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럼프에 대하여

우리가 잘 살다가도 한 번씩 슬럼프에 걸려 넘어지는 이유는 뭘까? 이 ‘걸림’, 슬럼프는 왜 오는 걸까? 그 누구도 초대한 적 없는데 제멋대로 우리 삶에 뛰어드는 이 얄궂은 불청객은 뭔가? 그렇다면, 슬럼프가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의 특징은 또 뭐지? 아니, 정말 단 한 번의슬럼프도 없이 그렇게 이 생을 건너갈 수가 있다고?

새삼스레 슬럼프에 대한 온갖 궁금증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그동안 지독한 슬럼프를 숱하게겪어봤던 1인으로서의 억울함인지, 아니면 그저 단순한 호기심인지 그건 모르겠다. 아무튼 슬럼프에 달린 이 물음표들로 내 생각은 또 멀리 갔다. 내 맘대로 ‘슬픔의 골짜기’라 명명했던 슬럼프의 정체가 진심으로 궁금해졌다는 얘기다. 슬럼프가 대체 뭔데… 우리는 살면서 그렇게 한 번씩 ‘덜컹’인 걸까?

돌이켜보니 슬럼프에 빠졌다고 느끼는 순간, 가장 처음 맞닥뜨리던 감정은 단연 무력감이었다. 무조건 이유 없이 무기력해지곤 했으니까. 아니, 그냥 의기소침(意氣銷沈)해졌다고 해야겠다. 의기소침이라… 사전적 의미로는 ‘뜻한 바가 이루어지지 않아 기운이 없고 풀이 죽은 모습’이란다. 여기서 소침(銷沈)이라는 단어에 주목해보자. 한자로는 ‘사라질 소(銷)’에 ‘잠길침(沈)’이다. 풀이해보면, ‘기세 따위가 사라지거나 까라짐’을 의미한다. 맞다. 슬럼프가 찾아오면 난 마치 늪에 빨려 들어가듯 자꾸만 밑으로 까라졌던 것 같다. 그 다음은?? ‘부진(不振)’이었다. 식욕 부진이든, 성적 부진이든, 활동 부진이든 어떤 형태로든 말이다.

‘부진(不振)’은 ‘어떤 일이 이루어지는 기세나 힘 따위가 활발하지 않은 상태’로 해석하면 맞을 게다. 그러고 보니, ‘어떤 일을 감당할 기운과 힘이 없음’을 의미하는 무기력(無氣力)부터 소침, 부진에 이르기까지 죄다 ‘의욕과 기력이 상실된 상태’를 말하는 거네. 정말 이런상태라면 하고 있던 일은 자연히 그게 뭐가 됐든 그 성과나 성적이 좋을 리 없겠지. 이게 슬럼프다. 가만, 불현듯 ‘무기력과 소침’ 이 둘과 부진의 관계가 새롭게 내 레이더망에 걸려들었다. 그러면서 드는 생각… 전자(무기력과 소침)가 정신적이고 감정적 측면에서의 ‘원인’이라면, 후자(부진)는 그 감정 상태가 물리적으로 구체화된 ‘결과’일 수 있겠구나. 슬럼프 메커니즘의 최고로 단순화된 버전이라면 이게 아닐까?

슬럼프에 대한 연구를 보면 그 원인이 참 다양도 하더라. 그 대부분이 부진한 성적을 끌어올리기 위해 신속한 처방을 필요로 하는 스포츠 분야에 한정된 얘기긴 하지만 말이다. 내게슬럼프는 스포츠로 갈 것도 없이 우리 일상의 어디서나 나타날 수 있는 그런 삶의 조각처럼보인다. 감정을 가진 인간이기에 어쩔 수 없이 겪어야만 하는 숙명이라고 한다면 너무 나간걸려나?

단 한 번도 감정에 휘둘리고자 원했던 적 없었다. 늘 명랑하고자 했으나 절대 그 상태에 도달할 수 없었던 나란 사람. 나는 늘 차분했고 조용했지만 내 마음속은 그 누구보다도 소란스러웠다. 검은 심연의 한 귀퉁이에서 내 삶은 막연했고 그래서 두려웠다. 난 늘 그렇게 내 안의 태생적 불안과 싸워야 했고, 그 과정에서 내가 가장 많이 느꼈던 감정은 슬픔이었다. 슬픔과 슬럼프… 거참, 얘들은 어째 발음도 비슷하냐. 어떻게든 이 둘 간의 연결고리를 찾고픈 내 염원에 긍정이라도 하듯 불쑥 떠오른 이 엉뚱한 생각에 잠시 헛웃음~ 하하하.

슬픔은 그러고 보니 수많은 감정들 가운데 어쩌면 나약함과 무기력함의 상징처럼 보일 수도있겠다. 이 지점에서 난 왜 또 ‘멜랑꼴리(melancholy)’가 오버랩될까? 히포크라테스를 탓해야 할 듯. 서양에서 의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히포크라테스는 멜랑꼴리를 ‘오래 지속되는 두려움과 슬픔으로 인해 무기력해지는 증상’이라고 진단한 바 있다. 그가 정리한 ‘4체액설’은 그리스인들이 인간 신체에 대해 이해하는 근간이 되었단다. 4가지 체액이 혈액, 점액,황담즙, 흑담즙인데, 이 중에서 흑담즙이 바로 멜랑꼴리다. ‘흑(黑)’, 즉 ‘검은’에 해당하는 그리스어가 ‘멜랑(melan)’이고, ‘담즙’이 ‘꼴리(chole)’다. 흥미롭게도 흑담즙 자체도 멜랑꼴리지만, 이 검은 담즙의 과다로 얻게 되는 병적 징후 또한 멜랑꼴리다.

고대에 이 멜랑꼴리는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 ‘천재들이 걸리는 병’으로 인식되었다. 하지만그것이 중세에는 ‘신의 저주’로 간주되었다가 르네상스 시대에 이르러 ‘심미적 영감’으로 격상되기도 했다. 그리고 19C에는 다시 우울증(depression)의 한 유형으로 분류되었다. 멜랑꼴리에 대한 다양한 표현 중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건 ‘멜랑콜리에서 매력을 뺀 게 우울증’이라고 했던 수전 손택의 해석이다. 누가 예술평론가 아니랄까봐 그녀는 우울증을 정의하면서 이리도 근사하게 멜랑꼴리를 언급했다.

이쯤 되면 내가 자꾸 슬럼프를 멜랑꼴리와 연결시키려는 의도를 알아챘으려나? 그렇다. 난 슬럼프가 우리 삶에서 그리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말을 하고 싶은 거다. 슬럼프에 빠져 우울한 정서가 깔리면 분명 많이 슬프고 아프겠지만, 그 신산(辛酸)한 여정 끝에는 카타르시스(catharsis)라는 ‘자기 정화’의 기제가 기다리고 있다는 역설에 기대고 싶은 거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비극의 위대함은 바로 카타르시스에 있다. 카타르시스에 확실히 치유의 기능이 있다는 것은 정신분석학자 프로이트도 인정한 바가 아니던가. 나는 그것이 슬픔의 효용이라고 믿는다. 우리 인생에서 꼭 만나게 되는 이 ‘덜컹’과 ‘걸림’이 그 역기능에도 불구하고 많은 순기능도 있음을 믿는 것과 같은 이유이다. 그래서 난 슬럼프를 극복해야 할 대상이 아닌 우리 생이 건강하게 지속가능하기 위한 필요조건으로 바라보기로 했다.

슬픔이 장기화되면 우울증도 되고 더 심각한 병리적 현상으로 발전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감정은 마법과도 같다. 이성으로는 절대 설명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일군의 현상들인 이 감정이란 게 어느 순간 누군가를 성장시키는 힘이 있다는 걸 기억하자. 이성의 힘이 아무리 강력하다 해도 그것을 통해서만은 이 세상의 전부를 이해할 수는 없다는 것도.

프랑스의 철학자 사르트르가 말했듯이 감정은 때때로 이성으로는 열리지 않는 세상의 또 다른 문을 열어주는 마법 같은 힘을 발휘한다. 그것을 통해 우리는 전혀 다른 대상 혹은 전혀다른 세상을 마주하게 된다. 우리가 우리 안의 감정을 잘 데리고 사는 법을 배워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 방법 중 하나가 ‘내게 달려있는 것’과 ‘내게 달려있지 않은 것’을 구별할 줄 아는 지혜를갖는 게 아닐까 싶다. 이것을 인정하는 것은 또 용기일 수도 있겠다. 내가 욕망하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을까봐 걱정하는 마음이 불안이요, 그렇게 욕구 충족에 대한 확신이 없을 때 불안은 어김없이 찾아온다. 본인이 잘 통제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엄청난 정신적 에너지를 쏟으면서도 정작 자신이 통제가능한 건 등한시 하는 인간의 속상 상 우리는 고통 속에 살아갈 수밖에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활동을 넘어 그 이상의 것을 걱정하는 것은 우리에게득이 되지 않음을 알면서도 우리는 늘 그 너머의 것을 욕망한다.

우리가 성공 앞에서 좌절했을 때 자주 하는 ‘최선을 다했다’는 이 말은 어떤 뉘앙스로 쓰느냐에 따라 그 의미는 천양지차(天壤之差)가 된다. 여기에 ‘내게 달린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별하는 지혜의 미학이 숨어 있다. 고대 로마의 정치가이자 철학자인 키케로는 화살을 쏘는 건 나에게 달려있는 일이지만, 그 화살이 과녁에 맞느냐는 나한테 달린 문제가 아니라고 했다. 과녁을 맞히겠다고 결심할 수는 있다.하지만 진짜로 맞힐지는 아무도 모른다. 화살을 쏘기까지 우리가 역량을 키우기 위해 최선을 다할 때 필요한 것이 바로 의지이다. 많은 운동선수들이 올림픽에 나가기 위해 그 오랜 시간 묵묵히 흘리는 땀방울의 원천 중 하나가 바로 투철한 의지일 수 있다. 하지만 실제 경기에서 이기는 건 또 다른 문제다. 내가 최선을 다했다는 것이 반드시 목표 달성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거다. 그 누구도 성공을 약속해준 적이 없다. 그저 우리의 간절한 바람일 뿐이다.

여기서 [명상록]의 저자이자 스토아학파의 대표적인 철학자 아우렐리우스의 말을 빌려오기로 하자. 그는 인생의 기술은 춤꾼의 기술보다는 레슬러의 기술과 비슷하다고 했다. 미리 철저하게 준비해서 갑작스럽고 예상할 수 없는 공격에 맞서야 한다는 측면에서 그렇다는 얘기다. 이 말의 핵심은 레슬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역량을 기르는 것이지 그 결과까지 통제할 수는 없다는 거다. 모든 경우의 수를 생각해서 단단히 준비하고 강인한 의지로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용감하게 싸웠다면, ‘최선을 다했다’ 뒤에 마침표(period), 그거면 충분하다는 거다. 누군가 ‘난 최선을 다했는데 왜?’라고 의문부호(question mark)를 던지는 순간, 슬럼프는 우리를 껴안고 중력의 유령은 우리를 저 아래로 끌어내린다.

누구나 행복을 원하지만 어떤 갑작스러운 불행이 닥칠지 모르는 인생길, 우리가 할 수 있는건 그 숱한 부침(浮沈) 속에서 헤쳐 나갈 수 있는 역량을 기르는 것이다. 그것만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이요, 거기까지 필요한 것이 투철한 의지일 테다. 그 이상을 바라는 것은 집착이다. 내게 집착은 어떤 정해진 규칙이나 목표를 만들어 놓고 거기에 과도하게 매달리는 것을 의미한다. 키케로의 화법에 대입해보자면, 화살을 쏘는 데까지 필요한 미덕이 투철한 의지라면, 과녁에 맞히는 것을 욕망하는 것은 집착이라고 할 수 있으려나(그냥 내 생각 ㅎㅎ).

레슬링 경기에서 제 아무리 열심히 준비하고 훈련을 했어도 상대방의 일격에 얼마든지 쓰러질 수 있듯이, 살기 위해 최선을 다했을지라도 언제 어떤 고통이 우리 삶을 송두리째 흔들어놓을 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외부로부터의 자극’과 ‘내부에서 일어나는 욕망이나 감정’ 사이의 긴장관계에서 균형을 유지하며 주어진 상황에 잘 대처할 수 있는 인간적 역량이필요한 이유이다. 이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투철한 의지로 역량을 쌓는 일에 최선을 다했는데도 불구하고 실패할 수 있음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것은 내 역량 너머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마치 나는 절대 실패하지 말아야 하는 사람인 양, 열심히 노력했으니 반드시 성공해야만 하는 것처럼 그 결과조차도 자신이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거다. 그것은 결코 약속된 것도 아니고 당연히 주어지는 것도 아니다. 아무도 약속해 준 적이 없는데 제멋대로 욕망하는 그런 환상은 경계할 필요가 있다.

때로는 그런 집착과 기대, 그에 걸맞은 노력이 우리를 높은 곳으로 이끌어주고 더 좋은 결과를 만들어줄 수도 있으리라. 하지만, 바로 그 집착 때문에 우리는 잉여의 불안을 더 겪게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각자 이미 디폴트로 가지고 있는 고통에 더해서 말이다.

인생의 기본값인 고통을 있는 그대로 환대할 수만 있다면, 우리 일상적 삶도 조금은 가벼워지지 않을까. 고통 없는 행복을 욕망하는 것이야말로 허망한 일이다. 그러니 슬픔과 좌절은 늘 우리와 동행한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투철한 의지를 불태우며 질주하는 와중에 슬럼프와 마주하게 될라치면 가만히 내면으로 침잠해 들어가도 좋으리라. 그 안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알아차리고 그것을 받아들일 줄 아는 지혜와 용기를다시 장착할 수만 있다면, 그 자체로도 충분히 가치 있는 게 아닐는지.

밀란 쿤데라의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 이런 말이 나온다.

“그녀는 [……] 이상한 행복, 이상한 슬픔을 느꼈다. [……] 슬픔은 형식이었고, 행복이 내용이었다. 행복은 슬픔의 공간을 채웠다.”

슬픔은 형식이었다는 이 말, 내용인 행복을 채우기 위해 슬픔이 반드시 그 틀로 존재해야만했다는 이 말이 얼마나 나에게 위로가 되었던가. 작가가 마치 내 귀에 대고 속삭여주는 것만 같았다. 나의 생에 가끔씩, 느닷없이 찾아오는 선로이탈에도 불구하고 나는 결국 다시 일상적 삶에 돌아올 수밖에 없다고. 많이 고단하고 자주 슬프게 하는 그런 삶이지만 그래도그것과 마주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말이다. 사는 동안 그렇게 우리에게 스며드는 슬픔이 때로는 우리를 또 다른 세상으로 인도해줄 수도 있을 거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