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병철의 《피로사회》

사색적 삶으로의 초대

재독 철학자 한병철 교수의 《피로사회》라는 보랏빛 아주 얇은 책을 만났다. 겉모습만 보고 판단하면 클난다는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이 가볍고 아담한 직사각형 안에는 엄청난 무게의 철학적 성찰들로 넘쳐났다. 한 장을 넘기기가 결코 쉽지 않은 곱씹고 되뇌기를 수없이 하고 나서야 겸허한 마음으로 마지막 장을 덮게 만든 그런 책이었다.

《피로사회》를 얘기하기에 앞서 프랑스의 철학자 장 보드리야르의 《소비사회》 얘기를 먼저 꺼내야 할 것 같다. 현대사회를 함축하는 말로 소비자본주의라는 표현이 있다. 보드리야르는 현대사회의 인간을 규정하는 것은 더 이상 노동과 생산이 아니라 소비이며 그중에서도 사용가치가 아닌 기호 가치에 의한 소비라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자연적 욕구에 의해 소비하던 시대는 지났고 이제는 사회적 욕구로서의 기호 가치가 소비를 지배하는 시대다. 갈수록 개인화되는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고독한 현대인들은 소비를 통해 소속감과 정체성을 획득하고자 한다. 남들이 하는 건 다 하고 싶은 모방심리는 소속감을 찾고자 하는 욕구를 반영하고, 그러면서도 남과는 또 달라야 하는 개성 중시는 정체성에 대한 갈망을 드러낸다.

《피로사회》는 21C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이 앓고 있는 우울증, 경계성 성격장애, 소진증후군 등 신경성 질환들의 발생 원인과 치유방안에 대한 고찰에서 나온 철학 에세이다. 한병철 교수는 ‘근대(모던)’와 ‘후기 근대(포스트모던)’를 구분하고, 후기 근대에 속하는 현대는 그동안 이질적이고 낯설다는 이유로 배타와 공격의 대상이었던 타자가 이제는 이국적이라는 개념으로 변모해서 향유 대상으로 전환된 시대라고 했다. 낯섦에 대한 공격성이 사라지고 상투적인 소비주의로 변해버린 차이와 다양성의 시대, 즉 산업사회 이후의 시대를 말하는 용어인 ‘포스트모던’을 설명할 때 가장 설득력 있는 키워드가 바로 시뮬라크르다. 현대사회를 진단하기 위해서는 보드리야르의 이 개념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시뮬라크르는 우리 문명의 핵심을 풀어낼 수 있는 철학 용어 중의 하나로서 ‘원본 없는 복제’라는 뜻이다. 진짜보다 나은 가짜를 의미한다. 모든 것이 기호화되고 실재가 사라진 시대에서 현대인들은 실재보다 더 실재적인 것들에 포위되어 살아간다. 더 이상 원본은 존재하지 않고 시뮬라크르들이 더 실재 같은 ‘극실재’만을 생산해낸다. 그 기호(이미지) 획득 과정은 반영, 왜곡, 독립으로 설명 가능하다. 실재를 반영하던 이미지는 점차 실재를 왜곡하기 시작하다가 결국 그 가짜 이미지가 자신만의 독자성을 획득하며 진짜보다 더 진짜처럼 행동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이퍼 리얼리티, 극실재다.

영화 “매트릭스”가 시뮬라크르의 본질을 가장 쉽게 해석해준 영화로 꼽힌다. 빨간약과 파란약 중에 어떤 약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매트릭스라는 가상세계에 남을 것인지 현실세계로 돌아갈 것인지가 결정된다. 신기한 건 갈수록 많은 사람들이 현실이 아닌 가상세계에 남겠다는 선택을 한다는 것이다. 하긴 진짜보다 더 좋은 가짜라니 선택할 만도 하지 않은가. 알고 보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도 시뮬라크르들로 가득하다. 유튜브도 게임도 SNS도 다 환상이고 가상세계다.

시뮬라크르 시대에는 뭐가 진짜고 뭐가 가짜인지는 아무도 문제 삼지 않는다. 뭐가 진실인지가 아니라 내가 뭘 믿고 싶은지가 중요하다. 내가 보고 싶고 듣고 싶은 것만이 중요한 세상에서 생산자는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보여줘야 한다. 진실은 사라지고 가짜만 남는다. 가짜가 더 설득력이 있고 그 속에서 짜릿한 자극이 강화될수록 사람들은 더 열광한다. 이와 같이 시뮬라크르는 절대 진리가 아니라 사람들의 욕망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시대정신이다. 시뮬라크르의 관점으로 우리 시대를 분석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것이 우리 삶의 방향을 정확하게 진단하고 미래를 어떻게 설계할 것인지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길일지도 모른다.

한병철 교수는 미셀 푸코가 말한 기존의 규율 사회에서 통제당하는 복종적 주체로서의 개인은 이제 성과사회에 최적화된 성과 주체로 변했다고 말한다. 성과를 내야 하는 새로운 주체는 스스로 자신을 경영하는 기업가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특기할 것은 성과사회에서는 누가 시켜서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알아서 한다는 것이다. 그저 노동하는 동물로 전락해서 자신을 스스로 착취한다. 이것이 자기 착취다. 자발적으로 본인을 착취하기 때문에 본인이 가해자이자 피해자가 된다. 누구의 강압에 의한 것이 아니니 매우 주체적인 인간처럼 보이나 실은 자유로운 척할 뿐이다. 나는 이 ‘자기 착취’라는 단어가 주는 처연함에서 공허한 가상세계의 공간을 끊임없이 유영하는 소진된 인간의 모습을 떠올린다.

현대인들이 앓고 있는 우울증은 ‘할 수 있다’의 성과 주체가 ‘더 이상 할 수 없음’을 느낄 때 발생한단다. 즉 일과 능력의 피로에서 시작된다는 것, ‘아무것도 가능하지 않다는 절망적 비탄은 아무것도 불가능한 것은 없다고 믿는 사회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 얼마나 섬뜩하면서도 적확한 진단인가. 더 무서운 건 이러한 성과사회는 과잉 활동성의 요구를 통해 도핑 사회로 발전해간다는 점이다. 한병철 교수는 성능 없는 성과를 가능케 하는 것을 도핑 개념으로 정의한다. 성과사회의 성과 주체로서 인간 전체가 약물을 통해서라도 생산성을 극대화시킬 수 있다면 이러한 사회적 발전 경향에 제동걸기가 힘들어진다는 얘기다. 성능 없는 성과로 도약하기 위해 불필요한 것들에 집착하게 만든다는 얘기다.

성과사회의 피로는 사람들을 개별화하고 고립시키는 고독한 피로다. 한트케가 말한 이 분열적 피로는 인간을 ‘볼 수 없고 말할 수 없는 상태’로 몰아넣는다. 오직 자아만이 시야를 가득 채운다는 것이다. 피로는 모든 공동의 삶과 친밀함, 심지어 언어까지도 파괴하며 그렇게 폭력이 되어버린다. 한병철 교수는 이처럼 피로사회는 부정적인 것이라고 말하면서도 다른 의미의 피로를 제시한다. 바로 ‘근본적 피로’다. 위에서 말한 고독한 피로, 즉 분열적 피로와는 달리 근본적 피로의 영감은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한 과잉 활동성보다는 무엇을 내버려 두어도 괜찮은지를 가르쳐준다는 것’이다. 이 피로는 태평함과 무위의 능력을 허락해주는 길이 된단다. 그는 이러한 근본적 피로를 ‘깊은 심심함’과 연결시킨다.

바쁜 시대의 멀티태스킹에 대해 비판적인 그는 ‘여러 가지를 한다는 것은 아무것도 안 한다’와 다르지 않다고 말한다. 창조적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게 깊은 심심함인데, 산만함 그 자체인 현대사회에서는 깊은 사색에 잠길 수 없다는 것이다. 그저 분주할 뿐인 현대인들은 귀 기울여 듣는 재능도 사라지고 남의 말을 듣지 않으니 공동체는 와해되고 타자와의 연대도 불가능하다는 진단은 의미심장하다. 특히 ‘눈에 잘 띄지 않는 것들, 금세 사라지는 것들이야말로 깊은 사색을 통해서만 인지될 수 있는 비밀’이라는 말에 깊이 공감했다. 그리고 사색을 통해서만 타자와 연대할 수 있다는 그의 말에 천만번 ‘옳소’를 외치고 싶었다. 결국 한병철 교수는 지금 현대인에게 필요한 건 바로 한나 아렌트가 말한 ‘활동적 삶’에서 더 나아가 깊은 심심함으로 이끄는 ‘사색적 삶’이라는 말을 하고 싶었던 거다.

나는 한병철 교수가 한트케의 ‘노동하는 손에 맞세운 놀이하는 손’을 언급한 부분에서 니체의 인식 유형 3가지 중 마지막 유형인 ‘어린아이’가 떠올랐다. 《피로사회》를 관통하는 사유 곳곳에서 니체 철학의 향기가 느껴진 이유이기도 하리라.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니체가 제시한 정신의 3가지 발전단계(인식 유형)는 낙타, 사자, 어린 아이다. 이 세 유형 외에 용이 또 등장하는데 그것이 상징하는 바는 사회적 의무고 전통이고 기존의 절대적 진리다. 나는 이 세 가지 인식 유형으로 《피로사회》를 읽고 난 느낌을 내 맘대로 재해석해보았다.

‘낙타’는 기존 질서에 복종하는 자다. 엄청난 짐을 지고 주인이 이끄는 대로 사막을 건너는 낙타가 상징하는 것은 사회의 도덕과 가치에 순응하며 아무리 힘들어도 견디는 자다. 한병철 교수가 말한 근대의 ‘복종적 주체’가 바로 이 낙타 유형이 아닐까 싶다. 그다음 단계인 ‘사자’로 상징되는 것은 저항의식을 통한 자유의 쟁취다. 사자는 사회적 의무를 강요하는 용과 싸워서 이기는 자다. 얼핏 자유를 쟁취한 듯 보이지만 실은 용으로 대변되는 의무를 해체하는 데만 집착하는 자다. 그의 존재 이유는 용과의 투쟁에서만 의미 있을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거기서 더 나아가지 못하니 자유는 있으되 새로운 창조는 불가능하다는 얘기다. 한병철 교수가 말하는 성과 주체가 이에 해당하는 것 같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알아서 하는 성과 주체 역시 실은 진정한 자유인은 아니며 새로운 창조는 상상도 못 하는 그저 소진된 인간일 뿐이다.

나는 한교수가 근본적 피로와 함께 ‘놀이’를 얘기한 것은 니체가 말한 순진무구한 존재, 오로지 영원한 현재만을 사는 ‘어린아이’와 같은 삶을 살아야 한다는 역설로 읽었다. 사자가 용을 무찌름으로써 사회적 억압으로부터 자유를 얻었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이다. 새로운 창조를 위해선 어린아이가 되어야 한다. 망각의 능력을 지닌 어린아이는 놀이하는 그 순간만을 살며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만들어낸다. 니체는 그것을 스스로 굴러가는 수레바퀴라고 표현했다. 언제나 새로 시작할 수 있는, 어떤 일이 있어도 현재를 긍정할 수 있는 어린아이가 되는 것이야말로 현재 현대인들이 겪는 강박신경증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임을 말하고자 한 게 아닐까.

자기 긍정을 할 수 있는 어린아이만이 새로운 창조가 가능하다는 것, 이것이 니체가 ‘자기를 극복한 초인’에게 요구했던 자유정신이다. 결국 《피로사회》에서 우리에게 전하고자 한 메시지 역시 타자로부터 오는 압박이든 자기 자신으로부터 오는 강박이든 결국 우리 인간은 그것들과의 끊임없는 투쟁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 모든 것들로부터 벗어나 진정 자유롭고자 하나 거기에 가닿는 것이 그리도 어렵다는 것의 반증이기도 하다.

니체가 이탈리아의 토리노 거리에서 진창에 빠진 채 마부에게 채찍질당하는 말을 부둥켜안고 울었다던 일화는 유명하다. 이 세계를 긍정하고 자신의 운명을 사랑하는 초인이 되라고 말했던 니체 자신조차도 알았던 게다. 자신의 운명을 사랑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그러기 위해선 얼마나 큰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지를 보았던 거다. 매 맞는 말을 목격한 순간 느꼈을 니체의 절망이 인간적인 너무도 인간적인 우리의 자화상임을 부정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자기를 극복하고 영원한 현재를 살 수 있는 자유인이 되는 길은 그토록 멀고도 험난하며 그것이 결국 우리의 인생길임을 이 보랏빛 향기에서 새삼 느낀다. 그럼에도 고무적인 건 이 책을 덮던 순간에는 나 역시 카프카가 그랬던 것처럼 상처를 아물게 하는 치유의 피로를 상상했다는 것이다. 자기 세계가 없는 고독한 피로가 아니라 건강하고 세상을 신뢰하는 피로 말이다. 그런 피로라면 나는 그 가짜의 세계를 동경할 필요 없이 내가 몸담고 있는 이 진짜 세계를 다시 한 번 믿어보고 나 자신을 거기에 맡길 수 있을 것만 같다. 이것이 어쩌면 무거운 주제를 통해 현실을 직시하게 만든 이 《피로사회》가 내게 준 선물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