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일차_제행무상諸行無常

불교의 근본교리를 이루는 세 가지 진리를 가리켜 삼법인(三法印)이라 한다. 그 중 하나가 ‘제행무상(諸行無常)’이다. 사람들은 우주 만물을 고정불변의 그 무엇이라고 믿지만, 실은 시시각각 변화하여 한 모양으로 머물러 있지 아니하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 그릇된 신념에서 벗어나라는 불교의 가르침인 거다. 여기서 무상(無常)은 우리가 ‘덧없는 인생’이라 할 때 자주 쓰는 인생무상(人生無常)이라는 말의 바로 그 무상이다. 

그렇다. 오늘의 주제는 ‘덧없음’이다. 이 얘기를 ‘인생무상’이라는 사자성어로 해도 되련만, 굳이 불교용어 ‘제행무상(諸行無常)’을 선택한 이유는 새로운 용어 하나를 더 배우고픈 바람에서다. 그리고 좀 더 넓은 의미에서 덧없음에 대한 얘기를 하고 싶어서다. 일단 한자풀이부터 해결하고 넘어가보자.

모두 제(諸), 다닐 행(行), 없을 무(無), 항상 상(常)

‘제행(諸行)’은 ‘모든 현상’정도 되려나? 혹은 ‘우주 간 만물’ 즉 ‘만유(萬有)’로도 이해할 수 있으리라. ‘무상(無常)’은 ‘상주(常住)하는 것이 없다’는 의미겠다. 즉 ‘늘 변한다’는 뜻이렷다. 그래서 ‘우리가 거주하는 우주 만물은 항상 변하여 잠시도 한 가지 모습으로 있지 않음’이다.  

불교에서는 일반적으로 이 현실세계의 모든 것은 매순간마다 생멸하고 변화하는 가운데 있다고 말한다. 거기에 ‘항상불변(恒常不變)’이란 것은 결코 존재할 수 없다고 믿는다. 바로 이러한 불교의 관점이 제행무상(諸行無常)이라는 사자성어에 고스란히 녹아있음이라. 일체(一切)는 이리 무상(無常)한데, 우리 인간은 상(常)을 바라니 거기에 모순이 있고 그래서 고통(苦痛)이 있다는 거다. 만물의 이치와 인간의 믿음 사이의 간극으로 인한 ‘고(苦)’인 것이다. 

그러고 보니 1915년에 출판된 정신분석학자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덧없음>이라는 글도 있구나. 이 글은 한 시인을 회고하면서 시작된다. 아마도 그 주인공은 독일의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일 게다. 모든 것들이 ‘덧없음의 운명’을 벗어날 수 없다는 자각으로 슬퍼했던 바로 그 시인 말이다.

그렇다. 이 세상의 모든 아름다운 것들을 노래하던 시인이 그 완전하고 아름다운 것들까지도 결국 소멸할 운명을 피할 수 없음을 자각했다면 얼마나 슬퍼했을 것인가. 그런데 프로이트는 이 시인의 슬픔에 전적으로 공감할 마음은 없었던가보다. 그렇다고 해서 슬퍼만 하는 것이 옳은 것이냐고 반문하고 있으니 말이다. 

어쩌면 프로이트는 이런 말을 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덧없음으로 인해 오히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아름다움의 가치가 더 증대되는 것이 아니겠느냐고. 결국 이 또한 관점의 차이로다. 즉 어떻게 생각하느냐의 문제라는 거다. 이 세상 만물의 운명이 어떻든 그게 어쨌냐는 거다. 그보다 중요한 건 그것을 바라보는 우리의 마음인 것을. 인간의 심연, 그 무의식이 세계를 들여다보는 정신분석학자다운 말이다. 

정말 생각하기 나름인 걸까? 그게 그리 쉬우면 얼마나 좋을까. 갑자기 이 타이밍에 침팬지 박사 제인 구달 선생님의 말씀이 떠올라 혼자 웃었다. 낙관주의자는 가능한 한 모든 세상의 최선이 지금이라고 생각한단다. 그럼 비관주의자는? 낙관주의자가 옳을까봐 두려워한다네. 하하. 그렇다. 우리 삶의 덧없음은 어찌할 수 없다 할지라도 우리가 그것을 바라보는 태도를 희망으로 바꾸는 것은 가능하지 않을까?

희망은 감정도, 생존의 기술도 아니란다. 좀 더 본질적이고 심오한 그 무엇이란다. 선물과도 같은, 힘이나 도구? 그거랑 비슷한 거 말이다. 사실 희망은 살아남은 것들의 특징이고 생존의 본질이라는 거다. 그것이 없으면 우리는 소멸하고 만다잖은가. 

희망은 우리가 역경에 맞서 계속 나아가게 해주는 힘이란다. 꼭 일어나기를 바라지만 그렇게 되게 하려면 열심히 노력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거다. 그것이 비록 일종의 좌절된 형태의 희망일지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