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오는 길목에서

오랜만에 천변을 따라 걷는다. 눈부시게 푸르렀던 여름날을 떠나보내고 참 지독히도 외로운 이 길 위에 또 내가 섰다. 어느새 내 곁에 살포시 내려앉은 쓸쓸함 위에 짙은 아릿함 덧칠하고 이 길 위에 또 내가 있다. 어김없이 사람을 외롭게 만드는 이 계절의 변화가 또다시 오고야 말았다.

가을이다. 가을엔 아픔까지도 아름답다고 했던가. 가슴 한 켠 주머니 가득 그리움 품고 홀로 걷고 또 걷는다. 정처 없는 내 발길 따라 흔들리는 길가의 코스모스, 그 옆에 수줍게 얼굴 내민 천연빛깔 작은 꽃들… 이 예쁜 꽃들 보며 걷는 이 순간이 무색하게도 우울감에 침잠하던 내 마음 속에 가을은 정녕 오고야 말았다.

계절 탓을 하고 싶은 모양이다. 내 일상이 이리도 공허한 이유를 찾다가 문득 ‘가을, 너였어’하는 기분이랄까. 난 참 가을이 좋은데 가을이 싫다. 이건 마치 ‘너는 정말 평범한데 아주 특별해’ 라고 말하는 것처럼 갸웃하게 만드는 말이지만 내 솔직한 심정이다. 정말 가을이 너무 좋은데 싫은 이 마음을 표현할 방도가 없다. 

이렇게 마음이 허전할 땐 부치지 못하는 편지일망정 누군가에게 편지를 썼고, 후회가 밀려오는 밤이면 반성하는 의미로 일기를 썼다. 그리고 더 많은 날들을 혼자만의 자기 고백적 글로 끄적였다. 난 꼭 뭔가를 잃어버린 것만 같다. 소중했던 것들이 한 순간에 내 곁에서 사라져버린 것처럼 마음 한 켠이 아릿하다. 그러면서 자주, 그리고 많이 슬프다. 

이 깊이를 알 수 없는 허무 속에서 허우적대는 와중에 스멀스멀 떠오르는 생각 하나.. ‘사람을 잘 모르겠어’다. 누군가 그러더라. 철학서를 많이 읽으면 ‘우리 인간이 참 별로’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면서 마음이 편해진다고. 타인에게 더 이상 기대하지 않게 되니 삶이 조금은 쉬워진다고 말이다. 

내 삶이 혹시라도 조금 편해질까 싶어 미친 듯이 읽는다. 그런데 나는 읽으면 읽을수록 사람에 대한 실망은커녕 연민만 짙어진다. 자기 안에 지옥 하나씩을 갖고 사는 비극적 존재인 인간을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될 것만 같아서다. 누군가를 이해 못하는 이유를 타인에게서 찾는 게 의미 없다는 걸 깨닫는 요즘이다. 

그저 ‘그냥 있는 존재’로서의 인간이 더 나은 가능성(자유)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타자가 내 삶으로 들어오게 된다. 인간이 자유를 갈망하면 할수록 타자의 시선에 갇히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불안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시선은 결코 타자가 만드는 게 아니라 나 자신이 만든다는 것. 내 속에 지옥이 있다는 거다. 

누굴 탓하랴. 내가 범인인 것을. 내 안에 깃든 불안을 평생 안고 가야 하는 ‘나’라는 존재가 편안해질 방법은 거의 없다. 그저 이렇게 부족하고 가엾은 나를 조금 더 토닥이며 사랑하는 수밖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