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타도 한 번쯤은 뛰었으면 좋겠다

애틋하지 않은 생명체가 어디 있을까마는 유독 낙타를 보면 가슴이 아릿하다. 별님인지 슬픔인지 가득 담은 큰 눈망울은 언제나 눈물겹다. 가도 가도 끝없는 사막을 걷는 그 높고 굴곡진 등이 가벼워질 새 없는 녀석의 고단한 운명이 애처로워서 일까. 

낙타를 보면 독일의 철학자 니체를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다. 그는 인간의 인식 유형에는 ‘낙타, 사자, 어린아이’ 이 세 가지가 있다고 했다. 그중 낙타의 유형은 그저 살아남기 위해 주인에게 복종하는 인간이다. ‘주체적인 나’로 살지 못하는 인간의 전형이 바로 낙타인 셈이다. 니체는 내 인생의 주인으로 살기 위해서는 낙타와 사자를 부정하고 어린아이의 단계에 도달해야 한다고 했다. 지나간 것은 빨리 잊고 언제나 현재를 살며 새롭게 출발할 수 있는 어린아이만이 영원의 시간을 긍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무거운 짐을 잔뜩 지고도 버거운 타인을 품는 그 무던함을 보면 니체가 왜 낙타 유형을 말했는지 고개가 끄덕여진다. 오죽했으면 권순진 시인은 <낙타는 뛰지 않는다>에서 이렇게 노래했으랴.

『그저 참아내고 모른 척한다/모래 위의 삶은 그저 긴 여행일 뿐/움푹 팬 발자국에/빗물이라도 고여 들면 고맙고/가시 돋친 꽃일망정 예쁘게 피어주면/큰 눈 한 번 끔뻑함으로 그뿐/낙타는 사막을 달리지 않는다』

모래바람에 감정이 닳아 없어진 건지 태생적 무감 체질인 건지 낙타는 그저 묵묵히 걸을 뿐이다. 그런 낙타도 자기 새끼가 죽어 사막에 묻히면 오래도록 그 장소를 기억한단다. 그래서 사막을 건너던 상인들 중 죽은 자를 묻을 땐 낙타 새끼를 어미 낙타 앞에서 죽여 함께 묻는다고. 나중에 어미 낙타를 데려오면 그 무덤을 쉽게 찾아낼 수 있기 때문이란다. 낙타의 모성애와 인간의 잔인함이 양가적 감정으로 다가오며 참 마음 아프다. 미안하다. 낙타야. ㅠㅠ

그래서일까. 낙타의 모습에서 우리 어머니들 인고의 삶을 본다. 버틸 수 없이 힘든 상황이 와도 자식을 품고 내려놓지 않는 강인한 사랑이 보인다. ‘바보’라고 타박하면서도 낙타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그 의연함이 존경스럽다가도 이내 애잔해지는 건 이렇듯 낙타의 모습에서 우리 어머니의 슬픈 자화상을 보기 때문이리라. 나 말고도 챙길 게 너무 많아 주체적인 삶을 살아내기가 쉽지 않은 우리 엄마들의 인생 말이다. 미련해서 슬프지만 그래서 더 아름답고 가장 용감한 그런 엄마의 인생 말이다. 

낙타도 한 번쯤은 뛰었으면 좋겠다. 등 위의 짐 다 내려버리고 사막을 마음껏 달리는 그날이 왔으면 좋겠다. 우리 엄마들이 꽃 핀 들판에서 나비처럼 춤추는 그런 날이 왔으면 좋겠다. 한 번쯤은 어깨를 무겁게 짓누르는 자식 잠시 내려놓고 자유롭게 훨~훨 춤을 추었으면 좋겠다. 그것이 니체의 관점에서 이상적이고 올바른 존재인 자유 긍정의 ‘어린아이’ 단계로 가는 첫걸음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