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오랜만에 만난 친구의 입에서 흘러나왔던 귀에 익은 에세이의 첫 구절이 비 내리는 오후, 내게로 다시 왔다. 창밖 풍경에 빠져 있다가 갑자기 책장을 뒤져 다시 읽는 유안진의 에세이 <지란지교를 꿈꾸며>.
[저녁을 먹고 나면 허물없이 찾아가 차 한 잔을 마시고 싶다고 말할 수 있는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다. 입은 옷을 갈아입지 않고 김치 냄새가 좀 나더라도 흉보지 않을 친구가 우리 집 가까이에 있었으면 좋겠다.]
아… 여전히 좋고 따뜻한 글귀다. 그럼, 오늘의 성어는 지란지교(芝蘭之交)? 오케이~ 지난 번 관포지교(管鮑之交) 편에서 언급하기도 했던 바로 그 성어! 일단 한자풀이부터?
지초 지(芝), 난초 란(蘭), 어조사 지(之), 사귈 교(交)
‘지란(芝蘭)’은 ‘지초와 난초’다. ‘지교(之交)’는 ‘~의 사귐’이렷다. 그러니까 문자 그대로 보면, ‘지초와 난초의(?지란 같은??) 사귐’이라는 해석이 가능하겠다. 글자대로만 뜻풀이하니 좀 어색하네. 난초(蘭草)는 익숙하지만, ‘지초(芝草)’는 처음 듣는 거라 찾아봤다. 조선에서 음식과 의복의 자줏빛 천연염료로 사용했던 지치과(Borage family)에 속하는 다년생 초본식물이라네. 상식 하나 접수~ 이 성어는 <명심보감(明心寶鑑)>의 ‘교우(交友)’편에 나오는 공자님의 말씀으로부터 유래되었단다.
<명심보감(明心寶鑑)>? 이거 유명한 책 같은데? 하하. 그렇다. 명나라 학자 범립본(范立本)이 사서삼경 등 유교 경전과 유학자들의 저술을 중심으로 여러 고전에서 금언(金言)과 명구(名句)를 추려내 주제별로 엮어낸 책이다. 자, 그럼 공자님이 뭐라 하셨을까나.
子曰:“與善人居(여선인거),如入芝蘭之室(여입지란지실),久而不聞其香(구이불문기향),即與之化矣(즉여지화의)。공자(孔子) 왈, 착한 사람과 같이 거하면 지초(芝草)와 난초(蘭草)가 있는 방에 들어가는 것과 같아서 오래도록 그 향기를 맡지 못해도 곧 더불어 그것에 동화되느니라.
지란(芝蘭)이 있는 방에 들어가는 것과 같다니… 아, 그 맑고도 깊은 향이 가득한 방안에 나를 가만히 놓아보니, 자연스럽게 얼마전 내가 친구들을 떠올리며 써내려간 글이 생각났다. 그날의 기분을 되살리고파서 다시 꺼내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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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전공이 중국어임에도 지금까지 나는 중국 영화나 중국 드라마에 빠져본 적이 없다. 영화를 좋아하고 천 편이 훌쩍 넘는 많은 영화를 봤지만 그동안 내가 본 영화 중에 중국 영화는 손에 꼽을 정도다(물론 그중에 정말 좋아하는 영화도 있지만).
중국어 자체를 너무 좋아하다 보니 중국어로 써진 문장 표현에서 느끼는 감동이 한국어보다 훨씬 더 와 닿을 때도 많았다. 중국 고전은 말할 것도 없고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나 드라마 같은 영상물에서 받는 느낌은 또 다른가 보다. 뭐가 문제인지는 모르지만.
그런 내가 요즘 중드에 빠졌다. 친구의 소개로 며칠 전부터 보기 시작한 드라마가 있는데.. 처음엔 그저 실생활 중국어를 접할 일이 없으니 공부 차원에서 보자 했다.
화려한 도시 상하이를 공간적 배경으로 요즘 젊은이들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굉장히 현대적인 드라마였다. 일단 현대 중국이 이렇게 많이 변모했구나 놀라워하면서 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디지털 시대를 반영하는 새롭게 생겨난 중국어 표현들을 접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보다 보니 점점 빠져들더라. 개성이 각자 다른 세 친구가 서른 즈음에 겪게 되는 다양한 삶의 모습들을 보면서 자연스레 내 생을 함께 돌아보는 시간이 되더라.
무심한 남편과의 일상, 그 안에서 소통의 부재에 염증을 느낀 친구가 이혼 후 깨닫게 되는 ‘평범한 일상과 공기처럼 곁에 있어주던 남편의 소중함’… 구질구질한 현실을 벗어날 수 있는 화려하고 안정된 삶을 꿈꾸던 직장 여성이 그동안 자신이 좇던 헛망을 여러 좌절을 맛보며 알찬 내용으로 단단하게 채워가는 모습… 그리고 완벽한 가정이라 믿었던 결혼이 하루아침에 산산조각 나는 과정에서 더 이상 그 누구의 아내, 엄마, 딸이 아닌 오롯이 자신의 이름으로 살아가고자 결심하는 현명함…
이 세 친구들의 좌충우돌 성장기가 그저 남 일처럼 느껴지지 않고 자꾸 나와 대입하며 보게 되더라. 주인공들의 시련과 아픔에 코끝이 시큰해지기도 했다가 나는 감히 못할 일들을 당당하게 해내는 주인공들을 보면서는 대리만족도 하게 되고… 어느샌가 나는 그 세 친구를 응원하고 있더라.
무엇보다 인상적이었던 건 세 친구들의 찐 우정이었다. 사람이 살면서 어찌 늘 웃게 되는 좋은 일만 있을 수 있겠나. 누구나 좌절 속에서 절망하며 실의에 빠지기도 한다. 그럼에도 그 과정이 고통으로만 끝나지 않는 건 늘 곁을 지키며 함께 견뎌주는 든든한 친구가 있기 때문이다.
세 여인의 우정은 정말이지 부러울 정도로 진하고 눈물겨웠다. 그런 친구들이 내 편으로 남아있는 한 제 아무리 힘든 일이 닥치더라도 포기하지 않고 다시 용기 낼 수 있으리라. 나 역시 이미 경험한 일이기도 하고… 드라마를 보면서 나의 지나온 날들을 떠올리며 미소 짓게 되던 대목이기도 했다. 어쩌면 이것이 내가 평소 나답지 않게 중드에 빠져들게 된 진짜 이유일지도 모르겠다.
문득 내 주위의 모든 이들이 감사했다. 나에게 힘이 되어주었던 친구들에게 고마웠노라 인사하고 싶어 졌다. 그들이 나와 함께 해주었기에 지금 내가 여기, 이렇게 평범한 일상을 다시 살아내고 있는 것이리라.