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선’에 대하여

‘위선’이라는 주제에 들어가기에 앞서 니체의 ‘도덕’ 얘기로 먼저 시작해보려 한다. 그의 [도덕의 계보학]이라는 책은 나로 하여금 선악의 문제를 완전히 다른 관점에서 다시 바라보게 했기 때문이다. 또한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해 좀 더 깊이 이해하는 계기가 되어주기도 했고. 하지만 내 마음 한 켠엔 늘 풀리지 않는 뭔가가 자리하고 있었는데… 우리 현주샘, 케이트샘, 예슬샘과 함께라면 그런 얘기들을 편하게 할 수 있을 것 같아서다. ㅎㅎ 그럼 조금 긴 여정이지만 출발해 볼까나…

독일의 그 유명한 철학자 칸트는 도덕을 하나의 선험적인 보편 법칙으로 간주하고 신을 요청하며 정언명법을 말했는데, 같은 독일사람 니체는 그게 아니라 순전히 인간이 만들어낸 거라고 본다. 니체는 묻는다.

‘인간은 어떤 조건 아래 선과 악이라는 가치 판단을 생각해냈던 것일까? 그리고 그 가치 판단들 자체는 또 어떤 가치를 갖는 것일까? 그것은 이제까지 인간의 성장을 저지했던 것일까, 아니면 촉진했던 것일까?’

그 당시 누구나 자명한 보편법칙으로 믿고 있던 도덕까지 의심할 수 있었던 니체가 정말 대단하지 않은가? 니체의 주장은 대략 이런 거다. 우리가 어떤 것을 옳다고 느끼는 이유는, 어린 시절부터 우리에게 옳다고 규정된 것에 대해 한 번도 깊이 성찰해보지 않고 맹목적으로 받아들이는 데 있을지도 모른다고. 아니면 우리가 의무라고 부르는 것이 나에게 지금까지 빵과 영예를 제공해왔기 때문일지도 모르고. 다시 말해 그것이 우리에게 ‘생존의–조건’으로 여겨지기 때문에 그것이 나에게 ‘옳다’고 받아들여진다는 것이다.

정말 그럴듯하지 않은가. 모든 사람이 옳다고 믿는 것들은 나한테서도 역시 아주 자연스럽게 하나의 신념으로 자리 잡았을 테니 말이다. 우리는 단 한 번도 그것에 대해 의심을 해볼 생각은 못한 거다. 특히 의무에 대해선 더더욱 그렇다. 그 대표적 인간이 바로 나다.

그의 사유를 따라가다보니 지금까지 선악에 관하여 행해진 고찰은 조악하기 짝이 없었다는 말이 이해가 되더라. ‘도덕’이란 무엇인가? 이렇게 본질을 묻는 서구 형이상학적 방식이 과연 제대로 된 질문일까? 난 그 도덕 자체의 본질이 궁금한 게 아닌데? 그러니 ‘어떤 것이 도덕적이게 하는가?’ 바로 이렇게 ‘도덕을 사로잡고 있는 힘’은 무엇인지, 그 ‘도덕이라는 체계 안에서 무엇이 작동’하는지를 물어야 하는 거란다.

그럼 ‘도덕이 대체 우리에게 무슨 도움이 되지?’라고 물으면 괜찮은 건가? 사실 그동안 여러 철학자들 사이에서는 도덕 개념은 각각의 사회집단이 처한 역사적 조건에 따라 변화한다는 공감대가 있었다. 그렇다면 그와 같은 맥락에서 니체가 주목한 건 ‘선악이 무엇’인지가 아니고 선악이라는 가치판단을 생각해낸 그 ‘어떤 조건’이었을 게다. 선악이 대체 무엇을 위해, 어떤 이익이 되기에 만들어졌을까?

니체는 말한다. 도덕은 우리의 ‘생존조건’이었다고. 생존조건이라… 사실 서구 철학의 2000년 동안 철학자들이 제기해왔던 인류 보편의 질문이 바로 ‘왜 도덕적으로 행해야 하는가’와 ‘도덕적 선과 악의 본질은 무엇인가’였다. 칸트는 우리가 자유롭게 선택하는 의지의 존재이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자유롭기 때문에 도덕적 행위를 한다는 거다. 니체가 ‘철학을 망친 게 도덕’이라고 말하는 이유이리라. 칸트의 말처럼 정말 절대적 도덕이 있다고? 니체는 절대 동의할 수 없단다. 도덕도 역시 해석이란다. 해석이란 우리가 ‘생존조건으로서의 도덕’을 스스로 만들어내고 그 생존조건을 반영한다는 거다. 쉽게 말하면 우리가 살기 위해서 인간이 만들어낸 게 도덕이란 얘기다.

선과 악의 근원도 결국은 전통 형이상학적 프레임에서 찾은 거라고 볼 수 있다. 이 세계를 이원화시켜서 플라톤식으로 말하면 ‘이데아-현상’이고, 기독교적으로 말하면 ‘신의 나라-인간 세계’와 같은 구분이라는 거다. 선과 악의 개념은 ‘좋음’과 ‘나쁨’에서 나왔단다. 그 어원을 보면, ‘좋음’은 ‘고귀한, 용기 있는’이라는 의미이고, 그 당시 지배계층이었던 그리스의 귀족들은 자신들이 바로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단다. 거기에는 형이상학적 의미 자체가 없다. 그저 단순하게 ‘좋다’는 뜻이다. 그게 다다. 반면에 ‘나쁨’이라는 단어엔 ‘노예적인, 게으른’이라는 어원적 의미를 담고 있다. 당시 귀족들은 노예를 보면서 게으르다고 생각했단다. ‘너희들은 게을러. 그래서 나빠.’ 뭐.. 이런 느낌인 거다. 귀족들이 쓰는 이 말에는 결코 어떠한 악의적 의미도 없었다. 진짜 아주 심플하고 즉흥적인 ‘좋고 나쁨’인 거다. 비하의 의미도 없었다. ‘그냥 난 고귀하니까 좋은 사람이고, 넌 게을러서 나쁜 사람이야.’ 이 정도?

이쯤 되면 니체가 도덕을 칸트가 선험 철학을 위해 만든 ‘도덕 형이상학’에서 ‘인간학’으로 끌어내린 거라고 볼 수 있을 게다. 우리의 습관화된 관찰은 여러 현상들을 단일한 것으로 여기고 그것을 사실이라고 부른다. 또 이 사실들 사이에는 텅 빈 공간이 있다고 생각해서 각각의 사실들을 고립시키고. 하지만 니체는 ‘사실은 없으며 있는 것은 오직 해석뿐’이라고 말한다. 객관적인 불변의 진리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거다. 우리가 인식하는 모든 것은 사람들 각자의 관점에 따라 철두철미하게 조정되고 단순화되고 도식화되고 해석되어 있다는 거다. 이게 그 유명한 니체의 ‘관점주의’다. 이 세계는 해석이 아닌 게 없다는 것이다.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 그리고 선인과 악인에 대한 니체의 분석은 가히 충격적이다. 니체는 단순한 ‘좋음과 나쁨’에서 나온 ‘선과 악’이라는 언어 안에는 ‘영적인 의미’가 담겨 있다고 말한다. 원래는 없던 ‘형이상학적 의미’가 생겼다는 거다. 귀족들로부터 ‘나쁘다’는 소리를 듣던 노예들이 ‘악’이라는 단어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들의 입장에서 귀족들은 ‘악’한 거란다. 귀족들, 즉 자신의 주인을 ‘악’으로 규정한 것이다. 언어적 전도가 일어난 셈이다. 니체는 도덕의 본질을 귀족 도덕과 노예 도덕이라는 관점에서 보았다. 귀족 도덕은 결국 주인의 도덕이라 이해하면 쉬우리라.

주인의 특징은 어떤가? 대체로 자신감 넘치고 자기 결정적이고 자기 긍정적이다. 또 강하고 화려함도 갖추고 있다. 주인들은 또 자연스럽게 그런 모습이 되고자 하겠지? 그게 좋은 것이니까. 그런데 노예는 어떤가? 자신감도 없고 남의 눈치나 보고 의존적이며 자기 부정적이다. 게다가 약하고 지저분하기까지 하고. 그것은 주인이 보기에 나쁜 거다. 근데 주인의 이런 모습이 노예들의 입장에선 오히려 더 나쁜 것으로 간주된다… 어떻게?? 주인의 화려함은 사치스러운 것이고 자신감이 넘치는 모습은 이제 건방진 것이 되며 자기 결정적인 태도는 독단적인 것이 되고 자기 긍정적인 모습은 허세로 해석된다. 좀 찌질하긴 하지만 노예의 입장에서 보면 그럴 수도 있겠다 싶다. 우리 인간이 참 그렇더라. 씁쓸하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는 이것도 결국 관점(입장)의 차이와 또 연결될 수 있겠다.

그럼 주인의 모습을 이렇게 해석하는 노예가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어떻게 평가할까? 노예는 자신에 대해 이렇게 생각한다. ‘나는 약한 것이 아니라 선량한 것이고 지저분한 게 아니라 검소한 것이며 의존적인 것이 아니라 타인의 생각을 존중하는 거야. 그리고 내가 부정적이라고? 그건 자기 성찰이야. 나는 자신감이 없는 게 아니라 배려심이 있는 거지.’ 이렇게 말이다. 상대방을 하나의 ‘적’인 ‘악’으로 규정하고 자신이 ‘선’이 되는 이런 식의 도덕이 바로 노예 도덕이란다.

입장이 바뀌니 똑같은 현상이 완전히 다르게 읽힌다는 거다. 니체가 도덕에서의 노예 반란은 ‘원한’ 자체가 창조적이 되고 가치를 낳게 될 때 시작된다고 했던 바로 그 말을 떠올리면 쉽다. 이 원한은 실제적인 반응, 행위에 의한 반응을 포기하고 오로지 상상의 복수를 통해서만 실현가능한, 스스로 해가 없는 존재라고 여기는 사람들의 원한이라고 했던 바로 그 말. 맞다. 피지배자는 지배자에 대한 원한이 있기 마련이고, 그럼에도 그들로서는 물리적 복수는 불가능하니까. 힘으로는 싸울 수 없으니 정신적 복수가 가능한 심리학적 기제가 발달한 거란다.

그럼 다시 노예의 입장이 한 번 되어볼까? 노예가 갖는 감정 중에서 눈여겨볼 게 바로 주인에 대한 ‘원한’ 감정이다. 원한, 즉 ‘르상티망’이라고 하는 이 감정이 뭐냐? 그건 바로 약자들이 강자들에 대해 갖는 감정, 즉 나약한 자들이 현실에서 자신의 억울한 처지, 그로 인해 느끼는 불행을 잊기 위해 만들어낸 하나의 거짓말 같은 논리라는 거다. 

음… 여기서 무의식이 작동하는 건가? 프로이트가 ‘무의식’을 이론화하기 전에 이미 니체가 그 개념을 얘기한 거나 마찬가지네. 니체의 표현대로 하자면 ‘정신적 만족을 위한 자기기만’? 그럼 아큐(阿Q)의 정신승리법 같은 건가? 그니까 우리가 진리라고 믿는 그 도덕이라는 게 결국 그동안 철학자들이 말한 것처럼 ‘이성’으로부터 나온 게 아니라 바로 이런 원한 감정으로부터 나온 거란다. 니체는 과연 심리학자였다. 니체라는 19세기 철학자가 오늘날 심리학자들이 말하는 인간의 무의식과 창조성의 본질을 앞서 간파했으며 <도덕의 계보학>이 바로 그것을 탐구한 책이라는 생각에 새삼 다시 한 번 전율이 느껴졌다. 심리학의 3대 거장인 프로이트, 융, 아들러도 결국 쇼펜하우어와 니체의 철학에 큰 영향을 받았다고 하지 않았던가.

‘좋음’과 ‘나쁨’이라는 대립의 기원에서 어떻게 선악이 나왔느냐? 그건 바로 그 ‘좋음’과 ‘나쁨’의 대립, 다른 말로 ‘귀족’과 ‘노예’의 대립 속에서 약자의 위치에 있던 노예들이 주인에 대해 원한 감정을 갖게 되면서 만들어낸 ‘나는 선한 자이고 주인은 악한 자’라는 프레임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면 인간은 왜 애초에 그런 노예 도덕을 가지게 된 걸까? 기독교 때문이란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그 위에는 플라톤이 있겠고. ‘마음이 가난한 자에게는 복이 있으니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요’ 이 성경구절을 들어봤을 게다. 니체는 그리스도교의 가치 판단은 바로 이 말에서 드러난다고 보았다. 마음이 가난한 자, 불행을 운명처럼 짊어진 자, 십자가를 지고 간다는 말도 있지 않나? 이처럼 약한 자는 ‘선한 자’로 간주되었으니 강한 자는 어찌 되었겠나? 아까 말한 것처럼 고귀함,아름다움을 지니고 행복 등을 누리던 강한 자는 이제 ‘악한 자’가 되지 않았을까? 

여기서 한 가지 더!! 그리스도교는 금욕만을 추구하느라 인간이라면 너무도 자연스러운 본능적 쾌락을 억눌러왔다는 것을 상기하자. 이렇게 인간의 육체적 쾌락보다 이성을 중시한 건 바로 플라톤이 만들어놓은 그 이데아 때문이라는 것도 말이다. 그는 사람들로 하여금 끊임없이 우리가 발 딛고 있는 이 대지가 아니라 저 하늘의 이상향만을 바라보게 했단 말이다. 니체는 그러한 그리스도교적인 가치관을 ‘노예 도덕’이라 부르는 거다. 

늘 핍박을 받아왔던 성직자 민족인 유대인들을 한 번 생각해보자. 그들은 자신의 적과 압제자에게 오직 그들의 가치를 철저하게 전도시킴으로써, 즉 정신적인 복수 행위로 명예회복을 할 줄 알았던 거다. 유대인들은 서구의 인류 역사에서 지배만 당하던 민족이었으니 정복자(귀족)들의 문화에 대한 가치를 전복시켜 정신적 복수를 했다는 거다. 즉 정복자들의 문화에 대항하여 ‘No’를 말함으로써 자신들의 가치를 창조한 게 노예 도덕이라는 말이다. 바로 ‘원한’ 감정의 토대 위에서 만들어진 가치인 거다. 늘 외부로 방향을 틀어서 적을 설정하고 약한 자는 ‘나’고, 신은 약한 자의 편에 서 있다고 하는… 노예들이 기독교 사상을 가지고 반란을 일으킨 거다. 기독교적 가치, 즉 믿음, 사랑, 소망, 용서, 희생 같은 것은 노예들에 의해 선한 것이 되었다는 거다. 하지만 이런 노예의 도덕은 허구이며 왜곡된 도덕이기 때문에 인간은 주인의 도덕을 회복하기 위해 기독교적 가치를 없애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신은 죽었다’라는 명제가 필요했던 거다. 음… 할 얘기는 너무 많지만, 일단 여기까지…

니체는 어쩌면 나와는 완전히 다른 종의 사람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살면서 그렇게 치열하게 의심을 해본 적이 없다. 의심을 한다는 건 싸울 수 있는 용기가 전제되어야 한다. 그 싸움의 대상이 꼭 사람이 아니어도 말이다. 지난날을 돌아보니 여럿이서 모여 뭔가를 결정할 때 나는 나의 의견을 관철시켰던 적이 없었던 것 같다. 나는 늘 다수의 의견을 따르는 편이었고, 있는 듯 없는 듯 그저 조용히 존재감 없는 사람으로 묻어가기를 바랐다. 굳이 나까지 나서서 선택지 하나를 더 늘릴 마음이 조금도 없었다. 나는 특별히 좋은 것도, 그렇다고 못 견디게 싫은 것도 없었으니까. 그냥 모두가 좋으면 나도 좋았고 다들 반대하면 딱히 내 취향을 고집할 필요도 느끼지 않았다. 다 좋으면 그게 좋은 거지 했다. 거기서 나의 감정은 중요치 않았다. 그게 나였다. 비록 지금 ‘도덕이라는 거대 담론’을 얘기하다가 뜬금없이 나의 이 사소한 일상을 끌어들여 민망하지만…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민망할 게 뭐 있나 싶다. 우리 삶에 사소한 것이란 없는데 말이다. 우리가 맨날 이렇게 거창한 얘기를 하며 살지는 않으니.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 의심의 태도란 결국 일상적 삶을 살아가는 것과 연결된다는 거다. 왜 자신의 생각을 당당하게 말하지 못 하는가? 상대방이 하는 말에 무조건 의심 없이 따르는 게 그 당장은 논쟁의 여지가 없으니 편해 보여도 그렇지가 않다. 그렇다. 나는 남 눈치 안 보고 하고 싶은 얘기 다 하며 살아본 적이 없다. 늘 그렇게 살아보고 싶었지만 결국 나는 결코 이룰 수 없었던 ‘그 당당한 삶’을 산 사람, 이 의심이 많은, 하지만 표면이 심연인 듯 정직한 사내, 그래서 나는 니체가 좋았는지 모른다. 나 자신과 너무 달라서… 그 모습이 너무 투명해서 그래서 좋았는지도 모른다. 나는 분명 책 속에서나마 니체를 통해 대리만족을 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분석심리학자 융(Jung)은 ‘자기(self)’를 찾는 것이 우리 삶의 목표라고 했다. 의식의 ‘자아’가 무의식의 ‘자기’를 찾아 떠나는 여행이 바로 삶이라는 것이다. 융은 사회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젊은 시절에는 어쩔 수 없이 ‘페르소나’라 부르는 다양한 가면을 쓰고 살아갈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중년이 어쩌면 ‘자기’를 찾아 떠날 좋은 기회일 수 있다는 거다. 그런데 난 여기서 또 묻고 싶어진다. 인간이 과연 저 ‘페르소나’라고 부르는 가면을 진정 벗어던질 수 있는 그날이 올까?

난 현주샘과 예슬샘 그리고 케이트샘과 줌으로 만나서 토론하는 시간이 참 좋다. 얘기를 나누다 보면 뭔가 해결되지 않던 것들이 좀 정리되는 느낌이랄까? 니체의 이 [도덕의 계보학]을 읽으며 받았던 충격 속에서 혼란스러웠는데… 지난 주 토론 말미에 예슬샘이 들려준 욥의 이야기, 그 끝에 현주샘의 그리스 비극과의 연결, 그리고 케이트샘의 가면 이야기까지… 그 일련의 스토리 전개 속에서 나만의 결론에 도달한 것 같다. 케이트 샘이 ‘우리가 인간관계 속에서 쓰는 가면은 일종의 살아가는 데 필요한 도구가 아닐까?’ 라는 말씀을 하셨을 때, 니체가 ‘도덕은 생존 조건’이라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우리가 살아있는 한은 생존을 위한 도구로서의 가면은 결코 없어서는 안 되는 필수 조건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럼 이제 이 얘기를 위선과 연결해보자. 맥키넌은 연구를 통해 위선자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정리한 바 있다. 위선자는 부지런하고 이성적인 사람이어야 한단다. 지속적으로 본모습을 속이고 꾸며진 모습을 보여야 하기 때문이란다. 뿐만 아니라 끊임없이 계산을 해야 하므로 이성적 능력이 발달된 사람이어야 한단다. 그리고 도덕에 대해 충분히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사람들이 어떤 행동을 도덕적으로 좋게 생각하는지 잘 알고 있어야 그것에 맞게 행동을 꾸밀 수 있기 때문이란다. 이 대목에서 소름이 돋았다. 도덕에 예민한 관심을 가져야 위선자가 될 수 있다니(이건 생각지도 못했던 거다)… ㅠㅠ

냉정하게 한 번 생각해보자. 상대방을 위선자로 공격하기는 쉽다. 사람들은 누구나 다 사회적 활동을 위해서 실제와 행동 사이에 간극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 사람의 이미지와 실제 모습 간의 간극을 찾아내서 공격하는 건 가능하다. 하지만 그 위선에 대한 공격은 항상 자신에게 되돌아온다. 누가 그 안에서 진정 자유로울 수 있겠는가.

만약 어떤 행동이 맥키넌이 말한 것처럼 어떤 의도 하에, 즉 누군가를 속일 목적으로 하는 가식이라고 한다면… 이 상황에서는 나도 자신은 없다. 그를 위선자라고 비난해도 될 것만 같아서… 하지만 이런 경우가 아니라면 우리가 일상 속에서 자주 만나는 이가 겉과 속이 조금 다르게 행동한다고 해서 그 사람을 ‘위선’이라는 이름으로 단죄할 자격은 그 누구에게도 없는 것이다. 어떤 한 행동이 다른 행동보다 더 옳은지 그른지를 판단하기에 충분한 이유들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는 말은 어쩌면 맞을 지도 모른다. 그저 그 행동이 어떤 상황과 맥락에서 나왔는지에 따라 다른 해석만이 존재할 뿐인지도. 뭐가 맞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여기에 무슨 정답이 있겠는가마는… 하나 분명한 건, 이렇게 완전히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는 선악의 문제를 통해 나의 ‘위선’에 대한 사유의 지평이 조금은 넓어졌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감사한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