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평성’에 대하여

하버드대 입학시험에서 점수를 약간 높게 받은 백인 학생이 이민자 출신 지원자로 인해 떨어졌다고 가정해보자. 하하, 너무 맥락 없이 훅 들어왔다고 당황하지 마시라. 그럼, 다시…

정의(Justice)란 과연 무엇인가에 대한 얘기를 한 번 해보자는 거다. 시작부터 툭 던져진 저 사례는 형평성(equity) 논의에서 자주 거론되는 ‘소수집단우대정책’의 그 얘기 맞다. 이 세상에 진정한 정의는 없다는 내 개인적 체념은 잠시 접어두자. 정답이 없는 문제일수록 우리는 더 다양한 관점에서 접근할 수 있을 테니. 그리고 정작 ‘정의가 무엇이냐’ 보다 더 중요한 건 거기까지 도달하기 위해 끊임없이 고민하는 과정 그 자체일 수 있으니. 우리는 그 과정에서 개별적 ‘사실’이 아닌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하나의 ‘진실(가치)’을 마주하게 될 테니…

우선 ‘정의’의 대명사 존 롤스에게 저 백인 학생의 상황에 대해 물어보면 뭐라고 답할까? 모두가 알다시피, 그는 모든 조건이 백지화된 상태인 ‘무지의 장막(veil of ignorance)’ 하에서만이 정의의 원리도, 공정한 사회적 합의도 가능하다고 보는 입장이다. 롤스는 사람들의 천부적 재능은 개인의 것이 아닌 공공재에 속한다는 근거를 내세워 저 상황을 정당화하고자 할 게다. 그렇다면 롤스의 ‘정의론’에 ‘공동체주의’로 도전하는 마이클 샌델 교수는 어떨까?그는 ‘입학시험에서 떨어진 백인 학생이 다른 사람을 위해 자신이 희생되었다고 느끼는 대신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반성을 통해 그 자신이 속해 있는 공동체에 공헌한다고 느낄 수 있다’고 말하지 않을까? 그 학생의 희생은 그의 정체성이 결부된 삶의 방식을 실현하는 데 기여한다는 근거로부터 정당화된다고 말이다.

그렇다면 이 얘기를 동양의 사상, 유학(儒学)의 입장에서 한 번 접근해보자. 유학자들도 물론 샌델의 논점을 지지할 것 같다. 즉 앞의 사례에서 다수 인종 출신의 지원자가 적절한 반성을 통해 자신이 공동체를 강화하는 데 기여하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라는 그 지점에선 말이다. 하지만 그들은 공동체를 염두에 둔 이해가 샌델의 주장처럼 단지 반성을 통해 성취될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할 게다. 대신에 오랜 동안의 자기수양(修身)을 통해서만이 가능하다고 하지 않을까? 유교의 최고 덕목인 ‘인(仁)’의 관점에서 보면, 자기수양을 통해 자아에 대한 적절한 감각을 키우고 그 개인의 성공과 번영이 공동체의 발전에 반하는 것이 아닌 조화(和)를 이루는 것임은 너무도 자명하니까.

유가(儒家)의 관점에서 볼 때, ‘사회적 조화(和)’ 그 자체가 좋은 삶을 의미한다. 즉 그것이 바로 삶의 본질이라는 얘기다. 공동체의 구성원들과 조화를 이룰 때 우리 개개인의 잠재력은 발현되며 더 번영할 수 있다. 굳이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를 소환하지 않더라도 타자와의 조화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발전시키며 공동체 안에서 좋은 사람, 좋은 가족, 좋은 시민이 된다는 거니까.

약간 더 높은 점수를 얻은 인종적 다수자 출신의 지원자가 사회적 대표를 덜 가지고 있는 인종적 소수자 출신의 지원자를 포함한 타자와의 조화로운 관계를 구성함으로써 공동체 건설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그렇다면 그는 인종 평등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사회와 더불어 공동 목표를 함께 공유하며 그렇게 해서 입시 결과가 사회적 조화에 가치 있게 공헌을 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이것이 어쩌면 중국의 유가 사상을 연구하는 중국학자들의 의견일 거다. 그뿐인가. 공동체 안에서 공동선(Common Good)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때때로 사람들의 희생이 필요하며 그 희생은 다시 그 사람 자신의 삶을 가치 있게 해줄 것이라는 점을 부인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내가 그들의 논지에 깊이 공감하고 박수를 보내고픈 지점이다.

너무도 이상적인 얘기 같지만 우리 사회가 진정 필요로 하는 덕(德)이 있다면 바로 이게 아닐까 싶다. 그것은 아마도 인도의 민족해방운동가, 그 거룩한 이름 간디가 ‘사회악’으로 규정한 7가지가 사라지는 그날에나 만나게 될 그런 이상사회이지 싶다. ‘원칙 없는 정치, 노동 없는 부, 양심 없는 쾌락, 인격 없는 교육(지식), 도덕성 없는 상거래, 인간애 없는 과학, 희생 없는 신앙’, 생각해 보라. 이 7가지에,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를 분노케 하는 모든 것이 다 망라되어 있지 않은가. 이 사회악이 다 제거되고 다함께 잘 사는 사회는, 그래서 더불어 행복한 삶은 정말 이상적 꿈에 불과한 것일까? 중국 작가 라오서는 소설 [낙타상자]에서 이런 말을 했다.

“비는 부자에게도 내리고 가난한 사람에게도 내린다. 의로운 사람에게도 내리고 의롭지 않은 사람에게도 내린다. 그러나 사실 비는 공평하지 않다. 왜냐하면 공평하지 못한 세상에 내리므로.” ㅠㅠ

이런 슬픈 탄식 앞에서 ‘정의사회’를 감히 상상해본다. 단순한 숫자로 행복을 가늠하는 공리적 접근이나 자유라는 이름으로 개인의 선택만을 무조건적으로 지지하는 게 과연 옮은 것일까? 보다 나은, 좋은 삶을 고민하고 그 속에서 나타날 수밖에 없는 갈등을 기꺼이 끌어안을수 있는 성숙된 인간으로의 길은 없는 것일까? 그렇다. 양심의 디폴트가 우리 생존을 보장하지 않는다고 믿는 한 그 길은 너무도 험난한 여정임에 틀림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문화를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사회는 조금씩이나마 그 ‘정의’라는 이상향에 가까워지는 방향으로 발전하는 게 아닐는지.

고된 노동 속에서도 우리는 행복할 수 있다. 인간이 혐오하는 것은 아무런 결과도 만들어내지 못하는 노동인 거지 노동 그 자체는 아니기에. 대학 때 만났던 ‘인간이 부(富)에 대해 그토록 탐욕스럽게 된 것은 분배의 조건이 너무나 불공정하기 때문’이라던 문장은 참 강렬했다. 나도 믿고 싶었던 것 같다. 노동을 통해 자신에게 충분한 몫이 돌아오리라는 확신만 있다면 인간은 더 열심히, 더 잘 일할 수 있을 것이라고.  

지루한 일상에서 활기를 유지하는 것은 강물을 거슬러 헤엄치는 것과 같다니 얼마나 많은 이들이 절망할까. 살면서 때로 그것이 불가피하다면 조용히 합리적으로 그리고 정당하게 절망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앞으로는 묵직한 무게감을 견디며 의연하게 내딛는 모든 걸음걸음이 존중받고 절망에서 출발하지 않고도 소소한 행복에 이르는 그런 날들이었으면 좋겠다.

지금 사는 세상이 슬픈 일, 속상한 일, 답답한 일이 많고 많지만, 그럴수록 두 발이, 두 손이, 두 눈이 협동하기로 되어 있는 존재인 우리가 한마음으로 연대하며 더불어 앞으로 나아가기를…^^

글을 마치며 무심코 내 눈에 들어온 한자, ‘和(화평할 화)’

유가에서 삶의 본질이라던 ‘사회적 조화’를 의미하는 바로 그 한자, ‘和(화)’다. ‘和’의 구조를 해체해보니 ‘禾(벼 화)’에 ‘口(입 구)’다. 와, 소름~ ㅎㅎ ‘곡식을 먹는다?’ 설마… ‘음식을 화평하게 나누어 먹는다’는 뜻?? 세상에나… ‘분배의 정의’가 바로 이 한 글자에 오롯이 담겨있었네. 무슨 설명이 더 필요한가?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