 ‘저이’들과의 마음 나눔도 게을리하지 않으리라 다짐하게 되는 이유이다.

새학기가 되면, 강의 첫 시간에 내가 꼭 하는 게 있다. 학생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며 그 친구에게 말을 거는 일이다. 그리곤 대화 중간중간에 출석부에 열심히 뭔가를 메모하는 일. 그 친구의 첫인상, 그 친구 대답 중에 인상 깊었던 말, 그 친구가 중국어를 공부한 햇수.. 등등. 그건 학생들 이름을 기억하는 나만의 노하우다. 그 다음시간부터는 출석부는 가져가지 않을 것이므로. 그 모든 학생의 이름은 내 머릿속에 그 메모한 특이사항과 함께 반드시 저장되어 있어야 했다.

그렇게 난 수업시간에 수시로 그 친구들의 이름을 불러주었드랬다. 김춘수의 ‘꽃’이라는 시가 내게 준 가장 큰 영향력이 아닐까 싶다. 내가 그들의 이름을 불러주면, 그 친구들 한 명 한 명이 다 내게 의미 있는 존재가 되리라는 믿음으로. 분명 우리 모두는 다 그렇게 모두에게, 서로에게 의미 있는 존재가 될 자격이 있으므로.

마지막으로 내 마음을 대변하는 듯한 시로 이 글을 마무리해야겠다.

작은 이름 하나라도/이기철

이 세상 작은 이름 하나라도
마음 끝에 닿으면 등불이 된다
아플 만큼 아파 본 사람만이
망각과 폐허도 가꿀 줄 안다

내 한때 너무 멀어서 못 만난 허무
너무 낯설어 가까이 못 간 이념도
이제는 푸성귀 잎에 내리는 이슬처럼
불빛에 씻어 손바닥 위에 얹는다

세상은 적이 아니라고
고통도 쓰다듬으면 보석이 된다고
나는 얼마나 오래 악보 없는 노래로 불러왔던가

이 세상 가장 여린 것, 가장 작은 것
이름만 불러도 눈물겨운 것
그들이 내 친구라고
나는 얼마나 오래 여린 말로 노래했던가

내 걸어갈 동안은 세상은 나의 벗
내 수첩에 기록되어 있는 모음이 아름다운 사람의 이름들
그들 위해 나는 오늘도 한 술 밥, 한 쌍 수저
식탁 위에 올린다

잊혀지면 안식이 되고
마음 끝에 닿으면 등불이 되는
이 세상 작은 이름 하나를 위해
내 쌀 씻어 놀 같은 저녁밥 지으며

이 시를 읽고 있노라면 마음이 따뜻해진다. 그러면서 이런 생각이 드는 거다.

‘힘겹게 일과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면 그날 하루 고생한 자신을 위해 밥을 짓자. 고기 반찬이 없으면 어떠랴. 보글보글 된장찌개와 고봉밥 한 공기면 되지 않겠나. 그렇게 따뜻한 밥 한 끼 뚝딱 비우고 나면 스멀스멀 찾아드는 나른함 뒤에 얼굴을 빼꼼 내미는 작은 만족감… 그거면 되지 않겠나. 그 밥상에 누군가를 위해 수저 한 쌍 더 올릴 수 있다면 그 행복은 배가 되겠거니…’


2 thoughts on “‘정체성’으로서의 ‘이름’”

  1. 제가 참 좋아하는 시인데 배울때는 점수를 맡히기 위해서 배웠는데 살면서 계속 생각나는 시..
    오늘 샘의 글로 위안을 받고 배부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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