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일차_패령자계佩鈴自戒 

오늘은 습관에 관한 얘기를 해보고픈 사심으로 오늘의 성어를 선택했다. 바로 패령자계(佩鈴自戒)다. 자신의 나쁜 습관이나 단점을 고치기 위해 스스로 노력하는 자세를 이르는 고사성어다. 참 좋은 의미, 하지만 조금은 낯설 게다. 그래도 익숙한 것에서 벗어나 새로운 성어를 배운다는 마음으로 일단 한자풀이부터 보자.

찰 패(佩), 방울 령(鈴), 스스로 자(自), 경계할 계(戒)

‘패령(佩鈴)’은 ‘방울을 차다’라는 뜻이다. ‘자계(自戒)’는 ‘스스로를 경계하다’는 의미고. 그리하야 ‘방울을 차서 스스로 경계하다’라는 말이 된다. 이 성어는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서예가인 이상의(李尙毅)와 관련된 고사에서 유래했단다. 효종 때의 문신 정재륜(鄭載崙)이 지은 <공사견문록(公私見聞錄)>에 수록되어 있다고.

임진왜란 때 광해군을 호종한 공으로 공신 녹훈을 받았던 그의 영정이 2014년에 경기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기도 했다지. 인재를 등용할 때 그는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어느 당파에 치우치지 않고 공정함을 유지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누구나 칭찬하던 그에게도 반전이 있었으니. 

그는 어렸을 때 참을성도 없고 말에도 신중함이란 찾아볼 수 없었단다. 그렇게 행동거지가 경솔한 자식을 바라보는 부모의 마음이 어땠겠나? 부모님께 꾸중 듣는 일이 잦아지자, 고민에 빠진 그가 어느 날 허리에 방울을 차고 나타난 거라. 방울소리가 들릴 때마다 마음을 다잡으며 스스로를 경계하겠다는 의지였던 거다. 어린 사람이 참 기특하기도 하제. 

집을 나가고 들어올 때나 앉으나 서나 늘 방울과 함께 했단다. 워낙 오래 앉아 있지 못하던 성격이니 처음엔 방울소리라 얼마나 많이 났겠나. 하지만 그 소리는 점점 줄어들었을 것이고 중년이 되어서까지도 그 경계하고자 하는 노력은 계속 되었다고. 왠지 이 미담 이후로 이상의(李尙毅)가 쏘아올린 ‘패령자계’는 경박한 자식들의 습관을 고치려는 모든 부모의 모범이 되었을 것 같다. 이 고사를 보며 오래 전 읽었던 책이 한 권 떠올랐다. 그 얘기를 해보고 싶어졌다.

우리는 행복한 삶이라는 인생 목표를 향하여 매일 의지를 불태우며 열심히 살고자 애쓴다. 그 과정에서 자신에게 끊임없이 고도의 집중력과 불굴의 자제력을 요구한다. 그것이 마음대로 되지 않을 때 자신을 최악의 실패자로 여기고 거기서부터 자신감은 뼛속부터 흔들리기 시작하고 결국 무기력에 빠지고 만다. 이러한 패턴이 반복되면 인간은 기본적인 삶의 의지조차도 상실하게 된다. 과연 우리 인간이 다 의지박약이어서 원하는 삶에 도달하기가 그토록 어려운 것일까? 이 질문에 희망적인 답변을 주는 책이 있다. 바로 웬디 우드의 ‘해빗(Habit)이다. 

웬디 우드는 성공과 실패의 간극을 무의미한 노력과 고통스러운 끈기 대신 좀 더 즐겁고 유쾌한 과정으로 채운다면 어떻게 될까를 고민했다. 우리가 처한 상황을 재배열해 자동으로 성공에 이르는 길은 없을까? 그리고 인간의 무의식을 배후에서 조종하는 존재, 즉 내면의 충동을 제어하고 늘 올바른 길로 인도하는 존재가 있다면 그것이 무엇일지를 탐구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그는 찾았다. 

성공한 사람들은 이 비밀을 알고 오래전부터 이 전략을 실천해왔다는 것을 말이다. 바로 ‘습관이 지배하는 삶’이 그것이다. 그들은 강인한 자제력을 지닌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누구보다 가볍고 쉽게 문제를 해결해왔던 것이다. 그는 이 습관을 ‘비의식적 자아’라고 명명했다. 

우리 인간은 의식적으로는 단호하고 확고하게 계획을 천명했음에도 비의식적으로는 과거의 행동을 그대로 답습한다고 한다. 우리가 의지력이라고 부르는 ‘의식적 자아’는 일상적 행동 패턴과 거의 관련이 없고 대신 광대하고 반쯤 숨겨진 ‘비의식적 자아’가 작동한다고 한다. 바로 습관이다. 

우리 일상에 스며든 습관은 처음에는 의식적 자아로부터 보내진 신호에 의해 시작되고 조종되지만 궁극적으로는 실행 제어 기능의 간섭 없이 비 의식적 자아에 의해 스스로 작동하게 된다는 것이다. 기존에 의식적 자아만으로도 사람의 모든 행동을 설명할 수 있다는 믿음에 반하는 주장인 것이다. 

이 주장은 그동안 의지가 약한 자신을 질책하며 후회하는 삶을 살아왔을 많은 이들을 위로해준다. 또한 더 나아가 인생의 실패가 온전히 개인만의 책임이 아니라며 습관의 사회화를 강조한다. 인생의 거의 대부분의 문제는 개인적이지 않으며 사회 전체가 함께 부담해야 할 짐이라는 것이다. 동시대의 모든 사람이 공유하는 공공의 시련이 반영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시련은 개인의 습관이 아니라 모두의 습관으로 극복될 수 있다고 역설한다.

저자의 말대로 개인의 의식적 자아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건 극히 제한적이다. 게다가 우리는 매일 마주하는 충동과 유혹과 무기력을 감당할 수 없다. 어디 그뿐인가. 변화무쌍해서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라는 외부적 힘을 통제하는 것도 역부족이다. 하지만 그는 과학의 힘을 정책에 활용하면 취약점을 보완할 수 있다고 말한다. 사람들이 더 쉽게 좋은 선택을 내릴 수 있도록 일상적 환경을 변화시키는 정부 정책을 고안한다면 우리의 삶의 질은 훨씬 나아질 수 있다는 것이다. 

조선시대에 살았던 이상의(李尙毅)의 습관은 개인적 차원에서 얼마든지 수정 가능한 것이었다면, 현대를 사는 웬디 우드가 말하는 것은 그 범위를 넘어서는 ‘습관의 사회화’다. 웬디 우드의 <해빗(Habit)>이라는 책을 통해 ‘습관’에 관한 좀 더 확장된 사유 속에 빠져볼 수 있었던 것 같다. 내 눈에도 생경했던 성어 ‘패령자계(佩鈴自戒)’를 보며 이 책이 떠오른 건, 어쩌면 내게 이런 기회를 주기 위함인지도 모르겠다. 오늘 밤 다시 한 번 책장을 펼쳐보게 하기 위함인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