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일차_풍수지탄風樹之歎

중학교 땐지 고등학교 땐지 확실하진 않지만, 암튼 한문(漢文) 시간에 한자투성이 문장을 열심히 외웠던 기억이 난다.

‘수욕정이풍부지, 자욕양이친부대(樹欲靜而風不止, 子欲養而親不待)’

어디 그뿐인가. 한 글자 한 글자를 옥편(아, 요즘 세대들은 이 단어를 모를 수도 있겠구나! ‘한자사전’이라 해야 알 듯)을 뒤적이며, 또 그 뜻을 음미하며 해석하느라 엄청 진지했었지. 이 문장의 1차적 해석은 ‘나무가 고요하고자 하나 바람이 그치지 않고, 자식이 봉양하려 하나 부모는 기다려주지 않는다’는 뜻이겠다. 저 원문이 함의하는 바를 네 글자로 요약한 게 바로 풍수지탄(風樹之歎)이다. 

바람 풍(風), 나무 수(樹), 어조사 지(之), 탄식할 탄(歎)

글자 그대로는 ‘바람(風)과 나무(樹)의 탄식(歎)’이라는 뜻이다. 이 사자성어가 지금은 ‘부모에게 효도하고자 하나, 이미 돌아가시고 안 계심에 안타까운 심정’을 표현할 때 쓰인다. 

이 말이 유래된 고사는 이렇다. 중국 초(楚)나라에 ‘고어(皐魚)’라는 효자가 있었다. 어느 날, 고어가 슬피 우는 것을 본 공자님이 그냥 지나칠 리 만무. 왜 우느냐고 물으니, 고어가 세 가지 한(恨)에 대해 말하더란다. 그중 하나가 공부한답시고 집을 떠나 세상을 떠돌다 고향으로 돌아가니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안 계신 것이라고. 효도하고 싶어도 더 이상 할 수 없음이 천추(千秋)의 한(恨)이 되어 울고 있노라고. 

저 ‘탄식(歎)’이라는 단어에서 이미 감이 왔으리라. 그러니 ‘효도를 다하지 못한 자식의 슬픔’을 표현할 때, 풍수지탄 외에도 ‘풍목지비(風木之悲)’, ‘풍수지비(風樹之悲)’, ‘풍수지감(風樹之感)’으로도 쓰는 이유가 납득이 될 게다. 여기서 비(悲)는 바로 ‘슬플 비(悲)’자가 아니던가.

왜 나는 지금 이 성어를 떠올리는가. 며칠 전, <핵개인의 시대>라는 책에서 읽은 ‘효도(孝道)’에 관한 새로운 시각과 연관이 있으리라. 더 이상 쪼개질 수 없는 가족의 단위라던 핵가족! 이 단어는 진즉 ‘1인 가구’에 그 자리를 내어주었지만, ‘핵개인’이라는 단어가 주는 어감은 또 결이 다른 느낌이다. 뭐라 표현해야 할까. 게다가 이 책에서 재정의하는 ‘효(孝)’의 개념을 보면서 생각이 참 많아졌다고나 할까.

우선 ‘핵개인’의 정의는 뭐냐? ‘온전히 자신의 주체적 의지로 살아가는 사람’이란다. 그러니까 ‘본인 삶의 의사결정권을 본인이 쥐고 있는 그런 사람’ 말이다. 지금까지 어떤 형태로든 우리를 지배했던 ‘해야 한다’ 식의 삶의 태도가 이제는 ‘하고 싶다’로 변화되고 있다는 얘기다. ‘의무’에서 ‘애호’로의 전환이라고 해야 할까? 내가 뭔가를 한다면, 이제는 ‘해야 하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하고 싶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런 사람이 바로 핵개인이란다. 이 얘기가 그리 새롭진 않다. 우린 이미 자주 들어오지 않았던가. 주체적 삶에 대해.

하지만 ‘핵개인의 시대에 더 이상 효도는 없다’며 ‘효도의 종말’을 선언하는 지점에서는 서글픔이 밀려오더라는 거다. 부모와 자녀 사이의 주고받음은 복잡한 함수를 가지고 있다는 화법도 내겐 생경했고. 

결국 그 책의 내용을 종합해보자면, 부모라는 이유만으로 자식을 키우고, 그 자식이 크고 나면 그동안 키워준 은혜에 보답하는 그런 문법은 이제 그 의미가 재조명되고 있다나. 결혼에 대한 인식 변화도 그렇고 노인 부양 문제 같은 다양한 사회경제적 변화에 직면하고 있는 현실을 감안하면 그건 어쩌면 당연한 거다.

일본 부모들은 자식들이 분가할 때 금전적 지원을 하지 않기에 우리나라 부모들보다는 노년이 상대적으로 여유롭단다. 그래서 일본 부모들은 자녀가 그저 한 번씩 방문해주는 것만으로도 만족한다고. 일본인들에게 효도란 ‘자녀들이 잘 살아주는 것’이란다. 뭐 한국 부모들이라고 다를까. 자녀들 독립에 부모가 꼭 지원해야 하는 것으로 인식한다고 해서, 또 노인 빈곤률이 일본보다 높다는 이유로 한국인들이 다 자식에게 의지한다고 일반화하는 데는 동의할 수 없다. 이제는 한국의 부모들도 분가하는 자식에게 바라는 건, ‘니들만 잘 살면 돼’ 일 테니. 나 역시도 그 마음이니까(그러고보니 난 애초부터 자식들에게 뭔가를 받을 마음이 1도 없었던 것도 같다). 

부모들이 ‘지들만 잘 살면 되지’라고 생각하는 것과 별개로, 대놓고 ‘효도는 더 이상 없다’고 하는 말에 내 감정이 복잡해지는 건 왜일까. ‘효도는 했지만 받을 수는 없고, 시킨대로 했지만 시킬 수는 없는 시대’라는 이 선언을 보며 내 부모님의 얼굴이 떠오르는 건 또 뭐지? 괜히 울컥. 

저자는 과거엔 당연하던 것들이 이제는 더 이상 그 가치를 갖지 못하는 현실에 억울해하지 말라는 당부도 잊지 않는다. 내 감정을 들여다본다. 이게 억울함일까? 그건 아닐 거다. 내가 억울할 게 뭐 있나. 그래도 난 내 부모로부터 아낌없이 받은 세대가 아니던가. 그 넘치는 사랑이 죄송해서 눈물 날 만큼.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부모로부터 받은 사랑을 자식들은 늘 그 부모에게 되돌려주기보다는 자기 자식을 사랑하는 것으로 갚아왔다는 그런 생각. 그러니 ‘내리사랑은 있어도 치사랑은 없다’는 말이 생기지 않았겠나.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사랑하는 건 몰라도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사랑하기는 쉽지 않다는 말이다. 이 말은 또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만큼 자식이 부모를 사랑하기는 좀처럼 어렵다는 의미일 테다.

그렇다. 우리 부모님들은 늘 그래왔던 거다. 그러니 새삼 시대가 변했다며 효도의 종말을 고할 필요가 없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것이 책을 읽으며 부모님께 더 죄송해지고, 괜히 그분들을 대신해 서러웠던 이유인지도. 개인적인 소망이 있다면, 앞으로의 날들은 부모님을 바라보는 내 마음이 죄송함이 아닌 감사함만으로 채워지는 그런 시간이었으면 좋겠다. 지금 이 순간, 환한 웃음으로 달려가 두 분의 품에 안기고 싶어졌다. 아니… 이번엔 내가 두 팔 벌려 두 분을 꼭 안아 드려야지. 이것이 오늘 뜬금없이 ‘풍수지탄(風樹之歎)’의 교훈을 떠올리는 이유이리라.

6 thoughts on “17일차_풍수지탄風樹之歎”

  1. 요즘 아이들은 어른대접할줄모른다는 남편에게 대접받으려고 하지말고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어른이 되자고 했다가 부부싸움 할뻔 한 오후였어요..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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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효도총용량의 법칙 속에서 저도 효도란 ‘자녀들이 잘 살아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부모님이 떠나시면 부모님은 나의 어떤 모습을 기대하실까?? 생각해보면 내가 나 답게 잘 살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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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효도총량의 법칙~ ㅎ 니들만 잘 살면 돼~ 내 자식들에겐 저는 늘 이 마음으로 살아가고자 합니다.
      그리고 내 부모님에겐 씩씩하게 잘 사는 모습 보여드리고 싶구요. ㅎ 그리 살려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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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진정한 효는 누가 강요해서 하는것이 아니라 마음속에서 우러러 나오는것이 아닐까 합니다. 지나가는 일상을 살다가 순간 부모를 생각하는 그 ” 마음” 이 귀한게 아닐까..그리고 그 마음만으로도 기뻐하는 부모가 되어야되지않을까.. ” 효” 라는 이름으로 자식의 마음을 무겁게 하는 부모가 되지 말아야겠다고 다시 다짐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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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맞아요. 샘~ 강요하는 효는 진정한 효가 아니지요. 마음속에 차오르는 진심을 한 번씩이라도 부모님께 표현하는 것…
      저는 이거면 충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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