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서’에 대하여

이 세계는 ‘물질’로 이루어졌다? ‘혼돈과 질서’로 이루어졌다? ‘질서’, 참 막막하다. 뭘 써야하나? 그래서 괜히 이 세계를 끌고 들어와 봤다.ㅎㅎ 이렇게 혼돈일 때 내가 하는 일은 그 단어를 유심히 관찰하는 일이다.

그래서 또 들여다본다. ‘질서’의 한자 ‘秩序’ 이 두 글자를. ‘차례 질(秩)’, ‘차례 서(序)’다. 혼란이 없도록 사물의 순서나 차례를 정해놓은, 혹은 그것이 지켜지는 상태? 이것이 ‘질서’의 사전적 정의일 테다. 한 마디로 ‘줄 세우기’?

그러면 ‘질서’의 영어 단어 ‘order’는? 라틴어 ‘ordinem’에서 왔단다. ‘열, 지위, 연속, 정리하다’ 등등 뭐 대충 이런 의미인데, 이 말이 원래는 베틀(loom)에 나열된 실들을 의미했다는 게 흥미롭다. 그리고 점차 사람들이 지배자들 아래 얌전하게 정렬해 있는 모습의 은유로 확장되었다가 자연에도 일련의 계급구조가 존재한다고 추정하기에 이르렀다는 거다. 뭐라? 내 눈은 ‘추정’이라는 글자에 꽂혔다. 인간이 만들어낸 것? 여기까지 오고 보니 떠오르는 단어 하나, ‘범주(category)’!!

언어학을 공부하던 시절, 『의미론』 책을 펴면 가장 먼저 나오는 개념이 ‘원형이론과 범주화’였다. 원형이론은 자연 범주가 계층적인 구조를 이루고 있고, 원형이란 그 범주를 대표할 만한 가장 전형적이고 중심적이며 이상적인 좋은 보기를 의미한다. 이 개념을 언어학자들이 세련되게 수정하면서 언어이론으로의 접근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범주화 논의는 철학을 비롯하여 언어학, 생물학 등 모든 학문적 역사와 함께 시작되었다. 즉 범주화는 이 세계를 의미 있는 분절로 나누어 파악하는 장치이다. 우리가 경험하는 사물이나 개념, 현상을 ‘낱말’이라는 단위를 통해 분류하거나 무리 지어 이해하는 방식으로서, 그 결과가 언어적 분절 단위인 ‘범주’인 것이다.

그렇게 모든 고등한 인지활동의 근본이 범주화였다는 얘기다. 그러니 우리 눈에 들어오는 것이면 무엇이든 우선 구분하고 나누고 또 무리 짓는 게 너무도 당연했던 거다. 우리 인간에게는.

사실 이 세계라는 게 인간의 통제 하에 들어올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인간은 그동안 끊임없이 자연의 모든 사물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마음대로 범주화해왔다. 그렇게 분류에서만 끝나면 좋았으련만 더 나아가 어떻게든 그것들을 통제하고자 했던 거다(이런 분류 본능이 자연에서 인간으로 옮겨오며 타자에 대한 시선으로 발전하고 거기서 나 아닌 저들 집단, 저들 인종… 하며 그들에 대한 억압과 지배가 시작된 게 아닐까ㅠㅠ).

이 ‘분류’라는 게 따지고 보면 바로 혼돈에 질서를 부여하는 일이 아니던가. 물론 그 안에는 어떤 신념이 자리하고 있었을 게다. 자연에는 신의 계획이 숨어 있고 그러니 그 피조물들을 위계에 따라 질서 있게 배열하기만 하면 신의 도덕적 계시가 임할 것이고, 인류는 또 그렇게 진보할 수 있으리라는 강한 확신 말이다.

그렇다면 이게 어쩌면 인간이 이 세계를 이해하고자 하는 기본적인 욕구가 아니었을까? 그 덕분(??)에 우리는 지금 이렇게 문명사회에서 살아가고 있으니 말이다. 그 과정에서 자연에 질서정연한 무언가가 있으리라는 추측도 가능해졌을 테고. 그것은 자연을 인간이 통제할 수있는 그 어떤 것으로 대상화했다는 의미일 게다. 결국 자연을 연구대상으로 설정하고 그것을 극복하고 그 안에서 조화롭게 살고자 했던 노력의 정점이 근대이고, 우리는 그것을 과학이라 부르지 않던가.

이 세계는 그렇게 진보해왔다. 나날이 고도화되는 과학기술에 힘입어 자연에 대한 지배력을 극대화하면서. 그리고 그 안에서 인간의 삶은 더 풍요로워지고 행복해졌다고 사람들은 믿어왔다. 하지만 이것이 착각이라며 새로운 세계관을 주장하는 이가 나타났다. 제레미 리프킨이다. ​바로 『엔트로피』의 저자다. ‘엔트로피가 항상 증가하거나 일정하게 되는 방향으로 자연 과정은 진행한다’는 열역학 제 2법칙에 근거해 근대 자본주의 문명과 철학, 즉 근대 기계론을 공격하는 바로 그 책. 흔히 ‘무질서도’라고 부르는 그 ‘엔트로피’다.

혹자는 이 ‘무질서’는 원자의 입장이 아니라 관찰자의 입장에서 본 거라며 적절하지 않다고 반박한다. 그 원자 자체의 관점에서는 자유가 증가한 것이므로 ‘무질서의 정도’가 아닌 ‘자유의 정도’라 불러야 한다고 말이다(자유든 무질서든 이 개념의 문제는 ‘과알못’인 나에겐 그다지 중요치 않노니… 아니지? 회의주의적 삶의 태도로 살련다 했지..ㅎㅎ 음.. 그럼 다시 엔트로피 법칙을 더 꼼꼼히 살펴보겠어~^^). 아무튼!!

이 세상은 점점 무질서해지는 과정 속에 있다고 보는 견해들이 존재한다는 거다. 무용한 에너지가 많아지고 있다는 것, 기술은 유용한 에너지를 무용한 에너지로 바꾸는 ‘변환기’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결국 이 세상의 모든 기술은 자연이라는 창고에서 꺼낸 에너지의 형태를 바꾸고 있을 뿐이라고. 무용한 에너지가 늘어날수록 그 ‘계’는 무질서해진다는 그런 주장인 거다. 이 부분은 기후위기의 시대를 살아가는 현재 내가 유독 그렇다고 믿고 싶고 공감하게 되는 대목이다.  특히 근대 자본주의를 비판하며, 우리 삶의 형태까지도 바꿔야 한다는 그의 말은 열역학 제 2법칙을 오해했다는 지적에도 불구하고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하겠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지구 너머 저 광활한 우주는 어떤 정연한 질서 속에서 순조롭게 운행되고 있는 지도 모른다. 아마도 그럴 것이다. 하지만 대형 망원경이 아닌 현미경 렌즈를 우리 인간 세계로 옮겨와도 과연 질서라는 게 그 안에서도 조화롭게 작동하고 있을까? 가장 절대적인 그 무엇으로 믿어온 과학적 진리에 대해 의문을 한 번 제기해봐도 되지 않을까? 그것이 정말 우리 인간 사회에 최선이었는지를 말이다. 아무리 객관성으로 무장한 과학이라 할지라도 결국 그것 또한 우리 불완전한 인간이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눈에는 오류가 있을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진화론의 기초를 확립했던 영국의 생물학자 찰스 다윈이 하고자 했던 말이란다. 그 복잡다단한 생태계를 우리 인간이 어찌 다 이해할 수 있으랴. 우리 인간의 관점에서 불편할 수 있는 것들이 다른 종이나 이 생태계에는 얼마든지 이로울 수 있다는 거다. 그러니 생물에 질서를 부여하는 유일한 기준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인간을 그 가장 꼭대기에 우월한 존재로 상정하고 마음대로 그 아래에 이 자연을 분류했던 범주들을 한 번 의심해봐야 한다는 얘기다. 그동안 우리가 사실이라고 굳게 믿었던 것들이 어쩌면 당연한 것이 아닐 수 있다는 것. 하지만 우리에게 너무 익숙해진 기존의 질서를 버리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이 불합리하고 틀렸다는 것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우리 사회에서 가장 전형적이고 이상적이라고 주입하는 그 원형을 부정하는 건 그토록 어렵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버렸을 때 우리가 보게 되는 것이야말로 진짜란다. 나는 이것을 니체에게서 배웠다.

니체의 철학을 한 마디로 요약하라면 ‘모든 가치의 전도’다. 우리가 기존에 알고 있던 모든 상식을 다 깨부수고 새로운 가치를 만들었다는 얘기다. 지금까지 너무 당연시되던 것들을 그 근본부터 파고들며 새롭게 해석하고 다른 눈으로 볼 수 있는 관점의 전환을 가져온 사람이 바로 니체다. 그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의 모든 인식은 해석임을깨닫게 된다. 사람들 각자의 눈 속으로 들어온 이 세계는 수만 가지의 빛깔로 채색된 풍경일 수 있다. 천 개의 눈에 담긴 천 개의 해석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가 굳게 믿어왔던 기존의 가치와 질서를 전복하고 해체시킨 철학자가 바로 니체였다.

마치 니체의 생각이 옳았다고 증명이라도 하듯,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의 저자 룰루 밀러가 과학적 진리와 사회적 질문을 아주 탁월하게 접목함으로써 기존 질서에 함몰된 우리에게 짜릿한 자각을 선물해주었다. 내가 ‘분류학’에 관한 과학 이야기를 이렇게 재미있게 읽다니… ㅎㅎ 그녀는 말한다. 우리는 우리를 둘러싼 세계를, 우리 발밑의 가장 단순한 것들조차 거의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고. 우리는 전에도 틀렸고, 앞으로도 틀리리라는 것. 진보로 나아가는 진정한 길은 확실성이 아니라 회의로, ‘수정 가능성이 열려 있는’ 회의로 닦인다는 것. 이 글을 쓰다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지난 주 지식과 편견의 2부 격인 글을 쓰고 있구나. 지금 내가…ㅎㅎ’ 그렇다. 그 연장선으로 이해해도 되겠다. 결국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부여된 질서가 편견일 수 있다는 얘기일 테니.

내가 니체를 만나면서부터 의심하는 법을 배웠다면, 룰루 밀러는 그것이 맞다고 응원해주었다. 기존의 범주를 버릴 때, 기존 질서에 과감하게 저항했을 때 진짜 세상을 보았다지 않는가. 그것도 아주 근사한 세상을 말이다. 나도 좀 더 나은 세상으로의 희망을 처방받고 싶어졌다. 룰루 밀러가 물고기를 포기했을 때 좋은 것들이 기다리고 있다는 약속을 얻었듯이 말이다. 나도 그럴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을 담아 그녀의 말을 다시 한 번 되뇌어 본다. 파괴와 상실과 마찬가지로 좋은 것들 역시 혼돈의 일부라던 그 말을. 죽음의 이면인 삶,부패의 이면인 성장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