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나이 쉰에 할머니라니…”

고3 아들의 대학원서 쓰는 시기였다. 그때도 워킹맘으로 살아가던 나는 큰애가 고3이 되도록 학교 방문한 게 다섯 손가락도 채 안될 정도로 삶이 늘 바빴다. 아이들은 어쩌면 지들이 알아서 잘 커준 건지도 모른다. 그런 아이들이 나는 참 고맙다. 미안함은 말할 것도 없고.

담임과의 상담시간에 맞춰 교무실 문을 두드렸다. 건강한 웃음으로 나를 반겨주는 담임선생님, 그 분위기에서 전해지는 싱그러움이 덩달아 미소 짓게 했다. 그렇게 첫 만남에서 내 마음속으로 씩씩하게 걸어 들어온 그녀가 나는 왠지 좋았다.

아들이 고1 때부터 유난히 좋아하는 선생님이니 나도 영향을 받은 게지 했다. 그것만으론 부족했다. 뭔지 모를 남다른 애정이 솟는 그 느낌은… 그렇게 아들의 최애 담임샘은 나에게도 최애가 되었다.

새로운 삶이 시작된 독일 살이 2년째 되던 해, 그러니까 아들이 한국에서 대학을 다녔다면 2학년쯤 됐을 게다. 예기치 못한 지난한 인생의 파고를 넘고 있던 생의 한가운데서 나는 그녀와 재회했다. 복잡한 마음으로 프랑크푸르트 중앙역에서 기다리고 서있던 내 앞으로 다가오던 그녀, 아름다웠다. 

그 두 번째 만남에서 그녀는 또다시 나의 슬픔 속으로 기꺼이 걸어 들어왔다. 내 아들과의 관계 설정에 앞서 먼저 나를 만나겠다고 그 머나먼 하늘길을 마다하지 않고 날아온 그녀, 그 마음마저 올곧은 아들의 담임샘은 그렇게 나의 며느리가 되었다.

너무 반듯해서 속 한 번 썩인 적 없던 녀석이 결혼하겠다는 말을 꺼냈다는 건 그 시기 아들도 나 못지않게 충격과 아픔이 컸다는 걸 반증했다. 그때 우리는 다 상처투성이였다. 나는 그걸 알면서도 모른 척 모진 말을 쏟아냈다. 나 혼자만 아픈 양…

그때 아들이 그랬다. 지금 상황에서 엄마에게 이렇게 몰인정한 자신을 용서하란다. 잘못했단다. 그럼에도 자신의 그 어떤 선택도 존중해주리라는 엄마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고. 옳다는 소신 앞에서는 그게 무엇이든 당당하라고 엄마에게 배웠으니까. 

순간 납득이 됐다. 내가 가르친 대로 아이는 자신의 생각을 분명하고도 설득력 있게 얘기하고 있지 않은가(언제 이리 커버린 거지). 부모라고 해서 자식의 인생을 마음대로 할 수 없음을 인정하고 나니 아주 심플했다. 나 역시 ‘내 아들이라면 자신의 선택에 반드시 책임질 거라’는 믿음이 있는데 그 이상 더 뭐가 필요하랴.  

아들의 ‘결혼하고 싶다’는 그 난데없는 한 마디에 프랑스 마크롱 대통령의 러브스토리가 떠오른 건 우연이 아니었다. 3년 내내 선생님 얘기할 때의 아들 표정을 매일 보아온 엄마는 이렇게 될 운명을 예감했는지도 모르겠다. 다만 이토록 빨리 올 줄은 상상도 못 했다. 하필 인생 최대의 위기 앞에서 허우적대던 그 순간에 말이다.

아니다. ‘하필’이란 말은 틀린 표현일 수도 있겠다. 우리 가족이 독일에서 그런 특수상황에 놓여있지 않았다면 설령 둘의 인연이 운명이래도 그토록 짧은 시간 안에 현실이 되지는 못했을 테니까… 

내 스물한 살의 아들은 8살 연상의 담임샘과 그렇게 사제의 연을 넘어 부부의 연까지 맺었다. 영화에서나 일어날법한 일이 4년 전에 우리에게 일어났고 그 서프라이즈는 현재 진한 사랑의 향기로 참 잘한 결정임이 증명됐다. 둘을 볼 때마다 ‘천생연분’이란 말이 떠오를 정도로 둘은 아주 행복하게 잘 살고 있다.

그리고… 음.. 나이 쉰을 갓 넘은 나이에 나는 할머니가 되었다. 16개월 된 손녀딸이 나를 “할미”라고 야무지게 부르기 시작했다. 더 이상 현실 부정은 안 통한다는 얘기다. 나는 꼼짝없는 할머니인 거다.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할머니는 결코 되고 싶은 않은 나, 그럼에도 손녀는 느~~ 무 예쁘다는 게 “웃픈 팩트”다.

하… 이 나이에 시엄니로도 모자라 할미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