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희생>

죽은 나무에 매일 물을 주듯_‘작은 실천으로부터의 변화’

영화에 대한 정보 전혀 없이 우연찮게 만나서 더 귀하게 느껴지는 영화가 있다. 그리고 영화를 다 보고 나서 너무 좋았다면 더 갑절로 고마운 그런 영화 말이다. 나에게도 그렇게 우연히 와서 나의 최애가 된 영화가 있다. 아직 그 누구와도 이 느낌을 진지하게 공유해 본 적 없지만, 나만의 영화로 내 마음속 깊은 곳에 고이 간직된 영화가 있다. 

영화 시작과 동시에 흘러나오던 바흐의《마태수난곡 39번》아리아에서 딱 느낌이 왔다. 내가 이 영화를 좋아하게 되리라는 것을. 그 애절한 아리아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에 끌려 무작정 앉아서 두 시간 넘게 꼼짝도 안 하고 보게 된 영화다. 그리고 이어지는 첫 장면에서 나는 또 한 번 반했다. 일단 아름다운 바닷가 풍경의 흡인력도 상당했지만 주인공 알렉산더가 어린 아들에게 들려주는 얘기가 무엇보다도 나의 집중력을 증폭시켰다. 

“아주 먼 옛날 한 수도원에 늙은 수도승이 살고 있었단다. 그는 죽은 나무 한 그루를 산에 심었지. 그리고 제자에게 말했단다. 나무가 다시 살아날 때까지 매일 같이 물을 주라고. 제자는 매일 아침 산에 올라 나무에 물을 주고는 저녁이 되어서야 수도원으로 돌아오곤 했지. 그렇게 3년 동안 물을 주던 어느 날 나무에 온통 꽃이 만발한 것을 발견했단다. 끝없이 노력하면 결실을 얻는 법이란다. 매일 같은 시간에 같은 행동을 반복한다면 늘 꾸준하게 의식과도 같이 말이다. 그러면 세상은 변하게 될 거야.”

이 장면은 마지막 장면과 수미쌍관을 이루는데 감독이 이 영화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주제이기도 하다. 바로 ‘믿음’과 ‘희생’이라는 테마가 이 장면과 대사에 응축되어 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죽은 나무에 매일 물을 주는 심정으로 자신이 믿는 바를 실천하다 보면 그 믿음이 세상을 구원할 수도 있다는 거대한 담론을 은유적으로 보여주는 결정적 장면이다. 

문학평론가이자 저널리스트였던 알렉산더는 노년에 바닷가 마을에서 살고 있다. 그에게는 말을 못 하는 어린 아들 고센이 있다. 어느 날, 자신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다른 가족들과 친구가 방문한다. 함께 저녁 식사를 마친 후 그들은 TV에서 전쟁 소식을 듣는다. 세상에 닥친 종말의 위기 앞에서 알렉산더는 이 고통을 거두신다면 모든 것을 바치겠노라 기도한다. 그리고 전쟁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키가 자신에게 있다는 친구 오토의 말을 듣고 알렉산더는 그 미션을 조용히 실천에 옮긴다. 세상을 구원할 수만 있다면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할 수 있다는 믿음을 몸소 아들에게 가르쳐주겠다는 듯이 말이다. 

이것은 어쩌면 감독이 자신의 아들 앤드류샤에게 말하고 싶었던 것이리라. 이 영화는 소련 출신인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감독의 8번째 장편영화이자 유작이 된 작품이다. 1986년 칸영화제 4개 부문에서 수상한 《The Sacrifice》는 우리나라엔 “희생”이라는 제목으로 1995년에 개봉되었다. 잘 알려지지 않은 영화다(아니다. 나만 모르고 있었는지도??). 영화 자체가 엄청 재미있거나 하는 영화는 아니다. 오히려 굉장히 무거운 편에 속한다. 주제 자체부터가 가볍지 않다 보니 내용 전개도 그에 걸맞게 차분하게 흘러가는 영화다. 그래서 사람에 따라서 호불호가 갈릴 수도 있겠다 싶다. 

영화를 보고 나서 한참을 그냥 멍하니 앉아서 계속 영화 OST를 반복해서 들었던 기억이 난다. 이 영화의 사운드 트랙도 분명 한 몫 한다. 처음과 끝은 요한 세바스찬 바흐의 《마태수난곡》 39번 “〈Erbarme Dich mein Gott〉(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가 장식한다. 영화의 장면과 함께 어우러져 깊은 여운을 남기는 명곡이다(그림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이 영화에 나오는 명화 감상은 또 하나의 멋진 ‘덤’이다).

지난 가을, 홍대 앞에서 [영화 수업]을 들었을 때 강사이자 영화감독이셨던 선생님께서 수업하시다 우연히 이 영화 얘기를 꺼내셨을 때의 그 기분을 잊지 못한다. 이 좋은 영화를 누군가와 나누고 싶었는데 그걸 못하고 있었으니 그 반가움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내가 하고 싶었던 얘기를 누군가의 입을 통해 들었을 때의 그 감동이란…^.^

나는 생각해본다. 나에게도 과연 죽은 나무에 매일 물을 주듯 간절하게 소원하는 그 무언가가 있는가? 반드시 이루어질 거라는 강한 믿음으로 매일 같이 그것을 위한 뭔가를 꾸준히 해본 적이 있었나? 문득 지금부터라도 누구도 기대하지 않지만 꼭 해낼 수 있으리라는 나 자신에 대한 믿음 하나 가지고 뭔가를 실천하는 삶을 살고 싶어졌다. 그 믿음이 내 일상의 루틴으로 자리 잡고 끊임없이 반복되다 보면 어느 날 고목에 꽃이 피듯 그런 기적이 내게도 찾아오지 않을까? 

무엇보다도 내 마음 한 켠에 그 어떤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을 그런 강력한 믿음만 자리할 수 있다면 나는 언제든지 그 신념을 위해 내 모든 것을 희생해도 여한이 없을 그런 멋진 삶을 살아낼 수 있지 않을까.

오래도록 ‘나 홀로 영화관’에 간직해온 영화를 꺼내서 이렇게라도 지면에 펼쳐놓고 보니 의외로 참 많은 생각의 편린들이 내 눈 앞에 아름답게 흩날린다. 생각지도 못한 뜻밖의 선물이다. 이 또한 감사한 오늘 하루.

2 thoughts on “영화 <희생>”

  1. “죽은 나무에 매일 물을 주는 심정으로 자신이 믿는 바를 실천하다 보면 그 믿음이 세상을 구원할 수도 있다는 거대한 담론을 은유적으로 보여주는 결정적 장면이다. ” 이말이 마음에 묵직하게 와 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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