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움’에 관한 인문학

불확정성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우리 안에 내재하고 있는 이 불안이 무지(無知)에서 온다고 본다면, 그 무지의 상태에서는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는 말도 성립될 수 있을 게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불안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의 결과로서, 앎(知)의 확장은 자유의 획득인 동시에 무지(無知)의 확장으로 이어진다는 것! 이것이 바로 공부를 하면 할수록 내가 모르는 게 너무 많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말의 의미가 아닐까 싶다. 결국 자신의 무지를 깨닫고 알고자 부단히 노력하는 것이 공부요,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진정 자유롭게 사는 길일 것이다.

그래서 오늘은 공부에 대한 얘기를 동양의 고전인 [맹자]로부터 꺼내보려 한다. 중국 남송의 학자인 주희(朱熹)의 말대로라면 [논어], [맹자]와 같은 책은 공부하기 위해서 꼭 읽어야만 하는 책이고, 누구든지 읽기만 하면 배우는 것이 있고 인격의 변화가 생겨야 한다. 이 말은 최소한 내게는 맞는 말이었다.

아주 어릴 적 아빠로부터 배운 천자문을 시작으로 나의 한자사랑은 유별났다. 나의 유난한 짝사랑 덕분에 한문 교과서에서 배웠던 멋진 문장들도 덩달아 내겐 특별해졌고 그만큼 강렬했다. 그중에서 맹자의 사단[四端]이 단연 최고였다.

맹자는 사람들은 모두 남에게 차마 하지 못하는 마음[不忍人之心:불인지심]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우물에 빠지는 아이를 보면 자연스럽게 생기는 마음인 측은지심[惻隱之心]이 인(仁)의 단서[端]가 된다고 했다. 이로부터 맹자의 인간 본성에 관한 ‘성선설(性善說)’이 나왔다. 나는 정말 굳게 믿었었다. 인간은 본래 선하다고 말이다. 그래서 그 어떤 경우라도 그가 처한 상황과 환경을 탓하면 탓했지 인간 자체는 미워하지 않으려 노력했었다.

어디 그뿐인가. 부끄러워하고 미워하는 마음[羞惡之心:수오지심], 사양하는 마음[辭讓之心:사양지심], 그리고 옳고 그름을 따지는 마음[是非之心:시비지심]은 또 다른 결의 가르침이었다. 부끄러워하고 미워하는 마음은 의로움(義)의 단서요, 사양하는 마음은 예(禮)의 단서요, 옳고 그름을 따지는 마음은 지(智)의 단서라고 했다. 사람이 이 네 가지 단서[四端:사단]를 가지고 있음은 사지를 가지고 있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어릴 때 만난 이 문장으로부터 나는 사람 된 도리는 어찌해야 하는지 삶의 태도를 배웠던 것 같다. 불쌍한 사람을 보면 그냥 지나칠 수 없게 되었고, 정의[正義]가 정확하게 뭔지는 모르나 최소한 나 자신에게 부끄럽게 살지는 않으리라 다짐했었다. 나는 이것이 공부의 순기능이자 교육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동안 교육은 지식을 가진 자들이 그 권력을 승계하는 가장 적절한 방식으로 작동해왔다. 아주 오랫동안 사교육의 형태를 띤 교육은 지배자를 위한 것이었다. 누구나 평등하게 공부할 수 있는 공교육의 출현은 그래서 감사했다. 

작금의 시대를 지식의 시대라고들 한다. 맹자의 사단 중에서 ‘인(仁)’이 아닌 ‘지(智)’가 우선하는 시대 앞에서 나는 ‘배운다는 것’은 무슨 의미여야 할까를 다시 생각해본다. 어제보다 나은 오늘을 위해, 그리고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위해 우리는 끊임없이 배움을 갈망한다. 그렇다면 ‘더 나은 나’를 만들기 위한 노력은 늘 나에게 행복을 가져다주는가? 이 질문은 공부하면서 한 번씩 느끼게 되는 고통에 대한 얘기를 하고자 함은 아니다. 공부를 좋아하는 것과는 별개로 그 과정의 일부로서 고통은 필연적으로 찾아오는 것이므로.

나는 새로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자세에 대한 얘기를 하고 싶은 거다. ‘~보다 더 나은’이 아니라 ‘~와는 다른’이라는 시각으로 ‘배움’을 바라봐야 함을 말이다. 혹자는 ‘더 나은’만을 강조하다보면 우리의 과거는 늘상 버려지기 마련이라며 안타까워한다. 나의 성장을 위해, 미래의 좀 더 발전된 나의 모습을 상상하며 앞으로 나아갈 뿐 잠시 뒤돌아서서 쉼표를 찍을 여유는 없다는 거다. 그렇다면 이토록 숨가뿐 일상적 삶에서 우리가 불안한 이유는 미래에 희망이 없어서가 아니라 과거의 상실 때문이 아닐는지.

어른이 되면 왠지 나 스스로 내 삶을 책임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막상 나이를 먹고 이렇게 버젓이 어른이 되었음에도 난 여전히 이 삶을 혼자 책임질 수 없을 것 같은 불안감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어느 철학자의 말처럼 홀로서기와 책임지기가 주술적이고 신화적인 꿈보다 더 실현하기 어려운 꿈인 걸까?

어른이 된다는 건, 치기어린 열정만으로도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았던 과거의 내가 사실은 아주 취약하다는 것을 아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나 홀로 당당하게 나다운 삶을 살 수 있을 것 같았건만 그게 그렇게 녹록지 않음을 자각하는 순간부터 말이다. 결국 ‘우리’라는 공동체를 필요로 하는 이유일지도 모르겠다. 혼자서는 취약하기 짝이 없는 우리에게는 반드시 ‘우리’가 존재해야 함을 깨닫는 것인지도. 우리가 연대할 수 있는 힘은 바로 이것을 인정하는 데서 나오는 것인지도.

공부를 열심히 해서 지식을 채우는 것도 좋고 매일매일 성장하는 것도 좋다. 그럼 그 다음은? 과연 나의 이 배움은 어디에 쓰이게 될까? 보잘 것 없는 지식이지만 이 세상에 아주 작은 밀알이라도 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나의 공부는 충분히 의미가 있을 게다.

‘남에게 차마 하지 못하는’ 그 선한 마음에 가득 담은 지식을 태양이 만물을 순수한 황금빛으로 물들이듯 누군가와 나눌 수 있기를. 그 넉넉함을 배울 수 있는 공부라면, 난 언제든지 그 공부와 사랑에 빠질 준비가 되어있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정말 좋아하는 시, 이문재 시인의 <어떤 경우>를 하나 소개하며 이 글을 마쳐야 하겠다.

어떤 경우 / 이문재

어떤 경우에는

내가 이 세상 앞에서

그저 한 사람에 불과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내가 어느 한 사람에게

세상 전부가 될 때가 있다

어떤 경우에도

우리는 한 사람이고

한 세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