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_존재만으로도 행복을 주는

니체와의 토리노 데이트 15

친구–동정이 아니라 함께 나누는 기쁨이 친구를 만든다(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Ⅰ: 제9장 혼자 있는 사람 499)

내가 지금까지 이해하는 철학, 내가 지금까지 실행하고 있는 철학은 얼음과 높은 산에서 자발적으로 살아가는 것이다-삶의 낯설고 의문스러운 모든 것을, 이제껏 도덕에 의해 추방당해왔던 모든 것을 찾아내는 것이다. 금지된 것들 사이에서 그렇게 방랑했던 내 오랜 경험에 의해, 나는 지금까지 도덕화와 이상화를 행했던 원인들을 그 바람직하다고 여겨지던 모습과는 완전히 다르게 보는 법을 배웠다: 철학의 숨겨진 역사, 철학이라는 위대한 이름의 심리가 내게 분명해졌다(『이 사람을 보라』서문 3).

지오 친구 니오는 차분한 목소리로, 웃을 때도 소리 없이 그렇게 자신의 철학이야기를 쉴 새 없이 이어갔다. 니체는 이제 ‘자신을 위해 글을 써왔다’는 진솔한 말을 시작으로 그가 살면서 지키고자 했던 원칙들에 관한 얘기들도 풀어놓았다. 그녀에게 진심 어린 조언도 잊지 않았다. 지오는 그와 한 뼘 더 가까워진 느낌이었다. 그래서였을까. 그녀 역시 자연스럽게 허심한 마음으로 그의 진지하지만 더 담백해진 지적 수다 속으로 한없이 빠져들었다.

어느새 주홍빛 석양은 지평선 너머로 뉘엿뉘엿 내려앉고 있었다. 그때, 니체에 영향받은 프랑스 철학자들 얘기 들려주느라 시간 가는 줄 모르던 지오의 입 밖으로 비장한 한 마디가 미끄러졌다. “그대의 예언이 적중했소, 니오!” 그리고 지오는 혼자 겸연쩍게 웃었다. 어쩌면 그것이 진정 그녀가 니체에게 해주고 싶었던 얘기였는지도 모른다. 니체가 그토록 자부심을 가졌던 책『차라투스트라』가 드디어 많은 사람들에게 인정받았노라고 말이다. 그뿐인가. 문학과 예술의 형식주의를 타파하는 운동에까지 영향을 주었다는 쓸데없이(?) 구체적인 얘기도. 또 그의 철학이 후기 현대사회에서 차지하고 있는 학문적 위치까지도…

그 순간, 지오의 머릿속에는 니체의 불행했던 생애가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다. 평생 눈병으로 고생했던 그에게 너무 밝은 빛은 항상 찌르는 듯한 통증을 일으켰다. 자칭 8분의 7 맹인이었던 그 당시, 그에게는 눈이 불편하지 않을 정도로만 따뜻한 햇빛이 필요했다. 고독한 여행자가 되어 섬세하고 마른 공기를 찾아 유럽 곳곳을 떠돌던 시절이었다.『차라투스트라』의 3, 4부를 썼던 제네바의 하숙집이 지진으로 무너져 내렸을 때, 그는 친구 오버베크에게 보내는 편지에 ‘가까운 과거마저 무너뜨린 삶의 무상함에 마음이 심란했다’고 썼다. 그렇게 인정받지 못하던 슬픈 예언자, 니체는 온몸으로 세상에 분노하며 도덕적, 지적 전통의 근간을 뒤흔들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원숙한 철학은 그 누구에게도 가닿지 않았다. 차라투스트라의 공허한 외침은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았다. 그의 시야는 점점 더 흐릿해져만 갔고 청회색 눈동자는 초점을 잃고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생각이 또다시 제멋대로 멀리 가고 있던 그녀 앞에서 니체는 뒤늦게라도 인정받은 게 진심 좋았던가 보다. 그의 창백한 얼굴에 조용한 웃음이 번졌다. 그 처연한 미소에 지오는 순간 가슴이 저려왔다. 이 천재 철학자는 자신의 운명을 예견한 듯 관습적 도덕으로부터 변화를 이끌어낼 강력한 동력은 광기뿐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그것이『차라투스트라』에서 등불을 들고 신을 찾아 저잣거리를 헤매던 광인이 등장해야만 했던 이유였으리라. 오직 광기의 외침만이 루비콘강에 데려다줄 것이라 믿었던 것일까? 새로운 진실에 도달하기 위해 반드시 그 강을 건너고 싶었던 것일까? 스위스의 실스마리아에서는 아픈 날이 많아서 거의 벼랑 끝에 가까워진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던 그는 친구 오버베크에게 이렇게 썼다.

“고통이 내 삶과 의지를 집어삼키고 있다네. 절망적이네.”

친구 오버베크, 니체가 암흑 속으로 서서히 들어가던 삶의 끝자락에서도 외롭지만은 않았던 이유는 어쩌면 이 친구가 있었기 때문일지도. 생각이 여기까지 이르니 지오는 괜히 오버베크에게도 마치 그녀의 친구인 양 고맙다는 다정한 말 한마디 건네고 싶어졌다. 문득 친구를 만나기 위해서도 친구를 창조해야 한다고 했던 ‘벗’에 대한 니체의 생각이 궁금해졌다.


그대에게 고통받는 친구가 있다면, 그대는 그의 고통이 쉴 수 있는 휴식처가 돼라. 그러면서도 딱딱한 침대, 야전 침대가 돼라. 그래야만 그대가 그에게 가장 필요한 자가 될 것이다. 그리고 벗이 그대에게 악행을 저지를 때는 이렇게 말하라. “나는 그대가 내게 한 행동을 용서한다. 하지만 그대가 그대 자신에게 악행을 했다는 것. 이것을 어떻게 용서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모든 커다란 사랑은 이렇게 말한다. 사랑은 용서와 동정조차 극복한다(by 차라투스트라-동정하는 자들에 대하여).

지오: 니오, 아주 오래전 중국에 살았던 공자라는 사람 알지요?

니오: 그게 누구요?

지오: 알잖아요. 니오가 칸트를 비판하면서 같이 싸잡아서 도덕적 형식주의에 빠져있다고 했던 그 중국의… 뭐라 했더라? 부모가 죽어도 예가 아니면 어쩌니 저쩌니 한다고 니오가 암튼 그렇게 중국의 유교를 비판한 메모가 있었다고요. 그게 공자 비판이겠지 누구겠어요? 니오가 말하는 노예 도덕이 동양에서는 어쩌면 이 공자님으로부터 시작된 건지도 몰라요. ㅎㅎ 니오가 그토록 싫어하는 이성, 양심, 형이상학… 이런 것들이 유교 경전에 가득하거든요. 합리주의의 지존, 계몽주의의 정수라고나 할까요?

니오: 아.. 내가 그랬나? 내가 비판한 사람이 한 둘이래야지…ㅎㅎ

지오: 알긴 아세요? 니오의 비판에서 자유로울 자가 몇이나 될꼬.. ㅎ 암튼 중국에 공자 말고도 맹자라는 성인이 또 있는데… 그는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선하다고 했어요. 우리에게는 ‘측은지심’이라는 게 있어서 본유적으로 그렇게 타인의 아픔과 고통을 함께 느낄 수 있다는 거예요.

니오: 인간은 본래 선하게 태어났다? 그리고 측은지심? 동정을 말하는 거라면 헛소리요. 연민이나 동정이 왜 문제인지 아오? 동정은 그것을 받는 자를 부끄럽게 만드는 몹쓸 짓이오. 그것을 받는 자를 비참하게 만든다는 말이오.

지오: 니오 입에서 그 말 나올 줄 알았어요. ㅎㅎ 그런데 난 어려서부터 그것을 찰떡같이 믿었다는 거 아닙니까. 이제 선악에 대한 저의 생각은 많이 달라졌지만… 그래도 측은지심까지 완전히 부정하는 건 좀 그래요. 제가 아직도 인간에게 미련이 많이 남나 봐요.

니오: 내가 동정은 무조건 안 된다고 하는 게 아닙니다. 그게 분명 필요할 때가 있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정이라는 감정을 냉정하게 바라봐야 한다는 거예요. 타인의 아픔 때문이 아니라 그 고통을 보고 있는 자신의 고통 때문에 마음 편하고자 하는 건 아닌지… 아니, 난 거의 그렇다고 봐요. 그런 마음으로 하는 동정은 감상에 빠질 수밖에 없고. 그건 상대방에게 진정한 도움이 안 된다는 얘기를 하고 싶었던 거요.

지오: 이타적인 모든 행위를 그렇게 일반화하는 건 문제가 있다고 봐요. 그럼에도 여기서 놀라운 게 뭔지 아세요? 제가 지금 ‘니오의 말이 맞을 수도 있겠구나’ 설득이 되고 있다는 거예요.

니오: 동정은 미루어 짐작하는 일이어야 하오. 우선 그대의 벗이 그것을 원하는지 알아야 한다는 거요. 아마도 그대의 벗은 그대의 불굴의 눈과 영원의 눈길을 사랑할 게요. 그러니 벗에 대한 동정은 단단한 껍데기 속에 숨겨두어야 하는 거요. 그것을 깨물 경우 그대의 이 하나쯤은 부러질 각오를 하고서 말이오. 그래야만 그대의 그 마음이 섬세하고 감미로운 것이 될 테니.

지오: 드러내지 말라는 거네요. 그건 백번 옳으신 말씀.

니오: 그것이 결국 내 고통을 해소하기 위함은 아닌지 자문해봐야 하지 않을까요? 그런 동정은 주로 그리스도교에서 많이 볼 수 있죠. ‘약한 자들의 도덕’, 혹은 ‘무리 도덕’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요. 네가 아프면 내가 아프니까? 온전히 저 사람을 위해서 내가 뭔가를 한다는 게 환상이라는 거요.

지오: 뭔 말인지 알겠어요. 그럼 또 하나의 질문! 니오가 동정을 얘기하면서 귀족들의 ‘거리의 파토스’와 연결시켰는데 그건 무슨 의미인가요?

니오: 보통의 사람들은 고통 속에 있는 사람을 두고 불쌍하게 생각하지만 귀족들은 그런 감정으로부터 거리를 둔다는 거요. 그들은 삶을 경쾌하게 살아가기를 원하거든. 동정이라는 것은 내가 그의 고통을 가져가는 게 아니고 그냥 내가 고통스러울 뿐인 거요. 거리의 파토스는 불쌍한 사람에게 값싼 위로를 하지 않는 귀족들이 사는 방법인 거지.

지오: 냉정한 사람들… 자신들의 삶까지 무거워지는 게 싫어서 그런 감정을 원천적으로 봉쇄하는 건 아니고요?

니오: 내가 누누이 말하지만 정작 힘든 사람들에게는 그런 뻔한 위로나 동정은 도움이 되지 않아요.

지오: 고통을 겪는 사람들을 보면 자연스럽게 드는 감정을 그렇게까지 해석하고 일부러 거리두기를 해야 할 만큼 인간이 그 정도로 이기적이라고 보는 건 너무 가혹한 것 같아요.

니오: 저 사람의 고통 그 자체로 인해 내가 고통스러운 게 아닐 수도 있다고요. 그 사람의 고통을 함께 느끼는 건 아니라고요. 그 사람의 고통을 보는 나의 고통이 싫은 것일 뿐. 결국에는 내 고통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나는 동정을 베풀면서 행복을 느끼는 자비로운 자들을 좋아하지 않소. 그들에게는 수치심이 없어. 내가 동정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라고 할지라도 나는 동정심 많은 자라는 말을 듣고 싶지는 않소.

지오: 타인이 겪는 고통, 슬픔과 무조건 거리를 두라는 게 아니라 때로는 내가 느끼는 그 정념들로부터 거리를 두는 것이 필요하다는 거죠? 물론 일리는 있어요. 맞는 말이죠.

니오: 내가 왜 이렇게까지 얘기하고 있는지 궁금하오? 난 단지 지오의 삶을 행복하게 살라는 거요. 지오가 아무리 힘들어해도 그 사람의 고통은 줄지 않으니. 그 사람을 보면서 생긴 지오의 고통일 뿐이니까. 그런 파토스들과 거리를 두어야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걸 잊지 말라는 거요.

지오: 니오가 했던 말이 기억나네요. “내가 동정을 해야 할 때라도 가능한 한 멀리 떨어져서 하고 싶다. 그리고 다른 사람이 알아보기 전에 얼굴을 가리고 도망치고 싶다. 그대들도 그렇게 하라, 벗들이여!” 나도 니오의 그 말엔 전적으로 동감!

그저 태양이 되면 된단다. 지구 위의 모든 생물은 태양빛에 의해 살아가지만 그렇다고 태양에 고마워하지는 않는다. 태양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준다. 온기도, 빛도, 행복감도 주지만 우리가 태양에게 특별한 감사를 표하진 않지 않은가.

지오: 그래, 너무 당연한 거니까. 자연스러운 거니까.

니오: 그렇게 하면 된다는 얘길 하는 거요. 사사건건 그 사람의 고통을 참견하며 그렇게 살지 말고 태양 같은 존재가 되라고요. 그 사람이 나에게 고마워하지 않아도 되는 그런 존재 말이요.

지오: 아.. 도와주되 그가 고마워하지 않도록 하라? 방금 그 말이 왜 내 마음에 훅 들어올까요? 니오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너무 잘 알겠어요. 살아보니… 슬프게도 그 순수한 고마움조차도 마음의 빚이 되는 순간이 생기더라구요.

니오: 차라투스트라가 말하지 않았소. 내 벌꿀이 너무 꽉 차서 버리러 내려간다고. 그 마음이면 된다는 거요. 내 인식의 벌꿀이 꽉 차서 그냥 나눠주러 가는 것처럼 내가 뭔가 한 것에 대해 누가 고마워하지 않아도 되게 그렇게…

지오: 버리러 간대. ㅎㅎ 차라투스트라는 좋은 일도 참 쿨하게 하네요. 누굴 닮았어요.ㅎㅎ 다시 정리하면, 매번 그 사람의 고통에 같이 아파하며 뭘 하려고 하지 말고 그를 돕되 어떠한 감사도 받지 않을 만큼 그렇게? 존재만으로도 행복을 주는… 그런 사람이 돼라! 너무 와닿아요. 나도 그런 사람이고 싶다.

니오: 그대 몸에 있는 사슬도 못 풀면서 다른 사람을 어떻게 제대로 동정하겠소. 그대 삶부터 잘 살고 그 삶에서 나오는 충일함에 주변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영향도 받고 도움도 받게 만들라는 거요.

지오: 그 말 참 좋다. 충일함! 진짜 그렇네요. 태양이 따뜻한 온기를 나눠주듯…

니오: 친구를 향한 동정은 절대 깨지지 않을 것에 담아두라는 말이 그 말이요. 쉽게 찾지 못할 곳에 숨겨뒀다가 친구가 너무 힘들어하면 야전침대를 내주라고. 동정은 그것을 받는 인간을 약하게 만들잖소. 잠시 쉬어갈 수 있는 야전침대면 돼요. 더 무리해서 뭔가 하려고 하지 말라고. 그게 진정으로 그를 위한 게 아니라고.

지오: 야전침대…

니오: 잠시 쉬고 다시 떨치고 바로 일어나야 하니까. 위로는 그렇게 하는 거요.

지오: 니오 말을 듣고 보니 현대사회도 분명 이런 ‘거리의 파토스’가 필요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니오: 위로의 시대는 결국 서로의 파토스를 빨아들이는 시대요. 위로도 어떻게 하느냐가 중요하다는 거요. 이젠 내 말이 납득이 되오? 내가 좀 냉정하게 말하긴 해도 뭐 그렇게 나쁜(?) 사람은 또 아니오. 흠흠…

지오: ㅎㅎ 알지요.. 그리고 완전 납득되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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