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충녕의 <철학자들은 대체 무슨 생각을 할까>

지식의 시대, 공감의 시대, 다양성의 시대… 이 시대를 규정 짓는 단어를 딱 하나로 특정할 순 없을 듯하다. 하지만 분명한 건, 우리 모두는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여일하게 앎에 대한 끝없는 갈망을 안고 살아간다는 거다. 그게 무엇이 되었든 간에. ‘디지털’이라는 이 ‘무한의 공간’이 우리 삶의 무대로 새롭게 펼쳐진 세상에서 우리는 지금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가? 

우리 각자는 너무도 소중한 이 삶이 나아가야 할 방향성을 찾고 싶다. ‘내 삶의 주체’가 되어 만들어가는 아주 지적이고 따뜻하며 선한 영향력으로 가득한 인생이었으면 싶다. 나 역시 예외는 아니다. 마음속에 이 작은 소망 하나 밝히고 거기에 기대어 미친 듯이 철학서를 읽던 때가 있었다. 감사하게도 그 과정에서 그동안 모호한 채로 나를 괴롭히던 많은 것들이 명료하게 정리되는 귀한 경험을 했더랬다. 지금 돌아보니, 책 속에서 만나는 수많은 철학자들과 함께 했던 순간의 더깨만큼이나 어느새 두터운 정까지 덧입혀진 그 시간들이 내게는 ‘진짜 어른’이 되어가는 여정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혹자는 그러더라. 어른이 된다는 건 이 세상을, 타인을 내 맘대로 통제할 수 없음을 무기력감 없이 받아들이는 거라고. 정말로 그렇더라. 언젠가부터 내 마음에 깃든 ‘인생의 공허함’, ‘사람에 대한 알 수 없음’ 같은 감정들… 결코 이유를 설명할 수 없는 그 많은 것들이 전혀 이상할 게 없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질 때가 오려나. 그리고 그런 때가 정말 와준다면 조금은 자유로워질 수 있으려나. 

진정 자유롭고 싶어 무작정 철학서를 읽던 중에 만난 철학자가 있었다. <어떤 생각들은 나의 세계가 된다>의 저자인 이충녕이다. ‘철학서가 이렇게 편하게 읽힐 수도 있구나!’ 하는 감탄과 함께 단숨에 읽어내려갔던 책이었다. 저자의 필력에 감탄하면서. 그리고 책 속에 담긴 저자의 많은 생각들이 그동안 내 머릿속을 가득 채웠던 것들과 너무도 닮아 있어 깜짝깜짝 놀랐던 게 몇 번이던고. 

그렇게 내게도 유난히 정이 가는, 그것도 현존하는(??) 철학자가 생긴 것이다. 참 좋았다.

이충녕 작가는 철학 콘텐츠 크리에이터다. 책으로 먼저 반하고, 나중에 충코의 철학을 통해 다시 한 번 반했다. 그의 생각과 말 속에서 그동안 내가 그토록 갈망했던 건강한 사유체계를 만났기 때문이리라. 이런 걸 대리만족이라 해야 하나. 그가 만들어내는 철학 콘텐츠들은 때로는 무지한 나를 자각시켜주고, 때로는 세상에 실망한 나를 위로해주기도 했다. 글의 힘에 더해서 따뜻한 말 한 마디의 선한 영향력을 고스란히 받았다고나 할까. 이리 감사한 일이라니. 

그토록 괜찮은 철학자가 알려주는 ‘철학자들의 생각’과 ‘철학의 가치’가 가득 담긴 책, <철학자들은 대체 무슨 생각을 할까>라는 신간을 다시 읽는다. 책 제목에서부터 질문으로 시작되는 이 책에서 저자는 자꾸 내게 묻는 것만 같다. 철학은 ‘질문하는 학문’이라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이. 

‘철학은 정말 어려운 것일까?’ 

‘우리는 왜 철학을 알아야 할까?’ 

‘철학은 내 삶을 어떻게 바꿀까?’

책의 앞뒷면을 꼼꼼히 살피고 나서 책장을 펼치니 ‘세상에 의문을 던지는 53가지 철학 이야기’라는 문구가 또 한 번 나를 보고 빙긋이 웃어준다. 심쿵~ 우선 목차에서 각 챕터들의 면면을 내 눈에 담는다. ‘물처럼 살라’고 말하는 노자로 시작해서 소크라테스, 플라톤, 칸트, 헤겔, 니체, 후설, 샤르트르, 메를로퐁티…. 와~ 정말 철학자들의 이름이 총출동했다. 그 이름만으로도 가슴이 웅장해지는 느낌이다. 난 지금 저이들을 만나러 가는 중인 거다.

저자와 함께 떠난 철학수업에서 ‘철학의 원리’를 통해 나도 덩달아 ‘앎이란 과연 무엇인가’에 대해 천착한다. ‘예술은 놀이다’에서 칸트의 미학을 엿보다가 또 어느새 ‘정언명령’이 너무 쉬워진 나를 발견~ 하하. 그가 있으니 이해가 훨씬 수월하다. 예술을 배워야 하는 철학적 이유 앞에선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끄덕! 독일의 극작가이자 철학자 프리드리히 실러가 그랬다잖은가. ‘예술교육이 인간의 완성에 있어서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한다’고.

어디 그 뿐인가. 삶에 대한 가장 근본적인 궁금증부터 그동안 우리 일상에서 만났던 다양한 사건에서 건져 올린 철학적 질문들을 마주한다. 그럴 때면 잠시 읽기를 멈추고 생각이란 걸 하게 되더라. 그중에서 유난히 내 가슴에 콕 박힌 말이 있다. ‘악마에 대하여’라는 단상에서 만난 힐데브란트가 했다는 그 말.

“가치에 대한 무감각이야말로 선한 삶의 심각한 장애물이다.”

요즘 특히 매스컴에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사건사고들을 접하면서 나도 모르게 ‘인간’에 대한 본질적 질문을 던지게 되더라. 윤리적 가치에 무감각해진 사람들이 저지르는 끔찍한 일들이 너무 잦다는 불안감 속에서도 그들을 진심으로 이해하고 싶었으니까. 

“도구적 이성은 무엇이 이로운지 무엇이 해로운지 판단하지 않는다.”

호르크하이머의 이 말에서 난 뭔지 모를 두려움을 느꼈다. 혐오의 정서가 팽배한 이 슬픈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도구적 이성’, ‘똑똑함의 위험성’ 같은 표현들은 내게 대놓고 묻는 것 같았다. 어떻게 사는 것이 좋은 삶이냐고. 인생의 반환점을 훌쩍 넘은 이 나이에도 그 질문은 여전히 어렵다.

그 누구도 저절로 어른이 되는 법은 없더라. 진짜 어른이 되기 위해서는 나이에 상관없이 끝없는 배움 속에 거해야 함을 새삼 다시 깨닫는 중이다. 그동안 내가 잊고 있었던(아니 생각하고 싶지 않았을지도) 너무도 당연한 것들이 내 의식 속에서 다시 소환되기도 했다. 내 삶이 이렇게 쉼 없이 바쁘게만 흘러가도록 놔둬선 안 되겠다는 그런 생각들 말이다. 

문득 ‘지혜지(智)’자에는 왜 ‘날일(日)’자가 밑에서 받치고 있을까를 생각해본다. 단순한 ‘앎(知)’이라는 ‘지식’에 질곡의 나날들(日)이 더해져야만 비로소 지혜가 되고 삶이 되고, 또 글이 되는 게 아닐는지. 

이 책을 읽다보니 철학자의 특별한 감성과 논리, 그리고 사고방식을 마치 내 것인 양 느끼게 된다. 진심으로 타인의 감정과 생각을 이해할 수 있기를 바라는 나를 만난다. 이처럼 우리가 책 속에서 경험하게 되는 감정이입과 상호교감은 나와는 다른 사람들을 배려하고 그들과 소통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줄 수도 있으리라는 기대를 안고서.ᅠ이것이 좋은 책의 존재 이유가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나오는 마르셀 프루스트의 걸작에 대한 예찬은 참 그럴듯하다.ᅠ

“우리들은 오직 예술을 통해서만 우리 자신으로부터 빠져나올 수 있고, 예술 덕분에 우리들은 단 하나의 세계, 즉 우리의 세계만을 보는 대신 그 세계가 스스로 증식되는 것을 볼 수 있다. 따라서 독창적인 예술가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우리들은 그만큼 많은 세계를 가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뛰어난 예술 작품은 눈에는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보게 만드는 힘이 있다고 했던가? 우리 시대의 모든 예술 하시는 분들에게 감사하고 싶어지는 순간이다. 그런데, 지금 문득 저 프루스트의 말에 첨언하고 싶은 유혹이 달려든다. ‘건강한 사고를 장착한 다정한 철학자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우리들은 그만큼 더 깊이 인간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고. 지금처럼 말이다. 그동안 난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가 담보된 세계에서 우리 모두가 다함께 행복하고 싶은 바람의 응답을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흔히 행복을 고난과 고통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 상태라고들 한다. 그저 좋기만 할 것 같은. 그러나 우리는 살아가면서 결코 고통을 피할 수는 없다. 이 사실만 받아들이면 된다. 그러니까 행복한 인간이란 살면서 절망과 좌절이 없기를 바라기보다는 그런 것들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정신적인 평정과 충일함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인 거다. 그렇게ᅠ살ᅠ수ᅠ있는ᅠ사람에게ᅠ이ᅠ세계는ᅠ아름다운ᅠ것이ᅠ된다.ᅠ거기서 ‘자기ᅠ삶의ᅠ예술가’라는 말이ᅠ나온ᅠ것이ᅠ아닐까.ᅠ우리ᅠ모두가 예술가가ᅠ되어ᅠ각자ᅠ만들어내는ᅠ최고의ᅠ걸작은ᅠ바로 ‘자기ᅠ자신’일 테니. 

‘나’라는ᅠ최고의ᅠ걸작을 만들어가는 여정에서 철학은 아주 든든한 길라잡이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제대로 느낄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그래서 더 고마운 철학자 이충녕에게 진심으로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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