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의 어느 날…

나태주 시인은 11월을 ‘돌아가기엔 이미 너무 많이 와버렸고 버리기에는 차마 아까운 시간’이라 했다. 한해의 막달에 대한 아쉬움이 아닌 크리스마스의 낭만에 취하는 12월과는 달리 11월은 확실히 홀로 막막한 길 위에 선 느낌이다. 세상을 온통 화려하게 물들이고 떠나가는 만추의 길목에서 겨울을 마중하며 잿빛 마음을 끌어안는 그런 시간이랄까. 

만추가 내게 준 형벌인지 선물인지 모를 무기력이 무색하게도 분초를 다투는 일상에 온통 나를 내어준 요즘이다. 그럼에도 하루하루 무감하게 시간은 내 앞에서 계속 미끄러지고 있다. 마치 내 존재가 이 세계로부터 자꾸 외면당하는 것 같은 그런… 

무(無)가 되어가는 나와 달리 11월의 끝으로 갈수록 서서히 자기 색깔을 드러내는 존재가 있다. 동백이다. 가을과 함께 멀어지는 총천연색 세상을 그리워할 사람들을 위해 추운 겨울에 찾아와 붉은 빛을 발하는 까멜리아.  

중국인들도 모르는 중국 전설에 따르면, ‘왕 앞에서 자기 손으로 두 아들을 죽여야만 했던 아버지가 자결한 자리에서 자라난 게 동백나무’란다. 아비의 죽음을 목도한 두 아들은 동박새가 되어 날아갔다나. 그래서 동박새가 겨우내 동백꽃 곁을 지키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우리나라에서도 그에 못지않게 동백은 참 슬픈 꽃이다. 꽃잎채로 땅위에 뚝 떨어지는 모습이 제주 4.3사건 희생자를 떠올린다 해서 동백꽃은 4.3의 상징이 되었다. 과거 속에 묻혔던 우리 현대사의 아픔이 이식받아 다시 살아난 것만 같았다. 동백은 ‘슬프지만 반드시 기억하자’는 우리의 염원이 담긴 꽃이 되었으므로.  

언젠가, 4.3희생자 추념식의 대통령 추념사에서 언급된 것처럼 “동백꽃 지듯 슬픔은 계속되었지만 슬픔을 견뎠기에 오늘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껏 침묵했던 우리가 떳떳하게 내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그날(아니 7년)의 진상규명을 위한 노력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 비극의 주범들이 잘못을 인정하고 고개 숙일 때까지… 

가브리엘 샤넬은 어떠한 향도 발산하지 않는 사려 깊은 까멜리아가 여성들에게 자신만의 향기를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선사했다고 자랑스러워했다. 여성들의 지갑을 열게 할 만큼 충분히 유혹적이다. 이제는 그 동백꽃처럼 스러져간 무고한 영혼들을 붉은 기다림에서 자유롭게 해주어야 하지 않을까. 그 70년 세월 진실이 밝혀지기만을 기다렸을 4.3의 희생자들에게 말이다.

찬바람이 부는 11월의 한 가운데서 나는 동백을 차마 마주하지 못하고 고개를 떨군다. 이 무거워진 마음 잠시 내려놓고 11월이면 어김없이 떠오르는 소설 한스 에리히 노삭의 [늦어도 11월에는]을 다시 펼쳐야 할 듯하다.

“사람이란 생각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견뎌낼 수 있는 법이다.” 소설 속 이 한 문장이 또다시 용기를 주는 11월의 어느 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