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일차_역지사지易地思之

배려의 미학

나는 어려서부터 한자랑 친했다. 아빠가 매일 몇 글자씩 가르쳐주신 덕분이다. 한자를 제일 멋지게 쓰는 사람을 꼽으라면 내게는 우리 아빠가 단연 최고다. 할아버지가 공책을 안 사주셔서 땅바닥에 작대기로 써가며 한자를 익히셨단다. 그렇게 열악한 상태에서 연마하신 실력은 절로 탄성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아빠로부터 배운 한자는 초등학교 들어가 내 일기장 안에서 고스란히 살아났다. 

내가 배운 한자를 하나씩 집어넣어 일기를 쓰기 시작했던 것이다. 3학년 때 담임선생님은 매일 일기장 검사를 하셨는데 그때마다 한자가 들어간 내 일기를 흐뭇하게 바라보시며 친구들 앞에서 읽게 하셨다. 중1이 되니 국어담당이셨던 담임선생님은 매일 조회시간에 천자문을 두 자씩 칠판에 써주셨다(지금 생각해봐도 나와 한자의 인연은 확실히 각별했었네). 그러던 어느 날, 담임샘은 불시에 천자문 시험을 보셨고 만점을 받은 나는 엉겁결에 교장선생님 이하 모든 선생님과 친구들 앞에서 천자문 암송까지 하게 되었다. 

어릴 적 그런 좋은 기억들은 지금의 내 전공과 무관하지 않으리라. 중문학을 공부하고 통번역을 배우고 중국어 문법을 연구하는 언어학까지… 한자와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삶을 살게 된 것도 시작은 아빠와의 한자공부였다. 대학에서 논어(論語), 맹자(孟子) 등 사서삼경(四書三經 )을 읽고 중국의 여러 고전들을 접하면서 수많은 좋은 문장을 배웠다. 특히 재미있는 고사(故事)가 들어간 사자성어에는 인생살이에 적용할 수 있는 너무 좋은 가르침이 가득 담겨있었다. 그 많은 성어 중에 내가 가장 좋아하고 인생의 모토로 삼고 싶은 단어는 ‘역지사지(易地思之)’다. 

바꿀 역(易), 땅 지(地) 생각 사(思) 갈 지(之)

​첫 번째 글자 ‘역(易)’은 ‘한자(漢字)는 하나인데, 뜻과 음은 2개’이다. 즉 바꿀 역(易) 말고도 ‘쉬울 이(易)’라는 뜻과 음이 하나 더 있다는 얘기다. 우리가 ‘쉽다’는 말을 좀 있어보이게 한자어로 표현하면 ‘용이(容易)하다’라고 하지 않던가. 이때 쓰는 ‘이(易)’가 바로 그 ‘이(易)’다.

두 번째 글자는 ‘땅 지(地)’인데, 여기서는 ‘처지, 입장’이라는 의미로 쓰였다. 그리고 세 번째 ‘사(思)’는 글자 그대로 ‘생각하다’고, 마지막 ‘지(之)’는 ‘가다’라는 동사 용법도 있지만, 여기서는 ‘그것’을 뜻하는 지시대명사로 쓰였다. 이리하야… 이 네 개의 한자로 이루어진 ‘역지사지’라는 성어는 ‘처지를 바꾸어서 그것을 생각하다’의 의미렷다. 좀 더 친절하게는 ‘상대방의 처지나 입장에서 생각해본다’는 해석되시겠다.

이 ‘역지사지’는 중국의 대표적 고전인 사서(四書) 중 맹자님 사상이 담긴 ‘맹자(孟子)’에서 나왔다. 이 말은 현대인 사이에서 ‘공감’을 얘기할 때 많이 인용된다. 상대방의 입장이 되어서 생각해보면 그 사람에 대한 ‘공감을 넘어 이해’에까지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나는 이 ‘역지사지’를 ‘배려의 미학’이라 부르고 싶다.

나는 생각해본다. 새파랗게 젊은 사장이 ‘역지사지’할 수 있다면 아버지뻘 되는 60대 말단 과장을 향해 과연 막말로 갑질을 할 수 있을까? 가장의 무게로 하루하루 버티며 그 고단한 삶을 살아내는 과장님에게 ‘열심히 일해 주셔서 감사하다’는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네게 되지 않을까. 힘없고 가여운 어린 딸아이의 무섭고 두려웠을 입장이 되어본다면 설사 피를 나누지 않은 계부라 할지라도 그토록 가혹하게 아이를 학대할 수 없으리라. 

이 세상에 착한 사람만 있었으면 좋겠다는 나의 판타지는 아직 깨고 싶지 않다. 현실은 그게 불가능하다 말할지라도 이 희망을 담은 마음마저 포기해버린다면 이 세상은 정말 빛을 잃고 암흑으로 뒤덮일 것만 같아서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상대방의 입장이 되어보는 이렇게 작은 노력을 해나가다 보면 느리더라도 조금씩은 좋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지 않을까. 헛된 꿈일지라도 계속 꿔보고 싶은 꿈이다. 

2 thoughts on “5일차_역지사지易地思之”

  1. 역시사지가 가족안에서 부모가 자식을 자식이 부모를 생각만해도 어떨가 싶어요. 좋은 사람은 어찌 보면 만들어지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선생님, 이웃, 부모, 친구 그리고 우리 사회가 좋은 사람들을 만들어내는데 힘을 쏟아야되는거 아닐까.. 나도 모르게 제가 이런 역할을 해야만하는 위치에 있다는것에 놀랍니다. 오늘도 좋은 말씀 듣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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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샘의 역할은 분명하지요. ㅎ 그리고 그것을 그 누구보다도 잘 해내실 분이구요.
      저 역시 늘 응원하는 마음이예요. 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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