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무문서동(無問西東)>

실천적 지성으로서의 진리

참 괜찮은 중국 영화 한 편을 만났다. 한국에는 소개되지 않았다니(한국어 자막이 있는지는 모르겠다) 이 좋은 영화를 하마터면 놓칠 뻔했다. 중국어 제목은 “무문서동(無問西東:동서를 묻지 않는다)”인데 ‘아무것도 따지지 말고’ 정도로 번역하면 되려나.

베이징대와 더불어 중국 대학의 양대 산맥인 칭화대의 역사를 담은 옴니버스 형식의 영화다. 2010년에서 시작되는 이 영화는 마오쩌둥의 시대 1962년, 항일시기 1938년, 또 1923년 과거로 계속 플래시백 하며 다른 시공간에서 살았던 청춘들의 이야기를 보여준다. 특히 1938년의 공간적 배경인 윈난성(云南省)에 위치한 쿤밍(昆明)이라는 도시는 칭화대, 베이징대, 난카이대가 전란을 피해 연합해서 시난연합대학교(西南联合大学)를 세운 곳이다. 그 전쟁 속에서도 나라의 미래를 짊어질 일꾼을 길러내는 일은 그토록 중차대한 일이었던 것이다. 중국 학계의 교육에 대한 사명의식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일본군이 주요 도시들을 함락하고 파괴한 처참했던 시절의 굶주림과 고통 속에서도 교육을 포기하지 않는 칭화대 교수와 학생들의 모습은 가슴이 벅차오를 정도로 인상적이다. 이 각각의 스토리가 마지막에 하나의 완성된 서사로 드러날 때 느꼈던 전율을 잊을 수 없다.
 
1923년, 칭화대의 문학청년인 우(Wu)는 학문을 하는 이유를 찾고자 방황한다. 교장선생님이 고민하는 우(Wu)에게 해주시던 말씀이 내 마음에도 오래도록 머물렀다. “사람들은 일상 속에서 무감각한 채로 그저 살아가기 바쁘다. 그렇게 우리는 열심히만 사느라 ‘진리’를 놓치고 만다. 너의 청춘도 지금 이 순간을 놓치면 다시는 오지 않는 것을.” 우(Wu)가 진리가 무엇인지를 찾던 중 칭화대를 방문한 인도 시인 타고르의 문학 강연을 듣게 된다. 거기서 깨달음을 얻고 학생운동에 뛰어든 우(Wu)는 훗날, 1938년 쿤밍의 피난지에서 학생들에게 타고르의 시를 읽어주며 어떻게 살 것인가를 가르치는 스승이 된다. 

우(Wu)의 이러한 진심어린 가르침은 부잣집 자제인 칭화대 학생 션(Shen)에게 깊은 영향을 준다. 그는 입대하지 말고 자신의 행복을 찾으라는 모친의 간절한 소망을 뒤로하고 나라를 위해 전투기 조종사로 자원한다. 어머니와의 약속에도 불구하고 결국엔 스승으로부터 배운 것을 실천하는 삶을 살고자 선택한 것이다. “이 시대가 필요로 하는 것은 완벽한 사람이 아니라 가슴 깊은 곳으로부터 우러나온 진심, 정의, 용기, 그리고 사람에 대한 연민이다.” 식사시간에 먹을 것을 따로 챙기는 션(Shen)을 향해 미국인 동료들은 조롱하며 비웃는다. 아랑곳 하지 않고 꿋꿋하게 간식을 모으는 션(Shen), 그는 그렇게 모아둔 것을 피난민촌의 굶주린 아이들에게 가져다준다. 

그 열악한 난민촌의 동굴 속에 모여 배고픔을 잊으려고 외국인 선교사를 따라 노래 부르던 아이들이 비행기 소리가 나자 일제히 밖으로 뛰어나온다. 션(Shen)이 조종하는 비행기에서 떨어지는 통조림과 빵을 받으려고 아이들은 하늘 향해 두 팔을 뻗으며 환호한다.〈어메이징 그레이스〉가 흐르면서 펼쳐지는 이 감동의 서사시가 ‘왜 이 세상이 그래도 살만한 지’를 증명해주는 것만 같아 울컥했다.

1962년, 션(Shen)의 따뜻한 마음을 먹고 자란 그 난민촌의 고아였던 첸(Chen)은 칭화대의 우등생이 된다. 첸(Chen)은 자신이 받은 그 사랑을 절망에 빠진 친구 민(Min)에게 고스란히 돌려주고 조국을 위해 헌신한다. 이게 사랑의 대물림, 선한 영향력이 아니면 무엇이랴. 첸(Chen)과 민(Min)이 보여준 사랑은 내 마음을 참 많이 아프게도 했지만 그만큼 사랑이라는 가치의 소중함이 내 가슴을 촉촉하게 적셔준 에피소드였다. 

첸(Chen)과 민(Min), 이 둘과 삼총사로 함께 어울렸던 또 다른 친구 리(Li)는 선택의 순간에 자기방어를 위해 침묵하며 진실을 외면한다. 그 죄책감으로 평생을 괴로워하며 살았지만 결국 마지막에는 타인의 생명을 구하고 눈을 감는다. 리(Li)의 희생으로 목숨을 건진 부부의 아들이 2010년을 사는 쟝(Zhang)이다. 칭화대 졸업생인 그는 회사의 비정한 권력다툼에서 갈등하며 한때 회의에 빠지기도 하지만 결국 자신의 내면을 채우고 있는 사랑을 지키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마침내 사람에 대한 의리를 선택한다. 

‘사랑할 것을 사랑하고, 해야 할 일을 하며, 자신의 내면에 따르면서 동서를 묻지 않는다.’ 여기서 영화의 제목인 ‘동서를 묻지 않는다’가 나온 것이다. 이 말은 칭화대의 교가(校歌)에 나오는 구절이기도 하다. 이 영화에서 일관되게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어쩌면 우리가 살면서 맞닥뜨리게 되는 선택의 문제인지도 모르겠다. 충(忠)과 효(孝), 진실(眞)과 거짓(假), 의(義)와 리(利) 등 모든 순간 우리는 갈등하고 번민하며 소신과 싸워야 한다. 그리고 그 순간마다 옳은 선택을 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그리고 내면의 의지가 얼마나 중요한 지를 말해주는 듯하다. 절체절명의 순간에 어떠한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인생은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서로 다른 시대를 살았지만 그 청춘들은 이렇게 ‘진리’라는 끈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진리란 무엇을 보고 듣고 행하든 누구와 함께 하든 마음으로부터 차오르는 ‘후회도 부끄러움도 없는’ 평화요 희열이다. 이 정의는 진리탐구가 머리로만 하는 이상적 지식이 아닌 현실에 발을 디딘 뜨거운 가슴이 필요한 실천적 지성이어야 함을 보여준다. 자기 내면에서 옳다고 하는 소리를 들었다면 ‘아무것도 따지지 말고’ 소신껏 앞으로 나아가라. 이것이 어쩌면 “무문서동(無問西東)”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우리들에게 전하고자 한 메시지가 아닐까.

영화는 시종일관 공허하지 않으면서도 감정의 과잉도 없는 담백함으로 진리란 무엇인가를 스스로에게 질문하게 한다. 나는 과연 내 자신의 내면에 충실한 삶을 살고 있는가. 내가 옳다고 믿는 일을 위해 소신 있는 선택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는가. 지금 이 순간, 가을이 오는 길목에서 나의 내면의 소리에 가만히 귀 기울여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