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일차_화양연화花樣年華

요즘 젊은 세대들은 ‘화양연화(花樣年華)’라는 이 단어를 알려나? 영화나 드라마의 제목 정도로는 들어본 적 있으리라. 하지만 그 의미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바로 답을 못하고 머뭇거릴지도 모르겠다. 

‘꽃 화(花), 모양 양(樣), 해 년(年), 빛날 화(華)’

이 한자들의 뜻만으로 풀이해보면 ‘화양(花樣)’은 ‘꽃의 모양’이고, ‘연화(年華)’는 ‘나이’라는 뜻도 있지만 ‘세월, 시절’로도 해석된다. 그러니 말 그대로 ‘꽃다운 나이’, ‘청춘시절’ 등의 은유적 표현인 거다. 지금은 그 의미가 ‘인생에서 가장 빛나고 행복한 시간’으로 확장되어 쓰이는 거고. 

나이 얘기가 나온 김에 공자님의 가르침 《논어, 위정(爲政)》편에 나오는 나이와 관련된 한자어를 한 번 배워볼까나.

15세는 ‘학문에 뜻을 둔다’하여 ‘지학(志學)’이요, 20세는 ‘갓(冠)을 쓰는 어른은 되었으나 아직은 약한(弱) 나이’라 하여 ‘약관(弱冠)’이라 했다. 즉 몸은 다 자랐지만, 마음은 아직 약하고 성숙하지 못했다는 뜻이렷다. 30세는 ‘뜻을 세우는 나이’라 하여 ‘이립(而立)’, 40세는 ‘사물의 이치를 터득하고 세상일에 흔들리지 않을 나이’라 하여 ‘불혹(不惑)’이다. 여기서 드는 궁금증 하나, 과연 40세가 정말로 미혹되지 않는 나이일까? 일단 그렇다 치고… 

50세는 ‘하늘의 뜻을 안다’하여 ‘지천명(知天命)’이고, 60세는 ‘천지만물의 이치를 통달하고 듣는 대로 이해한다’하여 ‘이순(耳順)’인데, 보통은 육순(六旬)이라고 하지. 70세는 칠순(七旬), 가만, ‘고희(古稀)’가 더 익숙하려나? 하긴 ‘칠순잔치’를 ‘고희연(古稀宴)’이라 하니까 그럴 수도 있겠다. 참… ‘고희(古稀)’의 한자를 풀면, ‘예로부터(古) 드물다(稀)’는 뜻인데, 이 말은 중국의 그 유명한 시인 두보(杜甫)의 싯구에서 유래했단다. 바로 ‘일흔 살까지 산다는 것은 옛날에는 드문 일이다(인생칠십고래희:人生七十古來稀)’라는 이 구절에서 말이다.

나이와 관련된 한자어를 다 말하려면 끝이 없을 테니 여기서 그만, 다시 화양연화로!! 

화양연화는 우리 세대에겐 1960년대 홍콩을 배경으로 하는 아주 스타일리쉬했던, 그리고 음악도 아주 멋졌던 영화의 제목으로 기억되는 단어다.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절’을 의미하는 이 사자성어를 떠올리면 나도 모르게 고독과 애틋한 감정이 밀려오는 이유일 게다. 

영화 <화양연화>의 내용은 각자 가정을 둔, 하지만 배우자의 외도로 인해 외로운 일상을 살아가던 두 남녀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야기다. 이 영화는 세기말적 감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감독으로 정평이 난 왕가위 감독의 작품답게 영상적 효과가 매우 뛰어나다. 시각적으로는 그토록 아름답게 그려졌지만, ‘헤어짐’을 주제로 한 영화인 만큼 두 주인공에게 그 시절은 어쩌면 가장 고통스러운 시간일 수도 있었으리라. 그런 면에서 영화 제목은 역설적이다. 

말로 표현하지 못해 더 간절했던 사랑이었고, 그러기에 남모르게 그 아픔을 견뎌야 했던 그 시절… 감독은 왜 ‘화양연화’라고 표현했을까? 음… 우리 인생에서 ‘가장 빛나던 순간’이 반드시 ‘가장 행복했던 시간’은 아닐 수도 있겠구나. 

화양연화(花樣年華)라는 이 단어를 보면, 누구라도 자신의 인생에서 ‘화양연화’는 언제였는지를 떠올리게 되리라. 나 역시도 망육(望六)의 나이에 지난 시절을 돌아보니 이런 생각이 드는 거다. 

내 삶의 화양연화도 어쩌면 내 생의 가장 행복했던 시간이 아니라 오히려 불안과 걱정으로 지새던 그런 밤들이 아니었을까. 한 번씩 찾아오는 인생의 폭풍 속에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생을 놓지 않았던 그 시간들이 아니었을까. 

왕가위 감독은 이처럼 ‘시간’이라는 요소를 각별하게 다룸으로써 영화를 ‘기억에 관한 예술’로 만든다. 덕분에 나의 화양연화를 찾아 기억을 다시 소환해보는 밤, 내 인생에서 그 어떤 순간도 버릴 게 없음을 새삼 깨닫는다. 깊은 슬픔에 눈물겹던 그 숱한 날들까지도 끌어안을 수 있는 이 순간이 감사할 수밖에. 

기억을 조각하다

언젠가 ‘기억이 떠나면 어디로 갈까?’하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있다. 만약 내게서 이 아픈 기억을 떠나보낼 수 있다면 새로운 생명력과 에너지로 넘쳐나는 푸른 숲이었으면 싶었다. 

때론 억수같이 퍼붓는 소낙비처럼 큰비가 되어 우리 몸 어딘가를 도려내는 상처를 남기고 떠나가는 기억일지라도, 이 너머에는 따뜻한 희망이 기다리고 있었으면 싶었다. 숲은 너무 지쳐 모든 것을 놓아버리고 도망쳐 나온 쓰라린 기억들을 그 너른 품에 안아줄 수 있을 테니까…

살다 보면 가끔씩 내 앞에 모질게 불어오는 큰바람에도 나를 놓지 않기 위해 나는 오늘도 과거의 기억을 조각한다. 그리고 지금의 나를 잊지 않기 위해서…  

그러다 보면 먼 훗날, 차곡차곡 조각된 기억들은 어느새 ‘추억’이라는 화살이 되어 특별할 것 없는 심심한 일상에 느닷없이 날아들어 현실 장벽에 균열을 일으킬 것이다. 이렇듯 ‘현실’과 ‘추억’은 공존할 수 있다. 다만 우리가 돌아보지 않았을 뿐이다. 

누군가 ‘기억’이 ‘추억’이 되려면 ‘스토리’가 필요하고 ‘감동’이 뒤따라야 한다고 했다. 아마도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가 그토록 치열하게 무엇인가를 하고 또 좋은 것을 남기려고 열심인 이유이리라. 그 과정에서 기쁘거나 아프거나 하는 사연 많은 기억들은 모두 필연적인 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