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수아즈 사강의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나를 파괴할 권리

가을이 되니 문득 브람스의 음악이 듣고 싶어 졌다. 가을날의 고독과 너무도 잘 어울리는 곡이지 않은가. 생각이 나는 건 당연할 터. 그래서 월요일 저녁시간 무한 반복해서 듣는 중이다. 특히 다소 우울감을 주지만 부드러운 악상으로 브람스 특유의 중후함을 느낄 수 있는 교향곡 제3번 3악장을 들으면 반드시 세트로 떠오르는 책이 있다. 프랑수아즈 사강의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모르는 것은 쓸 수가 없다. 느끼지 못하는 것도 쓸 수가 없다. 체험하지 않은 일은 쓸 수가 없다”라고 했던 사강이 사랑과 이별의 섬세한 감정을 담담한 필치로 써내려간 소설이다. 14살 연상의 여인 폴을 사랑한 스물다섯 살의 변호사 청년 시몽을 응원하며 읽었던 기억이 떠올라 혼자 피식 웃는다. 그토록 저돌적이면서도 따뜻했던 시몽의 사랑은 결국 이루지 못했지만 난 살면서 가끔씩 상상하곤 한다. 

‘폴과 시몽이 결혼을 했다면 행복했을까?’ 그리고 분명 행복했을 거라 우기고 싶어진다. 6년 동안 연애만 하고 있는 폴과 로제, 이 둘의 권태로운 관계 속에서 폴이 느끼는 외로움이 나에게도 전해진 탓이리라. 사랑도 해야겠고 자유도 포기할 수 없다는 남자 옆에서 늘 불안하고 그래서 더 고독한 폴이 진정으로 행복했으면 해서다. 결국 로제에게로 돌아가는 폴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나이가 들어보니 내가 살아보니 폴의 그 마음도 이해가 되더라.

그녀의 슬픔을 첫눈에 알아본 시몽이란 남자, 정말 내가 많이 애정 하는 캐릭터다. 무모하리만치 사랑 그 하나만을 보고 내달렸던 그의 사랑은 끝까지 진실했다. 그래서 좋았다. 그 멋진 청년 시몽에게 말해주고 싶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어서 슬프지만 그래서 더 아름다웠노라고.

브람스와 클라라 슈만의 나이 차이가 14살인 걸 보면 어쩌면 사강은 소설 속에서라도 브람스와 클라라의 사랑을 응원했는지도 모르겠다. 스승의 부인을 사랑한 브람스의 슬픈 러브스토리는 내가 그의 음악을 좋아하게 만들었던 이유 중 하나였다. 물론 나의 최애는 여전히 베토벤이지만 말이다. 그래도 음악의 분위기가 많이 닮아있어서 난 베토벤과 브람스 이 두 음악가의 교향곡을 정말 사랑한다. 

스물넷의 나이에 사랑과 이별, 그리고 고독이라는 감정을 이토록 섬세하게 묘사해낸 사강에 대해 말하지 않을 수 없겠다. 교통사고 후 살기 위해 투여했던 모르핀이 결국 독약으로 돌아와 그녀를 죽음으로 몰고 가던 그때, 그녀에게 생명의 빛은 책과 글쓰기였다. 지속되는 고통의 나날들, 수면제를 복용해도 잠들지 못하는 밤, 보들레르와 프루스트, 그리고 셀린을 읽으며 행복하기도 절망하기도 했던 그녀… 모르핀 중독에 의식 분열 속에서도 지독한 글쓰기에 대한 욕망은 사그라들지 않았다.

그녀의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이 소설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그 유명한 ‘고독형’을 선고하는 부분을 빼놓을 수 없다. 식당에서 폴과 식사를 함께 하고 나서 치정사건의 재판 과정을 흉내 내던 시몽이 이렇게 말한다. 

“그리고 당신, 저는 당신을 인간으로서 의무를 다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고발합니다. 이 죽음의 이름으로 사랑을 스쳐 지나가게 한 죄, 행복해야만 할 의무를 소홀히 한 죄, 핑계와 편법과 체념으로 살아온 죄로 당신을 고발합니다. 당신에게는 사형을 선고해야 마땅하지만 고독형을 선고합니다.”

언젠가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는 고독마저 감미로운 청춘시절에만 쓸 수 있는 소설이라는 평을 읽은 적이 있다. ‘나를 파괴할 권리’를 멋지게 행사하기 위해서는 우선 멋지게 파괴될 만한 ‘나’가 있어야 하는데, 그 역시 청춘에만 존재하기 때문이라는 것. 이 때문일까…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라고 말했던 이 소설의 작가 프랑수아즈 사강, 그녀는 우리의 기억 속에 영원토록 ‘나를 파괴할 권리’를 마음껏 누리는 청춘의 상징처럼 남아있다. 

청춘, 이제 내게 결코 다시 돌아오지 않을 시간들이다. 나에게 청춘은 진정한 고독이 무엇인지 알기나 했던 시간들이었을까? 인생에 관한 한 우리 인간은 정말 지독한 근시일 수밖에 없는 것일까? 멀리 바라볼 줄 모르는… 그리고 모든 인간은 시간 앞에서는 그저 덧없이 흘러가는 존재일 뿐일까. 인생은 언제나 그렇게 ‘잃어버린 시간’일 뿐이라고? 

갑자기 이제는 지나간 시간의 아련한 추억이 되어버린 내 청춘이 새삼 그리워졌다. 내 청춘 역시 분명 많이 아팠을 텐데.. 그 아픔이 어떤 모습이었는지 생각이 나질 않는다. 나 역시도 다른 꽃은 움도 틔우지 않은 이른 봄 향기를 뽐내는 매화가 되려고 공연히 성급하게 아파했던 것은 아녔을는지… 늦가을 고운 빛의 국화가 되어도 좋았을 텐데 말이다. 

문득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고 그 작품 속 등장인물인 ‘사강’을 자신의 필명으로 삼았던 그녀가 스물넷에 썼다는 이 소설 속으로 다시 한 번 빠져들고 싶은 유혹이 스멀스멀 찾아들고 있었다. 잃어버린 내 청춘을 찾아 그리고 그 시절의 고독을 찾아 시간여행을 떠나고 싶었던 것이리라.

참 이 소설은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한국어 제목은 “이수(離愁)”다. 언젠가 이 영화도 포스팅하고 싶을 정도로 참 좋아하는 고전 중의 하나다. 이 영화를 보면 브람스의 교향곡 제3번 3악장의 매력에 푹 빠지게 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