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산하의 <악의 평범성>

아물지 않는 생의 한 가운데서

가을 언저리에서 이산하 시인의 에세이 《생은 아물지 않는다》를 만났다. 책 읽는 동안 얼마나 자주 가슴이 뜨거워지고 울컥하던지. 무겁고 아팠기 때문이리라. 그 100편이 넘는 단상마다 댓글난이 있다면 일일이 답하면서 함께 나누고픈 얘기들 마음속에 되뇌며 그렇게 오랜 시간 읽고 또 읽었다. 

아주 오래전 읽었던 ‘한국현대사 앞에서 우리는 모두 상주’라는 시인의 외침이 너무도 아릿하게 스며오는 제주4.3 장편서사시《한라산》. 슬픈 《한라산》은 시인이 꿈꾸던 세상과 실존적 고뇌 속에서 태어난 시다. 그리고 《한라산》에 오를 때보다는 조금 가볍게 만난 문학소년 ‘철북이’. 헤어질 땐 아주 큰 울림을 주고 떠났다. 《양철북》은 시인의 자전적 성장소설로서 주인공 양철북과 법운스님이 여행하며 주고받는 대화가 압권이다. 그들이 여행 중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는 또 얼마나 멋진 덤이던가. ‘양철북’이라는 이름엔 ‘세상에 침묵하고 방관하는 자들의 의식을 두드리는 영혼의 북소리’를 갈망했던 시인의 삶에 대한 방향성이 투영되어 있었다. 

시간은 흘러 신간 에세이를 통해 시인을 다시 만났다. 약자를 향한 시선은 여전히 거둬지지 않았고 오히려 더욱 강력하게 그들을 대변하고 있는 듯했다. 어느 생이든 늘 먼저 베인다는 시인의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져왔다. 책을 읽고 난 후 나에겐 미션이 생겼다. 시인의 단상에 나의 진심을 담아 댓글을 달자. 나 역시도 시인의 고뇌에 공감하며 차오르는 단상이 가슴 한 가득이므로. 나만의 소심한 방식일지언정 옳다고 믿는 삶의 모습으로 나 또한 뚜벅뚜벅 걸어가고 싶으므로. 

아직도 뚜렷이 기억한다. 《양철북》에서 시인이 던진 화두 하나, ‘줄탁’. ‘병아리가 알을 깨고 나오기 위해서는 새끼와 어미닭이 안팎에서 서로 쪼아야 한다’는 뜻이다. 시인이 그랬다. 북을 계속 치며 살기에는 이 세상이 너무 무거워 다시 알 속으로 들어가고 싶어진다고. 내 고단한 생을 살아내는 데 급급한 나. 시인의 절망이 켜켜이 쌓인 이 시간 너머에서 나를 때린다. 정신이 번쩍 든 나는 파울 첼란의 〈유골 항아리에서 나온 모래〉 속 ‘이끼와 쓰라린 치모로 만든 북’을 찾는 중이다. 지금 나는 시인을 위해 북을 울려주고 싶은 것인가.

그렇게 내가 진심으로 북을 울려주고 싶었던 이산하 시인의 시집 《악의 평범성》을 다 읽고 나면, 맨 마지막 ‘작가의 말’에서 시인의 다음과 같은 문장을 만나게 된다.

“내 시집에는 ‘희망’이라는 단어가 하나도 없다.”

이 한 줄이 의미심장하게 내 마음에 콕 박혔다. 시들의 여운 탓인지 자꾸 나를 붙든다. 이 문장이 말이다. 정리되지 않은 채 내 안에서 유영하는 숱한 상념들.

시집의 첫 번째 시에 나오는 벤야민과 니체처럼 ‘표면이 심연인 듯 울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울보가 맞다’는 것을 확인시켜준 시집이었다. 참 가슴 아프게 읽었다. 나는 그 시들을. 편하게 읽히는 시가 한 편도 없었다. 다 너무 힘들게 넘어야 하는 아픈 시였다. 시를 다 읽고 난 내 머릿속에 드는 질문 하나. 고통의 시간을 견뎌온 시인이 이제는 미래를 향해 ‘희망’을 쏘아 올릴 법도 하건만 시인은 왜 끝내 그 ‘희망’을 담아내지 못했을까.

시에 대해선 문외한인 내게 시인은 침묵하는 자였다(그 흔한 비겁한 침묵이 아니다). 침묵이 말의 가장 위대한 특성이라고 한 하이데거의 영향이었을까? 시를 사랑했던 이 철학자는 시인의 언어에서 침묵을 핵심적 위치로 놓았으니 그럴지도 모르겠다. 그 오랜 침묵 끝에 세상에 나온 이산하 시인의 언어는 인간의 무의식을 건드리는 것처럼 보였다. 내게는 그랬다. 인간의 본성에 대해 천착하고 그 기원 속 무의식의 다양한 기표들을 건져내 시에 담은 느낌. 마치 니체가 모든 좋은 것들(善), 도덕이니 미덕이니 하는 것들 배후에 숨은 나쁜 것들(惡)을 얘기하듯 《악의 평범성》은 표면에서 심층 속으로 들어가 어둠을 드러내는 시로 읽혔다.

고도로 발달된 산업 자본주의 사회에서 눈에 보이는 것에만 함몰된 현대인들에게 이 현실에서 은폐된 인간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 그 기원으로 돌아가자고 말 거는 것만 같았다. 에른스트 블로흐는 ‘희망은 과거의 잃어버린 고향에 있다’고 했다. 결국 나의 미래는 과거를 해석하는 과정에서 나온다는 것.

당신이 꿈꾸는 세상과 괴리가 너무도 컸던 현실의 부조리 속에서 시는 살아 움직이며 시인의 언어로 그 존재를 드러냈다. 우리가 바라는 것을 희망하는 것이 가장 어려운 일임을 선언하면서 말이다. 나에게 온 《악의 평범성》의 시들은 의식과 무의식의 틈에서 줄타기 하며 인간의 비애와 마주하게 했다. 그것은 우리 인간에게 내재된 선악의 경계는 종이 한 장 차이라는 처절한 역설 아래서 절망도 희망도 차마 뱉어내지 못하는 낮은 울음소리(緘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