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일차_전광석화電光石火

순간, 기막힌 아이디어가 전광석화처럼 뇌리를 스쳤다. 와우! 저 일이 진짜 내게 일어났으면 싶다. 하하. 이렇게 우리는 일상에서 ‘전광석화(電光石火)’라는 성어를 자주 접한다. 나의 경우는 대체로 어떤 생각이 순식간에 떠올랐다 사라질 때 이 사자성어를 사용했던 것 같다. 그럼 이번 기회에 그 네 개의 한자들 면면도 함께 눈에 담아보자. 

번개 전(電), 빛 광(光), 돌 석(石), 불 화(火)

‘전광(電光)’은 ‘번개나 전기에서 나오는 빛’을 뜻한다. ‘석화(石火)’는 ‘돌과 돌이 맞부딪힐 때 순간적으로 일어나는 불’이다. 번갯불도 그렇고 부싯돌을 마찰시키는 순간에 번쩍 하는 불빛도 그렇고 이러한 것들은 순식간에 나타났다 곧 사라진다. 그러니까 이 두 단어가 합체해서 만들어지는 의미는 ’아주 짧은 순간, 찰나‘다. 금방 지나가는 시간이나 아주 빠른 움직임을 비유할 때도 자주 쓰이는 사자성어다. 

중국의 승려인 보제(普濟)가 편찬한 <오등회원(五燈會元)>이라는 책이 있다. 송대(宋代)에 발간된 다섯 가지 선종사서(禪宗史書)를 압축한 선종의 통사(通史)다. 책명 <오등회원(五燈會元)>은 ‘다섯 가지의 등사(燈史)를 회통(會通)하여 하나로 엮었다’는 뜻이란다. ‘전광석화(電光石火)’는 이 책에 나오는 “이 일은 부싯돌 불빛 같고 번쩍이는 번갯불 같다[此事如擊石火, 似閃電光]”라는말에서 유래했단다. 

불교에서 시간의 최소단위를 나타내는 말로 찰나(刹那)가 있다. 산스크리트의 ‘크샤나’, 즉 순간(瞬間)의 음역이다. 1찰나는 75분의 1초(약 0.013초)에 해당한단다. ‘눈 깜짝할 새’가 이 정도 걸리려나? 상상할 수 없는 속도다. 

철학적으로 찰나는 물질적ㆍ정신적, 특히 정신적 현상의 순간적 생멸(生滅)을 설명할 때 쓰인다. 불교에서는 모든 존재가 1찰나마다 생겼다 멸하고, 멸했다가 생기면서 계속되어 나간다고 가르친다. 이것을 찰나생멸(刹那生滅)·찰나무상(刹那無常)이라고 한다지. 윤회라고도 할 수 있겠고. 그렇게 모든 것은 ‘찰나 생, 찰나 멸’인 거고 생기자마자 사라져버린단다. 뭐든지 경험만 할 뿐, 실제 존재하지 않는다는 거다.

독일의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는 우리에게 주문한다. 어느 날 낮, 혹은 어느 날 밤에 악령이 우리의 가장 깊은 고독 속으로 살며시 찾아들어 이렇게 말한다고 가정해보라고. 어떻게?

우리가 지금 살고 있고 살아왔던 삶을 다시 한 번 살아야만 하고, 또 무수히 반복해서 살아야만 한다면 어떻게 할 거냐고. 거기엔 새로운 것이란 없을 거란다. 모든 고통, 모든 쾌락, 모든 사상과 탄식, 우리 삶에서 이루 말할 수 없이 크고 작은 모든 것들이 우리에게 다시 찾아올 거란다.

이 생과 완전히 똑같은 삶이 다시 찾아온다고? 만약 지금 나의 삶이 힘들기만 하다면 니체의 저 말은 끔찍하게만 들릴 거다. 하지만 또 이런 생각이 드는 거다. 내 삶이 다시 돌아온다는 그 생각이 나를 지배하게 되면, 그것은 지금의 나를 변화시키지 않을까? 이 순간만 모면하면 되는 게 아니라면 뭔가 달라져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까? 내 생이 다시 돌아오더라도 괜찮을 수 있게 이 삶을 살아내야겠다는 뭐 그런…

그렇다. 이 삶이 다시 한 번 살고 싶어지려면? 지금을 사랑스러운 삶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거다. 그러면 그 삶이 기다려질 수도 있을 테니. 지금 이 순간이 행복하다면 다시 한 번 살아도 좋지 않을까? 니체는 그러니까 지금에 충실하라는 얘기를 하고 싶은 거였다. ‘지금, 여기에’가 중요하다는 것! 이 순간을 긍정하라고 말하고 싶었던 거다. 이게 바로 니체의 영원회귀 사상이 아니던가. 

이렇게 극단적으로 한 번 몰아붙여서 생각해보니 현재 내가 해야 할 일이 조금은 명확해지는 느낌이다. 이 최종적이고 영원한 확인과 봉인 외에 더 이상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나 자신과 나의 삶을 만들어가야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한 노력은 아직도 진행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