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오웰의 《1984》

인간의 언어와 무의식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예측하는 전문가들 사이에서 ‘통제사회’라는 표현이 자주 등장한다. 감염병에 의한 팬데믹을 건너오면서 거대한 국가의 힘이 개인의 자유를 통제하는 상황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도 흘러나왔다. 하지만 대체로 ‘코로나 19’라는 자연의 우연성으로부터 발현된 재앙 앞에서 인류가 다 같이 살기 위해서는 공적 영역에서 개인이 희생할 수밖에 없는 비상시국임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솔선해서 협조하는 모습까지… 참 눈물겨웠다.

‘통제사회’를 상징하는 보통명사로 굳어진 ‘빅브라더’가 부활할 것이라고 떠들어대는 분위기 속에서 조지 오웰의《1984》가 떠오른 건 어쩌면 당연하다. 덕분에 국가 권력에 의해 개인의 생활이 철저히 통제되고 간섭받는 전체주의 사회의 폐해를 실감 나게 다룬 디스토피아 소설의 현재적 의의를 생각해보는 기회가 됐다. 가슴 졸이며 다 읽고 난 뒤 자유세계에서 살아가고 있음에 무한 감사하게 됐었던 웃픈 기억도 함께 소환된 하루.

조지 오웰이 이 작품을 집필한 시기는 대략 1948년 즈음일 게다(출간은 1949년). 그 뒷자리를 살짝 바꾼 제목《1984》년이 소설의 시간적 배경이다. 1984년은 ‘오세아니아, 유라시아, 이스트아시아’ 이 세 강대국이 세계를 지배하고 있다. 오세아니아에는 ‘영국 사회주의’라는 사상 아래 ‘빅브라더가’가 이끄는 일당 독재정권이 세워졌다. 그리고 그 국가 구성원으로 ‘내부당원, 외부당원, 프롤(하층계급)’ 세 계층이 존재한다.

오세아니아의 내부당 지도자 ‘빅브라더’는 스탈린을 모델로 한 극단적 양면성을 지닌 가상의 인물이다. 가는 곳마다 ‘빅브라더가 당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문구가 써진 포스터가 붙어있다. 그리고 모든 공공장소와 집에는 쌍방향 송수신이 가능한 텔레스크린과 마이크로폰이 설치되어 있다. 한 치의 자유도 허용되지 않는 사회인 것이다. 

주인공 윈스턴 스미스는 오세아니아 정부의 ‘진리부 기록국’에서 근무하는 외부당원이다. 그가 하는 일이란 각종 기록물들을 당의 입맛에 맞게 수정하고 조작하는 일이다. 당에 대한 적개심을 가지고 있고 그 불온해서 위험한 생각들을 비밀일기에 기록하고 있는 자다. 사랑까지도 통제하는 국가에서 당에 대한 일종의 반항심리로 그는 같은 외부당원인 줄리아라는 여자와 목숨 건 연애를 하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내부당원 오브라이언이 반역자 색출을 위해 쳐놓은 덫에 걸려 둘은 사상경찰에 체포된다. 모진 고문 끝에 둘은 서로를 배반하고 결국 당이 원하는 인간형으로 세뇌되고 난 뒤에야 풀려난다. 그리고 결국…

조지 오웰의 소설은 일단 한 번 잡으면 다 읽을 때까지 손에서 놓을 수가 없다. 이번에 읽으면서도 또 한 번 느꼈다. ‘다시 봐도 역시구나.’ 매 순간 감시받는 일상 속 긴장감에 어김없이 내 가슴은 콩닥거렸고 마지막으로 갈수록 스멀스멀 찾아드는 우울감도 여전했다. 예전과 다른 점이라면 이번엔 윈스턴을 고문하던 오브라이언에 대한 노여움이 훨씬 강렬했다는 것(지금 우리가 분노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게 맞는 것 같다ㅠㅠ).

오전에 읽기 시작해서 ‘그는 빅브라더를 사랑했다’라는 소설의 그 슬픈 마지막 문장을 끝으로 책을 덮던 순간까지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정신까지 완벽하게 무너지던’ 주인공 윈스턴 스미스의 처참한 생을 따라가는 것 말고는. 아… 정말 무서운 사회, 우리에게 절대로 와서는 안 되는 사회…

이 소설 속에서 유독 나의 관심을 끈 건 역시 ‘신어(新語)’였다(누가 언어학 전공자 아니랄까 봐~). 빅브라더가 지배하는 오세아니아는 ‘구어’를 대체하는 ‘신어’를 만들었다. 기존 언어체계 속의 많은 단어들을 없애면서 최대한 단순화시킨 것이다. 그 목적은 단연 사고의 폭을 줄이는 데 있다. 사람들이 범할 수 있는 사상죄의 발생을 근본적으로 차단하겠다는 의도인 것이다.

프랑스 구조주의 인류학 창시자인 레비 스트로스는《슬픈 열대》에서 ‘인간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곧 언어에 대해 말하는 것이고, 언어에 대해 말하는 것은 곧 사회에 대해 말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 말을 통해 그가 말하고자 한 것은 인간은 언어를 통해 자기의식에 도달한다는 사실이다. 즉 언어를 매개로 개체에 대한 분별력을 갖게 되고 그 분별력을 통해 공동체, 즉 사회 집단으로부터 자기 자신을 의식하게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공동체 안에서 개인으로서의 의식을 갖게 된다는 의미다. 이것이야말로 빅브라더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랴. 자신이 지배하는 사회에서는 개인이 개별적으로 존재해서는 절대 안 됐다. 그러니 사고할 수 있는 힘을 지닌 언어까지 말살시켜야 했다. 

조지 오웰은 이처럼 신어라는 언어체계를 통해 체제에 저항하려는 생각 자체를 원천 봉쇄했던 전체주의 사회의 무서운 민낯을 보여주고자 한 것이리라. 라캉의 ‘무의식은 언어로 구조화되어 있다’는 사유와 오버랩되며 사람들을 무의식에서부터 철저히 통제하겠다는 빅브라더의 의지가 읽혀서 순간 오싹해졌다.

조지 오웰이 그린《1984》의 숨 막히는 전체주의 국가의 통제사회로부터 현실로 돌아와 내가 살아가는 이 사회를 생각해본다. 여기도 그에 못지않게 무서운 혼돈의 시대다. 우리는 지금 불확정성으로 가득한 시대에 살고 있다. 인류는 지금까지의 일상을 새롭게 해석해야 하는 시간 속에 놓여있다. 코로나19가 4차 산업혁명을 가속화시키고 있는 현재와 같이 IT 기반 기술에 의해 패러다임이 바뀌는 상황에서 인류가 직면하게 될 미래는 어떤 모습일지 고민이 깊다. 

AI가 인간의 노동을 대체하면서 노동력의 가치, 더 나아가 인간의 존재 이유가 점차 퇴색되는 시대에 우리가 생각해봐야 할 것이 있다. 그토록 과학 기술력을 자랑하던 인류가 팬데믹을 경험하면서 깨달은 게 있다. 인간 중심적인 세계에서 자연의 종을 지배하고 있다는 착각 속에 살던 인간은 자연의 변화에 무기력한 종으로 퇴보해버린 것은 아닐까. 이 시점에서 우리는 인간의 한계를 이야기하고 이 세계의 다양한 존재자들과의 관계 안에서 인간의 위치를 재정의해야 하지 않을까.

‘위기의 시절에는 우리 모두 사회주의자’라고 말하는 슬라보예 지젝의 말은 의미심장하다. 전 국민 기본소득 도입이 거론될 정도로 거대한 변화를 예고하는 미래사회는 단지 격리하고 생존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했다. 기본적인 공공서비스가 계속해서 기능해야 한다는 것이다. 연대를 위한 결단은 대단히 정치적인 것이고 지금이야말로 진짜 정치가 필요하다고 했다. 

앞으로 어떤 사회형태가 자유주의적 자본주의라는 신세계 질서를 대체할 것인가? 지젝은 국가와 법에 관한 칸트의 ‘복종하고 사유하되 생각의 자유를 지켜라’라는 가르침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고 했다. 이는 칸트가 ‘이성의 공적 사용’이라 부른 것이다. 다른 생태적 위협들과 함께 감염병들도 다시 돌아올 것이 확실한 이상 제대로 된 선택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냥 생겨났을 뿐이고 아무런 의도도 없는 감염병 앞에서 정당성을 얻는 생존주의적 조치들을 어떻게 해석하고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가 화두가 된 시대다. 강력한 국가 권력에 의한 통제사회의 도래에 대한 걱정에 앞서 더 근본적인 문제가 무엇인지 진지하게 사유해야 할 때인 것이다.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사회형태의 한 구성원으로서 더불어 함께 살아가기 위한 선택지 앞에서 그 우선순위에 대한 고민이 선행되어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