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그린 마일>

짧지만 가장 슬픈 길-그린 마일

“그린 마일(The Green Mile)”이라는 영화 얘기가 하고 싶어졌다. 이유는 모르겠다. 왜 아주 오래전 봤던 이 영화가 뜬금없이 떠올랐는지 말이다. 하지만 또 곰곰이 생각해보면 알 것도 같다. 요즘 뉴스만 보면 분노 게이지 높이는 일부 집단들의 행태로 인해 마음이 불편해서가 아닐까. 이 세상에서 매일같이 일어나는 그 이해할 수 없는 일들에 실망한 나머지 무기력해지고 지친 탓이리라.

“그린 마일”은 스티븐 킹의 동명소설을 영화화한 작품이다. 호러물을 잘 못 보는 관계로 스티븐 킹의 영화를 선호하지는 않지만 작가의 역량만큼은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만의 글쓰기 특징이 어쩌면 영화제작자들이 그의 소설에 매력을 느끼는 이유인지도 모르겠다. 유난히 장면 묘사에 뛰어난 작가가 아니던가. 그의 소설을 읽다보면 사건이나 인물보다도 디테일한 배경 설명에 굉장히 공을 들인다는 느낌을 받는다. 색채와 공간 등 전체적인 디자인 구성 묘사에 탁월한 그의 작품은 어쩌면 영상화하기에 최적의 조건일 수 있겠다 싶다. 

이 영화의 메가폰을 잡았던 프랭크 다라본트 감독은 그 이름만으로는 생경하게 들릴 지도 모르겠다. 그는 스티븐 킹의 또 다른 작품 “쇼생크 탈출”의 감독이다. 그 ‘희망이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는 주제를 그토록 멋진 영화로 보여준 감독 말이다. 영화의 대성공 후에도 여전히 겸손함을 잃지 않는 감독이 나는 참 좋더라. 그래서 스티븐 킹 작품 중 그가 만든 영화는 꼭 챙겨 봤다. “미스트”까지. 

인트로가 좀 길었다. 이제 “그린 마일”이라는 그 ‘짧지만 가장 슬픈 길’로 떠나보자. 

사형수가 감방에서 나와 사형 집행 장소까지 걸어가는 마지막 길을 ‘라스트 마일’이라고 부른다. 영화에서 주인공이 근무하던 교도소 E구역의 복도가 녹색의 리놀륨 바닥이라 ‘그린 마일’이라 부르게 되었단다. 이 영화는 대체로 미국의 판타지고 범죄 드라마로 회자되지만 내게는 킹의 몇 안 되는 따뜻한 휴머니즘의 영화로 기억된다. 영화는 노인이 된 폴 에지콤(톰 행크스)이 과거 사형수 감방의 교도관으로 있을 때 만났던 존 커피(마이클 클라크 던컨)라는 죄수와의 특별한 인연을 회상하면서 시작된다. 

배경은 1935년 대공황기 미국 남부 루이지애나에 위치한 콜드 마운틴 교도소다. 폴이 하는 일은 사형수들의 보호, 감독과 사형집행이다. 폴은 죄수들이 그들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편안하게 지내게 하려고 애쓰는 따뜻하고 인간미 넘치는 간수장이다. 어느 날 그곳으로 백인 쌍둥이 자매의 강간살해혐의로 사형선고를 받은 존 커피가 이송된다. 그는 병을 치유할 수 있는 초자연적 능력을 지닌 거구의 흑인 죄수다. 

어느 날, 요도염이라는 고질병으로 고통 받고 있던 폴은 일하던 중 복도에 쓰러지고 존이 그의 병을 감쪽같이 치료해 준다. 그뿐인가. 사형집행이 얼마 남지 않은 사형수가 애지중지 키우는 생쥐를 못된 간수가 밟아 죽이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미 존의 심상치 않은 능력을 경험한 폴은 그 쥐를 존에게 건네고 존은 또다시 기적을 보여준다. 쥐가 다시 살아난 것이다. 그렇게 존과 친해진 폴은 존이 교도소장 부인의 뇌종양을 치료하도록 한다. 

그 일련의 과정에서 폴은 어린아이와도 같이 순수한 존이 ‘정말로 사람을 죽였을까’ 의심하게 된다. 사실은 범행을 목격하게 된 존이 쓰러진 쌍둥이 자매를 살려보려고 하다가 현장에서 붙잡힌 것이다. 존의 신비한 초능력에도 불구하고 죽은 사람은 살릴 수 없었던 것. 그 당시는 인종차별이 극심했던 시대인지라 흑인인 존은 담당변호사로부터 제대로 된 변호도 받지 못하고 억울하게 살인누명을 쓰고 사형선고를 받게 된 것이다. 

특별하다는 건 상실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 피부색도 체구도 일반인과 다른 그 특별함에서 그의 삶이 얼마나 고단했을지 상상이 되고도 남았다. 사형집행 이틀 전 폴이 무고한 존을 살리고 싶은 마음에 어떻게 해주면 좋겠냐고 물었을 때 존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지쳤어요 비 맞은 참새처럼 외로이 떠도는 것도, 친구 없이 살아가는 것도 지쳤어요. 무엇보다 인간들의 온갖 추한 작태와 세상에서 매일 보게 되는 고통으로 항상 내 머리 속에서는 유리가 깨지는 것 같아요.”

이 말을 하는 존의 뺨을 타고 흐르던 눈물이 내 가슴을 아릿하게 적시며 아팠다. 할 수만 있다면 화면을 뚫고 들어가 존의 손을 잡아주고 토닥여주고 싶었다. 그렇게 존은 그린 마일을 지나 죽음과 마주했다. 사람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전기의자에 앉은 존에게 폴은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없냐고 묻는다.

“이런 사람이라 미안합니다.”

아… 그 장면이 얼마나 슬프던지. 정말 많이 울었던 것 같다. 죄 없는 존이 왜 사과를 해야 하는지… ‘이런 사람’은 또 어떤 사람인지… 그 순간에는 정말 존이 그리스도의 운명과 많이 닮아 있다는 생각을 했다. 


영화는 3시간의 긴 러닝타임 동안 교도소의 간수와 죄수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에피소드와 다양한 인간 군상들 각각의 사연에 존이라는 인물이 갖는 판타지적 요소를 덧입혔다. 감독의 강점인 따스하면서도 절제 있는 연출의 힘은 이번 영화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됐다. 영화 마지막에 흘러나오던 주인공의 내레이션처럼 우리 모두는 각자의 시간에 맞춰 그린 마일을 걷게 될 것이다. 죽음 앞에서는 누구도 예외일 수 없다. 지금 나 역시도 나만의 라스트 마일을 향해 한 걸음씩 나아가고 있는 것이리라. 

우리가 그린 마일의 끝에서 자신이 살아온 삶을 되돌아볼 때 최소한 스스로에게 떳떳하게는 살아야 하지 않을까. 지금 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많은 일들, 우리 인간이 매일 저지르는 부끄러운 일들은 또 누군가의 희생을 요구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두려워졌다. 무지하고 이기적인 인간들이 만들어내는 이 혼돈의 세상은 어쩌면 우리 죄를 속죄해줄 제 2의 존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던 걸까? 나는 지금 이 까만 밤에도 ‘오늘 문득 이 영화가 소환된 이유’를 또다시 곰곰 생각하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