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는다는 것…

이번 토론수업에서 학생들이 정한 주제는 ‘죽음을 선택할 권리’였다. 덕분에 ‘존엄사’에 대한 논의가 밀도 있게 이루어졌다. 다양한 관련 지식의 토대 위에서 죽음에 대해 깊은 사유를 할 수 있었던 값진 시간이었다. 나는 이렇게 늘 학생들에게 ‘배움의 빚’을 지며 살아간다. 참 뻔뻔하지만 감사한 빚쟁이 인생이다.

평소 ‘죽음’을 숙고하는 사회가 되었으면 했던 개인적 바람이 잠시나마 실현된 것 같아 내겐 더 의미가 있었다. 작년 여름방학 전주 집에 내려갔을 때 엄마랑 나눴던 얘기가 떠올라 잠깐 울컥하기도 했지만. 

나랑 둘이서 이야기꽃을 피우던 엄마가 대뜸 며칠 전 아빠랑 손잡고 보건소를 찾아 ‘사전 연명의료의향서’라는 걸 작성했다는 말을 꺼내셨다. 당신들이 미리 해놔야 자식들이 편할 것 같아 그리했노라고. 그러니까 나의 부모님께서는 자식들 고민 덜어주려고 나중에 아파서 회복 불가능한 상태가 됐을 때 연명의료를 받지 않겠다는 뜻을 미리 밝혀두셨다는 얘기다. 순간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두 분 연세를 생각하면 충분히 할 수 있는 얘기였음에도 난 그 말씀을 듣고 겁이 덜컥 났던 거다. 곧 현실이 될 것만 같은 두려움이었을 게다. 

‘언제라도 떠날 수 있는 나이니까 너무 당연한 거고 전혀 아쉬울 게 없으니 그렇게 슬퍼하지 말라’며 엄마는 나를 토닥이셨다. 인간은 존엄하게 죽을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는 나로서는 그 마음이 백번 이해되면서도 내 부모라고 생각하니 이성보다는 감정이 먼저 반응했다. 학생들이 내게 물었다. 존엄사에 대해 찬성하느냐고. “나의 존엄사는 무조건 찬성, 부모님이라면 글쎄…”가 그동안 내 마음이었음을 고백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마와의 그 일화를 학생들에게 들려주던 과정에서 뭔가 정리되는 느낌을 받았다. 

모든 죽음을 받아들이는 연습이 필요하겠구나. 내 죽음은 그토록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노라 자부했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구나. 우리 일상에서 죽음을 회피하지 말고 자연스럽게 얘기할 수 있는 분위기가 필요하다는 믿음이 확고해지는 순간이었다. 난 내 아이들에게 엄마가 나한테 하신 것처럼 그렇게 말할 것이다. 나 스스로 나의 죽음을 준비하리라. 그리고 아이들의 마음도 미리 단련시켜야지. 엄마와의 이별이 슬픔으로만 다가가지 않도록… 

우리가 그동안 ‘안락사(euthanasia)’하면 편견이 있었던 게 사실이다. 그 어원을 보면 ‘죽음(thanatos)’이라는 단어에 유토피아(eutopia)의 ‘좋은’이라는 의미를 가진 ‘eu’가 합쳐진 말이다. 즉 ‘좋은 죽음’이라는 뜻이다. 그렇게 좋은 죽음이라면 우리 자신이 선택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내 생 마지막 페이지의 스토리를 내가 쓰고 싶다. 관속에 입고 들어갈 옷조차도 내가 선택할 수 있다면 좋겠다. 수의 말고 내가 평소 좋아하는 옷으로 말이다. 오래전에 생각해 놓은 나의 묘비명이 있다. 이 단순한 한 마디면 족하더라. 

“참 고마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