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경의 <자연사박물관>

온 마을이 빛으로 연결된

이산하 시인의 아물지 않는 생의 한 모퉁이에서 벗이 된 이수경 작가님의《자연사박물관》을 읽었다. 7편의 단편으로 구성된 소설집이다. 작가님은 재미는 없노라 겸손해 하셨지만 재미로만 읽기에는 소설 속에 담긴 고단한 삶들이 너무 아팠다. 

공장에서 일하다 다치고도 보상은커녕 해고를 당하자 목숨을 끊은 한 외국인 노동자. 그 안타까운 죽음에 대한 애도에 그치지 않고 노조를 결성해 불합리한 회사에 대항하는 공장 노동자 남편. 그로 인해 생계의 불안을 고스란히 떠안은 비정규직 상담직원 아내. 이들의 희망 없는 팍팍한 삶의 모습들이 아주 담담하게 그려진다. 너무 정직해서 슬픔이 배가된다고나 할까.  

이 부조리한 세상을 살아가는 그들의 불안이 내게도 전염되었나보다. 내 안에서도 깊은 분노가 인다. 눈부신 경제 성장에 힘입어 화려함을 뽐내는 자본주의는 이처럼 음지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눈물 겨운 희생을 전제로 한다. 소설 속 화자가 던지는 “공장은 누구의 것인가”라는 질문에 순간 울컥하게 되는 이유다. 

한국 사회도 자본주의의 산물인 사회적 불평등과 양극화는 물론 ‘페티시즘’이라 불리는 물신론(物神论)이 교육과 의료 등 공공분야에까지 만연해 있다. 신자유주의 물결이 일던 자본주의의 메카 미국에서 마르크스의 유령들을 소환하며 자본주의를 비판했던 자크 데리다가 떠오르는 건 당연하리라.

최근 택배기사들의 잇따른 죽음을 보면서 택배노동자들의 산재보험 적용, 과로사 문제 등 제도적 개선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다. 택배회사들의 안일한 대응으로 열심히 산 죄밖에 없는 이들에게 비극이 되풀이되는 것을 더 이상 좌시할 수 없다는 얘기다.    

다함께 잘 사는 사회는, 그래서 더불어 행복한 삶은 정말 이상적 꿈에 불과한 것일까? 중국 작가 라오서는 소설 《낙타상자》에서 이런 말을 했다. “비는 부자에게도 내리고 가난한 사람에게도 내린다. 의로운 사람에게도 내리고 의롭지 않은 사람에게도 내린다. 그러나 사실 비는 공평하지 않다. 왜냐하면 공평하지 못한 세상에 내리므로.” 

단편 〈고흐의 빛〉에 나오는 어린 친구 ‘재이’에게도 우중충한 집이 아닌 빛나는 아침을 맞을 수 있는 그런 보금자리가 생겼으면 좋겠다. 그러려면 우리가 ‘잠자는 토끼도 깨워서 함께 가는 거북이’가 되어야 한다. 우리 사회의 불편한 진실에 눈감지 않아야 한다. 세상에 누구 하나 귀하지 않은 삶은 없으니까. 

어느 날, 재이가 햇볕 드는 따뜻한 집으로 이사하면 고양이 한 마리 선물하고 싶다. 지금처럼 물이 역류하고 추운 집에선 재이가 좋아하는 고양이를 키울 수 없으니 말이다. 그런 날이 꼭 왔으면 좋겠다. 조금 늦더라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