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덕’에 대하여

현대의 덕(德) 윤리학자 중 한 명인 마이클 슬로트(Michale Slote)의 ‘덕(德) 윤리’에 관한 논문을 읽는데, ‘유덕한 사람은 공감을 잘하는 사람’이라는 문장이 유난히 내 마음을 끌어당긴다. 공감 능력을 일종의 덕(德)으로 본 것이렷다? 슬로트는 말한다. 기성 사회의 법, 제도, 관습은 그 사회의 행위와 같고 개인의 행위가 행위자 자신의 품성을 반영하듯 사회의 행위들은 그 행위를 하는 사회 집단의 품성을 표현한다고. 그래서 ‘공감’이라는 이 감정 윤리는 제도와 법은 물론 사회적 관습과 관행에 책임 있는 사람들이 그 안에 반영하는 것처럼 보인다고. 

거참.. 쉽게 풀어쓴다고 했는데도 어렵다. 이게 대체 무슨 의미일까? 사회제도의 정의는 그 지도자들의 유덕한 품성을 반영한다는 뜻일까? 어쨌든 난 ‘사회제도적 덕’으로서의 정의가 ‘개인적 덕’으로서의 정의에서 파생된다고 이해했다. 동양에서도 이와 비슷한 관점에서 덕을 얘기한다. 다스리는 사람들이 선할 때만 정부는 일반적으로 선하며 특히 정의롭다고 말이다. 맹자도 강조하지 않았던가? 유덕한 지도자가 나라를 다스릴 때 정부가 유덕하다고. 정말 그런가? 하.. 너무 멀리 왔다. 이 얘기를 하려면 또 밤을 새야 한다. 그러니 일단 초심으로 돌아가자. 

도덕에 대한 얘기를 하려던 거였다. 참, 윤리(ethics)와 도덕(morals)이 다른가? 보통은 같은 개념으로 혼용하고 있지만 철학자들 사이에서는 구분하는 이들도 있는 듯하다. 윤리가 ‘주관적이고 개인적 성찰’에 방점을 찍는다면, 도덕은 ‘상호주관적이고 비성찰적인 것’이라나. 그래서 난 또 윤리(倫理)의 윤(倫)자를 해체해본다. 사람인변 인(亻) + 생각할 윤(侖)이다. 그럼 ‘사람이 생각한다’는 말이니, ‘개인적 성찰’로도 해석할 수 있겠네?  한자로 풀어보면, 저들의 ‘윤리’에 대한 해석도 일리는 있어 보인다(영어 ‘ethics’의 라틴어 어원적 해석은 나중에 하는 걸로~). 암튼 저들이 말하는 차이를 내 맘대로 슬로트의 관점에 접목해보며 드는 생각… 왠지 전자(윤리)는 ‘개인적인 덕으로서의 정의’로, 후자(도덕)는 ‘사회제도적 덕으로서의 정의 혹은 규범’ 정도로 이해하면 되지 않을까 싶은데… 굳이 구분할 필요가 있을까 싶긴 하다.

‘트롤리 딜레마(Trolley dilemma)’라는 말을 들어본 적 있는가?

윤리학에서 도덕적 판단을 요하는 여러 상황들을 가정하는 일종의 사고 실험이다. 즉 브레이크가 고장난 기관차(trolley)를 운행하던 기관사가 철로 위에서 일하고 있는 인부들을 살리기 위해 해야 하는 선택의 문제를 아주 다양한 상황 속에서 토론한다. 

트롤리 딜레마를 통해 얘기하고자 하는 건 ‘소수를 위해 다수가 희생하는 것에 대해, 혹은 다수를 위해 소수가 희생하는 것에 대해 윤리학의 관점에서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는가’일 것이다. 이 쟁점을 두고 보편적 도덕법칙을 강조하는 의무론적으로 접근할 수 있겠다. 혹은 결과적으로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주장하며 공리적 계산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두 입장도 다 아니라면 또 어떤 선택이 있을 수 있을까? 바로 공동체주의의 이론적 토대가 되는 ‘덕 윤리’적 접근이다. 상황과 맥락, 그리고 관계(행위자의 품성)를 고려해서 판단하라고 하는 입장이 그것이다.

이 무거운 딜레마 앞에서 우리는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것이 결코 단순한 문제가 아님을, 어떤 보편적 기준으로 명료하게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님을 알게 된다. 윤리적이라는 것, 또 도덕적이라는 것에 대한 판단은 어느 관점에서, 누구의 입장에서 보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프리드리히 니체는 “모든 인식은 해석”이라 했다. 이 말은 그의 ‘관점주의’를 대변한다. 예전에 언어학도로서 관련 서적들을 읽으면서 이 세계는 모든 것이 ‘해석학의 문제’라는 것을 깨달았다. 사물을 인식한다는 것은 결국 그 모든 대상을 욕망에 맞게 해석하는 과정이었다. 

저널리즘의 기본 원칙은 ‘사실 보도’다. 하지만 니체의 관점주의적 사유대로라면 ‘사실 보도’는 틀린 말이다. ‘사실’은 분명 존재하지만 그것이 보도되는 순간 그 ‘사실’에는 이미 기자의 관점이 투영된다. 더 이상 순수한 사실은 아니라는 의미다. 

기자의 관점에서 해석된 기사를 읽는 사람들은 다시 한 번 그들 자신의 삶에 기반한 ‘전이해(혹은 무의식)’를 통해 새로운 이해의 지평을 형성한다. 이는 우리가 매일 접하는 뉴스가 왜곡될 여지가 얼마나 큰지를 반증한다. 기자의 역할이 그만큼 중차대하다는 말이다. 

가장 중립적 위치에서 ‘사실에 최대한 근접한 보도’를 위해 노력해야할 기자들 사이에 ‘힘에의 의지’가 작동될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보라. ‘권력’일수도 있고 더 원초적으로는 ‘자본(돈)’일수도 있는 그러한 ‘힘’에의 욕망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한 공정한 언론의 모습은 기대하기 어렵지 싶다. 

나는 요즘 기존 질서의 힘 있는 자들을 위해 법이 존재하는 게 아닐까 회의가 든다. 특정 의도 아래 무차별적으로 짜깁기된 헤드라인만으로도 ‘만고의 죄인’이 양산되는 이 현실은 또 어떤가. 사람들로부터 한 번 찍힌 낙인은 지워지지 않는다. 바로 언론에 의해 집행된 무기징역인 것이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검찰에 분노하다가도 그 진실을 호도하는 언론에 절망하게 되는 이유다. 

관점주의를 얘기하려다 저널리즘까지 소환됐지만, 윤리학이나 도덕철학의 존재 이유 역시 마찬가지 아닐까 싶다. 이는 어쩌면 다양한 상황과 관점에 따라 완전히 다른 선택을 할 수밖에 없는 과정 속에서 끊임없이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해 사유하라는 의미일 게다. 그 험난한 여정을 통해 우리는 어떻게 사는 것이 진정 좋은 삶인가에 대한 물음에 각자 나름의 답을 찾아갈 수 있을 테니.

개인은 결코 고립된 주체가 아니라는 것, 우리 인간은 다양한 사회적 관계로 얽힌 공동체 안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그래서 이 ‘정의’라는 문제는 ‘관계’라고도 부르는 그 맥락을 떠나서는 풀어낼 수 없다. 분배의 정의든 합리적 선택이든 이 모든 것들은 어떤 형태로든 도덕적 가치 판단과 연결될 수밖에 없다. 정의를 이야기할 때 종교나 도덕이 끼어들 수밖에 없는 이유다. 

철로 위의 다섯 명을 살리기 위해 다른 한 명은 죽여도 되는 것인가? 테러리스트를 고문할 것인가? 아니면 어떤 경우라도 고문은 안 된다고 주장할 것인가? 낙태 문제는 또 어떤가? 유전자 편집은?

생명 윤리를 넘어 이제는 AI 윤리까지 논해야 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정의는 어쩌면 올바른 가치 측정의 문제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 올바른 가치에 합의하는 게 어디 쉬운 일인가 말이다. 정의의 문제가 어려운 이유는 어떤 하나의 일방적인 관점이 아닌 다양한 관점이 존재할 수밖에 없고, 또 그 관점마다 나름의 논리와 근거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그 뿐인가? 우리 인간에게는 절대적 선도 절대적 악도 없다. 인간의 의식은 선할지 몰라도 그의 무의식에는 ‘악’이 존재할 수 있는 게 인간이다. 그래서 독일의 철학자 니체는 그 어떤 인간도 타자에 대해서 윤리적으로 섣불리 판단할 수 없으며 그저 ‘선악의 저편’에서만 도덕적 가치 판단이 가능하다고 했다. 

그러니 이렇게 정답이 없는 너무도 어려운 철학적 문제 앞에서 내 본능은 외치고 싶어진다. 다 필요 없고 ‘좋음(the good)’이 ‘옳음(the right)’보다 우선해야 한다고 말이다(그럼, 그 ‘좋음’은 뭔데??).

세상은 갈수록 각박해지고 하루가 멀다고 뉴스에 보도되는 사건사고들 속에서 우리 사회의 비정한 현실을 마주한다. 착한 사람들만 있었으면 좋겠다는 나의 소망은 실현불가능한 판타지다. 그렇다고 이 마음마저 포기해버린다면 이 세상의 빛이 다 사라질 것만 같아 두렵다. 

물론 이 세상이, 이 사회가 변하려면 거기에 걸맞은 사회제도적 장치가 마련되고 사회적 정의가 실현되어야 함은 당연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믿고 싶은 거다. 이 사회를 바꾸고 싶다면 바로 그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우리 개개인이 함께 변해야 한다는 것을. 또 그렇게 되기 위해 우리가 할 일은 아무리 사소하고 느린 변화라도 조금씩 쌓이면 큰 변화가 된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이다. 점진적으로 꾸준히 일어나고 있는 사회의 변화를 거대한 혁신적 변화의 물결로 만드는 것은 바로 우리 개개인의 자각에 달려 있다는 것을 믿고 싶은 거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상대방의 입장이 되어보는(易地思之), 이렇게 작은 노력을 해나가다 보면 느리더라도 조금씩은 좋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