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트란트 러셀의 <게으름에 대한 찬양>

게으른 우리 모두를 위한 변명??

세상 사람들은 모두 다 열심히 움직이는 것 같은데 나의 시간만 멈춰 서 있는 것 같을 때가 있다. 그렇게 정체되어 있다 보면, 나도 모르게 위로받고 싶어진다. 버트란트 러셀의《게으름에 대한 찬양》을 다시 펴고 싶은 걸 보니 요즘 내가 그런가? ㅎㅎ 이 책의 제목만으로도 요 며칠 내 생활에 대한 면죄부를 받은 것만 같아 위안이 된다. 위트를 잃지 않으면서 시니컬하게 사회에 던지는 철학자의 15개 충고를 모아놓은 이 에세이가 말이다.

70년 전 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읽히는 이유는 우리 현대사회의 핵심과도 고스란히 연결되기 때문이리라. 러셀은 이 에세이를 통해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과잉노동과 그로 인한 인간소외현상에 대해 냉철하게 진단하고 새로운 대안을 내놓는다. 근면은 역사 이래 지배계급이 피지배계급에게 강요해온 덕목이며, 부지런해야 한다는 강박은 노예근성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러셀은 쉼도 없이 부지런히 일만 하면 생산초과와 가격하락으로 이어지고 그로 인해 근로자들은 실직하게 된다며 하루 4시간씩만 일하자고 제안한다. 그렇게 되면 사람들이 돈 쓸 여유시간이 생기면서 소비가 일어나고 그것은 또 다른 생산의 니즈가 된다는 것이다. 

100명이 일하던 공장에 50명의 사람을 대신할 수 있는 기계를 들여오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버트란트 러셀은 20C초에 이미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우리에게 주었다. 기계로 대체되는 그 노동자 50명을 해고할 게 아니라 어제까지 하루에 8시간씩 일을 했다면 이제부터는 100명이 하루 4시간씩 일하면 되지 않겠느냐고 말이다. 정말 맞는 말이 아닌가. 이것이야말로 인공지능의 시대에 정말 필요한 대안이라는 생각이 든다. 인간이 기계에 내몰리지 않고도 우리 모두가 함께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 그것이 지금 우리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이 아닐까. 

그는 ‘사탄은 늘 게으른 손이 저지를 해악을 찾아낸다’는 말을 듣고 자라면서 열심히 일만하게 되는 양심을 갖게 됐다고 말한다. 하지만 사회는 이제 산업기술의 발달로 인해 노동시간을 절반으로 줄여도 되는 조건을 갖추었다고 했다. 근로가 미덕인 사회에서 구조적으로 엄청난 해악이 발생한다고 주장하는 러셀에게 있어 게으름이란 생산적인 여가활동을 의미한다. 인간에게는 노동 이외에도 주체적 사고를 할 수 있게 하는 생산적인 활동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논리다.

우리나라 노동시간이 OECD 평균보다 훨씬 많다는 건 누구나 알고 있다. 이러한 현실을 자각하고 다시 보면 이 에세이가 일에만 매몰되어 내가 누구인지도 잊은 채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러셀이 전하는 ‘나 자신에 대한 생각을 놓지 말라’는 조언처럼 느껴진다. 여가는 문명의 필수적 요소다. 근로의무를 부과하는 자본가만이 노동의 가치를 찬양한다. 하지만 노동이 진정 가치 있기 위해서는 노동을 통해 우리가 여가를 즐기며 좀 더 자유로운 인간으로 살아갈 수 있어야 한다.

타성에 젖어 게으름에서 아직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는 나를 합리화하기 위해 지금 러셀을 끌어들이는 나의 비루함에 헛웃음이 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솔직한 심정은 [게으름에 대한 찬양]에서 제안한 이상적인 노동양태가 모든 이들의 삶속에서 실현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자본주의와 노동 얘기를 하며 그 누구도 소외되지 않고 모두가 잘 사는 사회를 생각하다보니 문득 알제리 출신의 철학자 자크 랑시에르가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과거 랑시에르의 존재론에서 굉장히 인상 깊게 읽었던 ‘감각적인 것에 대한 해석’ 때문이리라. 

우리가 매일 보고 듣는 것으로부터 자신이 배제되었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없는가? 그는 공통의 세계가 감성을 분할한다고 말한다. 즉 기존 질서의 힘 있는 자들이 그렇게 한다는 것. 이런 공통의 분할로 나타나는 포섭과 배제 사이에서 자본주의가 배제시키는 건 늘 돈 없는 자들이다. 슬라보예 지젝의 말로 바꾸면 바로 ‘몫 없는 자’가 될 것이다.

우리가 일상에서 보고 듣는 것은 자본주의 질서가 정해놓은 감성의 분할이다. 이러한 기존의 구조를 뒤집을 수 있는 것이 미학적인 것이고 정치적인 것이라고 랑시에르는 말한다. 아방가르드 예술과 같이 새로운 형태의 예술작품을 통하여 기존 사회체제의 감성적인 것을 변화시킬 수 있는 이질적인 것으로 미학적 단계를 설명한다. 그의 사유를 따라가며 나는 뜬금없이 우리나라 정치를 떠올려본다. 과연 좋은 정치란 무엇일까?

이 사회 공동체로부터 소외된 자들을 다시 중심부로 끌어와서 그들의 잃어버린 목소리를 되찾아주는 자들이 좋은 정치인이 아닐까. 기존 질서의 강화가 아니라 배제된 자들의 감성을 공동체 안으로 재배치함으로써 이 사회를 변혁시켜 나가는 것, 그래서 그들이 역사의 주체로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게 하는 것, 좋은 정치란 그런 것이어야 한다. 문득 그의 이 감성론이 왠지 변화에 열려있는 그런 존재론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위의 공동체, 분유(나눔), 미학적 공동체, 감각적 공동체, 감성의 분할, 정치…

이러한 개념들을 이해하게 되면 될수록 이 철학자가 더 많이 궁금해졌다. 랑시에르의 ‘평등은 이 세계에 결코 존재할 수 없는 것’이라는 말에 잠시 슬퍼졌지만, 그 평등은 언제나 우리 의식을 일깨우는 개념이라는 말에 또다시 위안을 받는다. 결코 완전한 평등에 가 닿을 순 없다 할지라도, 우리가ᅠ늘ᅠ그ᅠ말을ᅠ되뇌고ᅠ이야기함으로써ᅠ그동안ᅠ무의식적으로ᅠ너무도ᅠ당연시하며ᅠ살아왔던ᅠ것들에ᅠ대해ᅠ다시ᅠ한 번ᅠ되돌아볼ᅠ수ᅠ있다면ᅠ좋겠다. 그것만으로도ᅠ일단ᅠ변화의ᅠ시작이ᅠ될ᅠ수ᅠ있을 테니까. 그렇게 우리 개개인이 조금 더 나은 사회를 위해 의식적으로 부단히 노력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 있을 게다.

이렇게 이상적인 건강한 사회를 그려보다가 현실을 자각하게 되면 우울해지는 건 어쩔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러셀의 에세이를 통해 위안 받고 싶은 건 어쩌면 그런 걸 게다. 이 책을 통해 궁극적으로 관철시키고자 했던 독점 자본가 비판과 정치권력의 독재화 반대와 같은 더 깊은 사유들은 차치하더라도 이것 하나만은 마음에 담고 싶은 건지도. 매일 성실하게 일은 하되 최소한 지금 내가 무엇을 위해 이렇게 열심히 살고 있는지를 자문하며 살아야겠다는 생각 말이다. 요즘 자주 회자되는 이슈라서 그런지는 몰라도 ‘주체적 사고’를 할 수 있어야 한다는 러셀의 말은 자연스럽게 우리 언론의 현실을 돌아보게 한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계를 오해하지 않고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특히 언론의 보도를 판별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야 할 것 같다. 언론에서 무차별적으로 양산해내는 보도에 매몰되어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우매한 시민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얘기다. 늘 깨어있는 시민으로서 언론이 팩트에 충실한 보도를 하고 있는지 얼마나 신뢰할 수 있는지 비판적인 시각으로 날카롭게 체크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개개인이 먼저 변해야 한다.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아무리 사소하고 느린 변화라도 조금씩 쌓이면 큰 변화가 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필요가 있다. 점진적으로 꾸준히 일어나고 있는 사회의 변화를 거대한 혁신적 변화의 물결로 만드는 것은 바로 우리 시민 개개인의 자각에 달려 있다. 세상을 사실 그대로 바라보지 못하게 하는 모든 본능을 억제하고 좀 더 이성적으로 사고하고자 노력하는 순간, 더디지만 우리가 원하는 변화는 일어나게 된다. 

언론에서 쏟아내는 팩트와 무관한 무분별하게 보도되는 정보에 현혹당하지 않을 수 있다면 우리는 쉬이 분노하지 않고 차분하게 현실을 직시할 수 있다. 그 힘으로 꿋꿋하게 버티다 보면 우리가 사는 이 사회도 언젠가는 올바로 가고 있다고 느끼게 되는 그날이 올지도 모른다. 희망을 버리기엔 이 세상이 너무 괜찮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