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폴 사르트르의 《구토》

존재의 낯섦에 대하여

1938년에 발표된 사르트르의 《구토》는 앙트완 로캉탱이라는 주인공이 쓴 일기체 형식의 장편소설이다.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구토》는 전통적인 소설 형식을 파괴한 앙티 로망(anti-roman:반소설)의 선구적인 작품으로 평가된다. 

소설 《구토》의 저자인 장 폴 사르트르를 한 마디로 소개하라면 나는 ‘철학과 문학의 경계를 넘나드는 프랑스의 사상가’라고 말하고 싶다. 그리고 현상학과 해석학의 영향을 받은 작가이기도 한 그를 대표하는 한 문장을 꼽으라면 단연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는 말일 게다. 실존주의 철학의 선언과도 같은 이 명제는 ‘존재에 대한 낯섦’을 탁월하게 표현한 작품 《구토》를 관통하는 주제이기도 하다. 

여기서 실존이라 함은 ‘그저 있음’이요, 본질은 ‘존재 이유와 목적’이다. 사르트르는 이 세상의 모든 사물은 그 본유의 목적에 맞게 인간에 의해 부여된 본질이 있다고 본다. 반면 그저 우연히 내던져진 존재인 인간에게 본질은 없다고 말한다. 즉 인간은 아무런 목적 없이 이 세계에 던져진(피투:被投) 채로 그저 살아갈 뿐이라는 것이다. 

《구토》에서 ‘그저 있음’의 시간성만을 다룬 사르트르는 이후 작품 《존재와 무(1943)》에서는 기획 투사(자신을 기획(企劃)하여 미래에 투사(投射)하는 것, 즉 자신의 존재 가능성에 스스로를 던져 그것을 자기 것으로 만듦으로써 자신을 새롭게 구성하는 행위)를 통해 실존을 창조해가는 인간에 대해 본격적으로 천착해 들어간다. 그런 의미에서 좀 더 깊이 있는 이해를 위해 이 두 작품을 함께 읽어도 좋을 듯하다. 

《구토》의 주인공은 서른 살의 역사 연구원 앙트완 로캉탱이다. 그는 부빌이라는 항구도시에서 18세기 프랑스혁명 당시의 인물인 드 롤르봉 후작의 전기를 쓰기 위해 자료를 연구하고 있다. 그의 일상은 지극히 단순하고 무료하기 이를 데 없다. 그는 도서관과 카페를 오가며 그 누구와도 깊은 관계를 맺으려고 하지 않는 아주 고독한 사람이다. 도서관에서 만난 ‘독학자’와의 의미 없는 대화와 철도회관이라는 곳의 사람들과 유지하는 최소한의 사회적 관계가 다인 삶이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바닷가에서 물수제비를 뜨려고 돌멩이를 줍는 순간 어떤 불쾌한 감정에 휩싸이게 된다. 그 이후로도 카페에서 컵에 담긴 맥주를 보고, 또 남자의 주름진 셔츠에서도, 지나가다 벽을 보고도… 거의 모든 곳에서 지속적으로 그런 감정을 느낀다. 그는 나중에 그 불쾌감이 바로 구토라는 것을 깨닫는다. 즉 어떤 특정 사물과 직면할 때마다 알 수 없는 불안과 함께 구토 증세가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한 구토의 원인을 찾기 위해 그가 쓰기 시작한 약 한 달간의 일기가 바로 이 소설의 중심 내용이다. 일기체를 표방하면서도 굉장히 창의적인 스타일의 글쓰기를 보여주는 이 작품에서 중요한 건 단연 시간성의 개념이다. 그래서 소설을 읽다 보면 하이데거의 시간에 대한 사유가 작품 곳곳에 배어있어 자연스레 그 향기를 따라가게 된다. 

그러면 이 소설에서 ‘구토’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로캉탱이 어디를 가든지 느끼는 구토 증세는 생리학적 현상이 아닌 존재론적 개념으로 이해해야 한다. 구토는 ‘인간이 그 자신을 포함한 세계의 모든 존재가 지닌 본래적 모습과 마주했을 때 느끼는 낯설고 부조리한 감정’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서 사물과 자신의 인식 사이에서 불일치를 느낄 때 구토가 일어난다. 실존의 부조리에 대한 낯섦이 구토를 일으키는 것이다. 

주인공 로캉탱이 하는 일이 ‘드 롤르봉이라는 역사적 인물의 과거 기록 정리’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인간은 다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과거를 역사로 만들어 의미 부여하지만 그 역시도 무의미하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함이 아닐까 싶다. 하이데거의 시간성에 따르면 우리는 과거 현재 미래를 동시에 산다. 어떤 인간도 과거만을, 혹은 미래만을 살아갈 수 없다는 것. 현재 속에서 과거에 빠져 사는 자도 있지만 시간성은 과거 현재 미래가 함께 있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과거조차도 그가 살아온 경험이 아닌 말의 잔해일 뿐이므로 과거와 합일점을 찾는 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결국 로캉탱은 한 사람의 과거를 거슬러 올라가 그의 전기를 쓰는 것이 무의미하다고 판단하고는 롤르봉의 연구도 포기한다. 과거는 매 순간 우리 실존 가운데서 해체될 뿐이며 과거와 미래를 포함하는 현재의 시간성만이 중요하다는 깨달음인 것이다. 

하이데거는 우리 인간에게 주어진 시간은 현재밖에 없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그 현재를 온전히 살아갈 수 없다고 했다. 언젠가 나는 사르트르의 ‘인간은 자유라는 저주를 받았다’는 말이 바로 매 순간을 오롯이 살아내지 못하는 인간을 의미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 사르트르의 저 문장을 접했을 때 그 의미를 이해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자유’와 ‘저주’가 미스매치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는 알 것도 같다. 이 세계에 내던져진 존재로서의 인간은 삶에 대한 의미부여도, 또 존재 이유를 찾는 것도 스스로 짊어져야 한다. 그러므로 자유는 막중한 책임감이라는 무게를 견뎌야 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는지.  

인간에게 주어진 유일한 시간인 현재를 잘 살아내는 방법은 우리 행위의 모든 것에 대한 건강한 책임감을 바탕으로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는 것이다. 우리의 실존은 바로 우리 스스로가 창조해야 하기에. 사물은 인간이 의미화한 대로 본질로서 존재할 수 있지만 인간에게는 본유적 목적이 없으니 그 존재 이유도 스스로 찾아가야 함을 얘기하고자 한 것이 아닐까 싶다. 

우리가 당연시하던 일상이 어느 날 갑자기 전혀 다른 생소한 모습으로 다가오기도 하고 그토록 가깝던 가족에게서도 어느 순간 거리감을 느끼게 된다. 부모에게서도 친구에게서도 양가감정을 느끼는 순간이 찾아오면 우리는 혼란에 휩싸인다. 이처럼 우리 삶에서 누구나 느끼는 ‘존재에 대한 낯섦’을 사르트르는 ‘구토’라는 단어로 형상화한 것이다. 소설 《구토》는 인간의 내던져져 있음을 극단으로 몰아치면서 인간 실존을 철저하게 해체하고 거기서 새로운 의미를 추구하고자 했던 작품이다.

내가 오래 전에 읽었던 《구토》가 정말 사르트르의 《구토》는 완전히 새로운 모습으로 나에게 왔다. 한 마디로 ‘낯섦’이라는 감정을 완벽하게 경험한 계기였다. 이 과정에서 나는 ‘생경함’이란 단어로도 표현 가능한 이 ‘낯섦’은 분명 내 성장의 또 다른 이름이라고 믿었다. 《구토》에서 ‘주인공이 순간순간 느끼던 낯섦’은 결국은 우리 인간의 변화와 발전 혹은 성장이라는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사르트르가 말한 ‘구토’는 분명 ‘인간 존재의 부조리’를 의미했지만, 로캉탱이 일기를 쓰는 이유는 결국 사물과 자신이 변해가는 모습을 보여주기 위함이 아니었던가. 피투(被投)된 인간으로서 뭔가를 끊임없이 찾아 존재의 빈틈을 채우면서 점차 발전해가는 것, 이것이 어쩌면 부조리에 대항하는 정당한 방법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