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라 웨스트오버의 <배움의 발견>

가족이라는 애증의 그 이름

작년일 게다. 내가 즐겨보는 “Bill Gates” 채널에서 빌 게이츠가 저자와 나누던 대화 2분 남짓 짧은 영상에서 내 눈에 담겼던《Educated》. 곧바로 한국에도 출간됐는지 검색해봤던 기억. 그렇게 번역서《배움의 발견》을 ‘책 위시리스트’에 적어놓고는 한동안 잊고 있었다. 그제 아침, 랜선으로 자주 만나던 선배가 요즘 온라인 그 어디에서도 내가 보이지 않는다며 잘 사냐고 물었다. 그리고《배움의 발견》 읽었냐고. 침잠하는 나를 위한 응원 받고 바로 주문. 저녁 7시, 나는 어느새 첫 장을 넘기고 있었다(택배 기사님, 덕분입니다~꾸벅).

주인공 ‘타라’는 아버지의 모르몬교에 대한 왜곡된 종교적 신념과 망상 때문에 열여섯이 되도록 공교육과 현대 의학의 혜택을 누려보지 못했다. 그녀가 지옥 같은 집으로부터 대학으로 탈출해 자신의 삶을 찾아가는 성장소설 같은 에세이다. 나와 동시대를 살아가는 게 맞나 싶게 너무도 현실과 괴리된 삶을 살아냈던 타라의 가슴 아픈 ‘역사적 현재’와 함께 하며 나는 ‘기억’이란 것에 대해 생각해본다.

오빠에게 손목이 꺾이고 변기에 처박히는 미친 폭력 앞에서 소녀는 운다. 아파할 심장이 있는 그런 약한 자신이 밉다며 운다. ‘나는 아파서 그냥 울고 있을 뿐이야. 다른 이유가 아니야. 그냥 손목이 아파서야.’ 그날 밤의 기억, 이후 10년 동안 그와 같은 숱한 밤들의 기억을 규정하는 순간이었다. 자신의 삶에 그토록 큰 영향을 준 그 무서운 경험을 애써 부정하는 타라의 마음은 뭘까?

오빠의 폭력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해주지 않는 아빠와 엄마에 대한 기억도 다 그런 방식으로 자기를 기만하며 부모를 원망하지도 못하는 주인공이 애처로웠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폭력에도 불구하고 타라는 가족을 잃고 싶지 않았다. 죽이고 싶어지는 그 정직한 감정을 인정하는 게 두려웠던 거다. 가족을 미워하는 자신이 더 싫었던 거다.

나는 바보 같은 타라가 이해가 됐다. 누군가를 미워해야 하는 상황에서도 그 책임을 자신에게 돌리는 게 더 편할 때가 있다. 나만 괜찮으면 정말 다 괜찮을 것 같은 그런 착각. 어쩌면 그게 살기 위한 몸부림일 수도 있다. 많은 이들의 도덕적 기준에서 가족을 미워하는 건 죄책감까지 덤으로 오는 더 힘든 일이기에.

어딘가엔 꼭 있을 것 같은 내 잘못을 찾아 인정하고 나면 상대방의 입장이 너무도 이해되는 거다. ‘그래, 그럴 수 있었겠네.’ 그러고 나면 차라리 마음은 편해지니까.  

‘배움’, ‘성장’에 대한 키워드가 먼저일 것 같은 책에서 아스라한 ‘기억’을 조각하는 나를 발견한다. 예전엔 이해할 수 없었던 많은 일들이 다 그럴 수 있었겠다 싶은 생각에 화는커녕 뜬금없는 미안함이 밀려온다. 나는 대체 뭐가 미안한 것일까? 이런 나를 보면 내 큰언니는 또 나무랄 게다. “제발 다른 사람 입장 이해하기 전에 네 아픔부터 먼저 봐.”

책을 읽는 내내 나도 타라에게 말해주고 싶었다. ‘미워해도 된다고. 그렇게 나쁜 부모, 못된 오빠를 이해하려고 애쓰지 말라고. 그냥 밉다고 말하라고.’ 그것이 타라가 진정 자유로워지는 길이며 그래야만 언젠가 하고 싶어질지도 모를 ‘용서’라는 것도 가능해지지 않을까.

그래, 나도 ‘기억 미화 금지!!’

2 thoughts on “타라 웨스트오버의 <배움의 발견>”

  1. 배움의 발견~ 저도 읽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누군가를 미워한다는 것이 나의 감정에너지를 얼마나 갉아먹는 일인지 알기에
    포기하고 사니 편해진 적도 있네요. ㅎ

    워드프레스에서 소통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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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니.. 우리 셔니조님이 다녀가셨군요. ㅎ 반갑고 고맙습니다.
      앞으로 서로의 글도 읽어주고 공감도 하면서 그렇게 자주 소통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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